경전암송

번뇌는 토한 음식 같은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16. 10:07

번뇌는 토한 음식 같은 것

 

 

지금시각 아침 620. 사무실에 와 있다. 아침 6시 바로 이전에 떠난 것이다. 오늘은 좀더 일찍 나서고자 했다. 하루일과를 6시부터 하고자 한 것이다.

 

 

아침 6시는 분기점이다. 아침 6시까지 누워 있으면 게으른 것으로 간주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6시 이전에는 일어나야 한다. 요즘은 게송 외우기를 하고 있다.

 

아침식사는 밤고구마로 하기로 했다. 작은 고구마 하나를 에어프라이어로 돌렸다. 조건은 18016분이다. 이와 같은 조건으로 조리하면 밤고마가 꿀고구마가 되는 것 같다. 샌드위치 먹는 것 보다 훨씬 낫다.

 

 

하루를 남들보다 일찍 시작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남들이 잠들어 있을 때 먼저 깨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사는 맛이 난다.

 

오늘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긴 일어났는데 약간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때 방법이 있다. 게송을 외우는 것이다. 발음하기도 힘든 빠알리게송을 억지로 외우다 보면 우울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오늘 마음의 양식은

 

오늘 아침 밤고구마를 먹었다. 매일 몸을 위한 양식을 먹듯이, 매일 마음을 위한 양식도 먹어야 한다. 오늘 마음의 양식은 법구경 찟따왁가 일곱번째 게송이다. 오늘 이 게송을 다 외우면 하루를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밥값은 한 것이다.

 

 

아나왓수따찟따사

아난와하따쩨따소

뿐냐빠빠빠히낫사

낫티 자가라또 바양

 

마음에 번뇌가 없고

마음의 피폭을 여의고

공덕과 악행을 떠난

깨어있는 님에게 두려움은 없다.”(Dhp.39)

 

 

네 구절로 된 게송이다. 이를 사구게라고 한다. 모두 서른 세 글자이다. 이 짧은 게송을 외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백번이고 반복해서 소리내서 중얼중얼 거리면 외워진다.

 

빠알리어는 매우 생소하다. 영어와 같은 계열의 언어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번에 외울 게송이 특히 그렇다. 첫번째 구절에 있는 아나왓수따와 두번째 구절에 있는 아난와하따는 외기 힘들다. 이럴 때는 먼저 뜻을 알고 외워야 효과적이다.

 

아나왓수따는 아왓수따(avassuta)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안(an)이 붙은 것이다. 그래서 아나왓수따가 되는데, 이는 번뇌가 없고라는 뜻이다. 아난와하따는 안와하따(anvāhata)에 역시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안(an)이 붙어서 피폭을 여의고라는 뜻이다. 게송을 외울 때는 빠알리 사전을 찾아보아야 한다.

 

심오하고 심오한

 

법구경 게송은 심오하다. 단어 하나에도 심오한 뜻이 있고, 한구절에도 역시 심오한 뜻이 있다. 그래서 법구경 게송은 심오하고 심오하다.

 

첫번째 구절 아나왓수따찟따사(Anavassutacittassa)’마음에 번뇌가 없고로 번역된다. 어떤 뜻일까? 이럴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다행히도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법구경을 보면 상세한 주석이 있다. 전재성 선생이 빠알리 주석을 직역해 놓은 것이다. 마음에 번뇌가 없다는 것은 마음이 탐욕(raga)으로 물들지 않은 것임을 말한다.

 

 

마음이 구타당한 자

 

두번째 구절 아난와하따쩨따소(ananvāhatacetaso)’마음의 피폭을 여의고로 번역된다. 마음이 구타당한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빠알리어 안와하따(anvāhata)는 영어로 ‘beaten; struck’의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 안에 황무지가 생겨난 것을 말한다. 얻어 맞았을 때 마음이 황폐화되는 것과 같다.

 

법구경 주석에 따르면 세 가지 마음의 황무지가 있다. 탐욕의 황무지, 성냄의 황무지, 어리석음의 황무지를 말한다. 그런데 마음의 황무지라고 했을 때 이는 맛지마니까야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M16)을 떠올리게 한다.

 

맛지마니까에서 말하는 마음의 황무지는 다섯 가지이다. 스승에 대한 의심, 가르침에 대한 의심, 승가에 대한 의심, 배움에 대한 의심, 동료에 대한 성냄을 말한다. 그런데 법구경 주석에서는 탐, , 치에 대하여 마음의 황무지라고 했다.

 

황무지를 뜻하는 빠알리어 낄라(khil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놀랍게도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와 세 가지 마음의 황무지에 대하여 나와 있다. 세 가지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근거의 경은 ‘S.V.57’이라고 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 557페이지의 뜻이다.

 

상윳따니까야를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황무지가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바로 탐욕의 황무지, 성냄의 황무지, 어리석음의 황무지이다.”(S45.166)라고 되어 있다. 마음의 황무지가 다섯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도 있는 근거가 되는 경이다.

 

불교인이라면 항상 경전에 근거해서 말해야 한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으면 개인적인 견해, 즉 사견이 되어 버린다. 법구경 39번 게송에서 마음의 피폭을 여의고라는 말은 마음의 황무지를 여의고라는 뜻이 된다.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는 마음이 성냄에 의해서 구타당한 것을 말한다.”(DhpA.I.309)라고 했다.

 

마음이 피폭됐다는 것은 마음이 구타당했다는 말과 같다. 특히 성냄에 의해서 구타당한 것이다. 성냄에 의해서 마음이 구타당했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성내고 난 다음 마음이 황폐화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피폭당했다는 것은 성냄의 황무지(doso khilo)’인 상태를 말한다.

 

선업도 악업도 짓지 않는다

 

세번째 구절 뿐냐빠빠빠히낫사(Puññapāpapahīnassa)’공덕과 악행을 떠난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거룩한 길(阿羅漢)을 통해서 공덕(puñña)이나 악행(papa)을 모두 끊은 자(pahīnassa)를 말한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면 악행은 물론 더 이상 선업공덕도 짓지 않는다. 주석에서는 뿐냐빠빠빠히낫사에 대하여거룩한 길을 통해서 미래 재생의 원인이 되는 공덕과 악행을 모두 부순자라고 했다.

 

뿐냐빠빠빠히낫사와 관련하여 육조단경에는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 있다. 무문관 23칙이기도 한 이 말은 “선악 (善惡)의 사량 (思量), 곧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생각을 끊은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량분별하지 않기 위해서 악은 물론 선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육조단경의 불사선불사악과 법구경의 뿐냐빠빠빠히낫사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차이가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사량분별하지 말라는 뜻이지만, 법구경에서는 미래 재생의 원인이 되는 공덕과 악행을 짓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일까? 이는 실천의 차이라고 본다.

 

뿐냐빠빠빠히낫사는 단지 사량분별하는 것을 넘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걸식자의 경에서 부처님은 바라문 걸식자에게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라고 했다. 걸식한다고 다 같은 걸식자가 아님을 말한다.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자가 진정한 걸식자(bhikkhu)임을 말한다.

 

누가 깨어 있는 자인가?

 

네번째 구절 낫티 자가라또 바양(natthi jāgarato bhaya)’깨어있는 님에게 두려움은 없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두려움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바양(bhaya)이다. 어떤 두려움인가? 번뇌에 대한 두려움이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번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그는 잠을 자건 깨어있건 번뇌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까닭에 번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DhpA.I.309)라고 했다. 마음의 번뇌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라한이 아닐 것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남아 있는 번뇌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정도일까? 범부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수미산만큼이나 많다고 했다. 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극히 적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에게는 이미 부서져 소멸해 버린 괴로움이 많고 남은 것은 적어서 많이 잡아 일곱번 더 윤회하더라도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수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비교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S56.49)라고 했다.

 

자가라또(jāgarato)깨어 있는 자로 번역되었다. 자가라따의 뜻은 ‘watchfulness, vigilance’이다. 주시 또는 경계의 뜻이다. 빠알리사전에서는 이 단어에 대한 사용 경을 ‘S.I,3’라고 소개하고 있다. 찾아 보니 깨어 있을 때 다섯이 잠자고, 잠잘 때 다섯이 깨어 있으며, 다섯으로 티끌에 물들고, 다섯으로 맑고 깨끗해지네.”(S1.6)라는 게송이 있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게송이다.

 

게송을 보면 다섯이 네번 나온다. 여기서 다섯은 오장애와 오력에 대한 것이다. 깨어 있을 때 다섯은 오력에 대한 것이고, 잠 잘 때 다섯은 오장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 39번 네번째 구절 주석을 보면 그가 깨어 있는 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섯 가지 깨어 있음의 고리 즉, 믿음(saddha), 정진(viriya), 새김(sati), 집중(samādhi), 지혜(pañña)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DhpA.I.309)라고 설명하고 있다.

 

흔히 깨달은 자를 깨어 있는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깨어 있다는 뜻은 빠알리어로 자가라(jāgara)이다. 이는 영어로 ‘awake; vigilant; watchful’의 뜻이다. 그런데 자가라가 들어간 게송을 보면 오력으로 깨어 있는 자가 됨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는 자에게 두려움(bhaya)은 없다고 했다. 어떤 두려움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번뇌에 두려움이다. 이전 상태로 돌아 갈 수 없음을 말한다. 마치 토한 것을 다시 삼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똥이 되어 나온다. 토한 것이라면 어떨까? 누구도 먹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딸라뿟따 장로는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라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거친 번뇌는 버려진다.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욕망, 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아라한이 아닌 것이다. 아라한에게 있어서 번뇌는 토한 음식과도 같은 것이다. 토한 것을 먹을 수 없듯이 아라한에게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자가라또 즉, 깨어 있는 자는 번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를 말한다. 마치 번뇌를 토한 음식처럼 보기 때문에 결코 이전 상태로 돌아 갈 수 없다. 이는 네 가지 길로 추방된 것이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길을 말한다.

 

네 가지 길에 의해서 추방된 번뇌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서 성자가 되면 번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이는 그가 항상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라는 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토한 음식을 보는 것처럼 추방된 번뇌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오늘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법구경 39번 게송을 외우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 외운 여섯 개의 게송을 모두 확인해야 한다. 이전에 외운 것을 확인하고 새게송 외우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찟따왁가 열한 개 게송은 마지막 게송 외울 때 모두 다 외워질 것이다.

 

마음이 우울할 때 가만 있어서는 안된다. 밖에 나가서 걷다 보면 마음이 바뀐다. 오늘같이 따뜻한 햇볕을 온 몸으로 받고 걷다 보면 기분이 달라진다. 그러나 나에게는 게송 외우기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발음하기도 힘든 빠알리어를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입으로 중얼중얼 거리다 보면 어느 순간 다 외워진다.

 

아무리 많은 게송이라도 외울 수 있다. 이는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게송을 이해하는 차원과 다른 것이다. 게송은 이해하기 보다는 외워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더 좋은 것은 뜻을 알고 외우는 것이다.

 

법구경은 언제 읽어 보아도 감동적이다. 그래서 쓸데없는 백 개의 시를 말하는 것보다 들어서 안온해지는 한마디 진리의 말씀이 낫다.”(Dhp.102)라고 했다.

 

법구경은 진리의 말씀(Dhammapada)’이다. 진리의 말씀은 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경구는 외우지 않음이 티끌이요 집은 보살피지 않음이 티끌이다.”(Dhp.241)라고 했다.

 

맨날 경전공부만 한다고 하는데

 

어떤 이는 경전공부만 한다고 비난한다. 백번 공부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헛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을 하지 않고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것과 같다고도 말하고, 수영하는 사람이 수영을 하지 않고 책으로만 배우는 것과 같다고도 말한다.

 

백날 책을 보아 보았자 실제로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이를 경전공부하는 것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교학과 수행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바라문 셀라에게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88)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또한 몰라도 되는 것도 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지만, 몰라도 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이다. 이는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한 조건에 해당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Stn.588)라고 한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을 알고자 한다. 그것은 경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수레나 되는, 책장 가득 되는 빠알리삼장을 다 알 수는 없다. 평생 가도 다 읽어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핵심을 모아 놓은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법구경이다.

 

내가 오늘 맛본 것은

 

법구경 423게송은 모두 외워야 할 것이다. 실제로 스리랑카에서는 비구계를 받을 때 법구경을 모두 다 외워야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외우고 뒤로도 외우는 것이다. 담마끼띠 스님에게 들은 말이다.

 

법구경 외우기에 도전하고 있다. 과연 이 생에서 다 외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제 39번 게송을 외우고 있다. 해 보는 데까지 하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외우면 맛이 난다는 것이다.

 

음식은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난다. 마찬가지로 게송을 외우면 외울수록 맛이나는 것 같다. 그 맛은 진수성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도 나는 게송을 외운다. 오늘 해야 할 일이다. 지금 시각 1020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으로 글쓰기가 모두 끝났다.

 

 

내가 오늘 맛본 것은

백 가지 맛의 청정한 음식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니,

앎과 봄이 한량없으신,

고따마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이다.”(Thag.91)

 

 

2021-09-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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