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진리의 말씀은 외워야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7. 07:04

진리의 말씀은 외워야


이 몸과 마음은 내것일까? 전에는 내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마를 알고 나서부터는 바뀌었다. 이 몸과 마음은 내것이 아니라고.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니면 누구것이란 말인가? 이 몸과 마음은 주인이 없는 것인가? 담마를 공부하다 보면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몸이 내것이 아닌 것은 경전에도 나와 있다. 나는 내몸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몸이 아플 때 이는 나의 통제권을 벗어난 것이다. 진정 몸이 내것이라면 아프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 더 있다. 몸이 내것이라면 늙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은 반백을 넘어 백발로 진행되고 있다.

나의 몸은 통제불능이다. 생명이 있는 한 나의 몸은 나의 통제 바깥에 있다. 머리털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손톱과 발톱도 날자가 지나면 길어진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는 어떠할까? 현미경으로 몸을 들여다본다면 요동치고 있을 것이다. 한달전의 내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그 사이에 세포가 싹 바뀌어 있을 것이다.

몸이 내몸이 아닌 것처럼 마음도 내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금방 증명된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거기에 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항상 대상에 가 있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 (Dhp.35)


법구경 35번 게송에서는 마음에 대해서 경망한 것이라고 했다. 경망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라후(lahu)이다. 이 말은 'light; quick'의 뜻이다. 마음은 빠르게 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손가락 튕기는 순간에도 수없는 마음이 생멸한다고 했다.

법구경 35번 게송은 오늘 외울 게송이다. 이를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오늘 외울 게송은 오늘 일용할 양식이 된다. 오늘 이것 하나만 외워도 보람 있는 날이 된다. 밥값은 했다고 볼 수 있다.

어제는 34번 게송을 외웠고 그제는 33번 게송을 외웠다. 법구경 찟따왁가, 즉 마음의 품에 있는 게송이다. 찟따왁가는 마음의 속성에 대해 짤막한 문구로 소개하고 있다. 마음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내것이 아님을 말한다.

마음이 내것이라면 내마음대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눈과 귀 등 여섯 감역에 늘 마음이 가 있다. 매혹적인 형상을 보면 마음은 벌써 거기에 가 있다. 마음은 대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 든지 내려가 있다. 그래서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Dunniggahassa lahuno, yatthak
āmanipātino) 마음"(Dhp.35)이라고 한 것이다.

몸도 내것이 아니고 마음도 내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면 나의 통제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왕이 자신의 영토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듯이, 나도 몸과 마음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몸은 저절로 생장한다. 머리털이나 손톱, 발톱을 보면 알 수 있다. 몸의 장기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교체된다. 이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는 것이다. 마음도 내마음이 아니다. 노래가사에도 있듯이 "내마음 나도 모르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로보트와 같은 것이라고. 마치 프로그램된 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생명기능이 있는 한 몸은 대사작용을 하고 마음은 생존본능과 생식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생체로보트같은 것이라고.

내가 생체로보트같은 것이라면 나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로지 본능에만 의존하여 감각적으로만 사는 축생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 내몸은 대사는 스스로 하지만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몸은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움직인다. 몸은 정신이 없으면 나무처럼 가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은 본능적이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먹기 위해서 움직이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움직인다. 이를 생존본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도 동물적 영역이 있기 때문에 본능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성이다. 이성이 있어서 동물과 차별화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유는 언어적 능력이기 때문에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사유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이성으로서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우리 몸과 마음은 본능적이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성이 있기 때문에 통제가능한 것이다. 마치 커다란 코끼리 등에 탄 작은 사람과 같다.

 


야생의 코끼리는 통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련사의 의해 길들여진 코끼리는 조련사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코끼리 등에 탄 자와 같다. 이때 코끼리는 본능을 상징한다. 축생과 같은 마음이다. 코끼리 등에 탄 작은 사람은 이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코끼리가 화가 나면 통제불능이 된다는 것이다. 작은 인간 힘으로는 제어가 안된다. 평소에 코끼리를 훈련시켰다면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법구경에 따르면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이다. 마음은 통제불능이라는 말과 같다. 그런 마음은 다스려야 할 대상이다.

본래 마음이 착한 것이라면 다스릴 필요 없을 것이다. 본래 마음이 불선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은 제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을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잡는다. 마치 활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 (Dhp.33)이라고 한 것이다.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 (Dhp.35)라고 했다.

매일 한게송씩 외우고 있다. 어제와 그제 왼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게송 외우기에 돌입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전에 외운 것을 잊어버린다. 마치 벽돌쌓듯이 단계적으로 외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매일 새벽 힘들게 외우는 것일까? 마음을 다잡기도 위해서 외운다.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서 외운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외운다. 진리의 말씀은 새겨 놓으면 좋다.

진리의 말씀은 외워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백번, 천번 외우면 내것이 된다. 만번 외우면 뼈에 새겨질 것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담마빠다(Dhammapada), 법구경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책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외워야 한다.


2021-09-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