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오늘도 나 자신과 싸우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18. 08:05

오늘도 나 자신과 싸우며


눈을 뜨니 새벽 두시 반이다. 이 많은 시간을 어찌해야 할까? 다시 잠을 청할 수 있다. 그러나 잠은 잠이 와야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많지 않다. 배우자도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식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당연히 돈도 내 뜻대로 벌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뜻대로 하고자 한다.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잠은 달아났다. 멍하니 자리에 누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에스앤에스를 보거나 유튜브 시청으로 때울 수도 있다. 새벽시간을 그렇게 보낼순 없다. 책을 읽거나 행선이나 좌선을 할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내가 가장 적합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게송외우기이다. 법구경 찟따왁가 11개 게송 중에 7개를 외웠다. 오늘 8번째 게송을 외우기 전에 확인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1번부터 7번까지 차례로 암송해 보았다. 수없이 중얼거리며 외웠기 때문에 툭툭 튀어나왔다.

게송외우기는 머리와는 상관없는 것 같다. 지능지수가 낮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외다 보면 사진찍은 것처럼 선명하다. 마치 면전에서 책 읽는 것처럼 읽으면 된다. 확실히 내것이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젊었을 때 고시공부를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다. 지금처럼 공부했더라면 아마 충분히 붙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우고 또 외우기를 반복했을 때 못 이룰 것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헛되이 보낼순 없다. 무어라도 한가지 이루어 내야 한다. 현재 나에게는 게송외우기만한 것이 없다. 게송을 외우면 긴장하게 된다. 마치 마음의 종을 치는 것 같다. 한번 마음 내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게송외우기는 몹시 힘이 든다. 외운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 종치는 것 같다. 그런데 일단 종을 치면 그 다음부터는 자동으로 가는 것 같다. 마치 연속으로 종을 치는 것 같다. 이를 위딱까(사유)와 위짜라(숙고)라고 볼 수 있다.

게송외우기는 대단한 집중력을 요한다. 일으킨 생각(위딱까)이 있어야 하고 지속적 고찰(위짜라)도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용어가 선정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게송외우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게송외우기도 집중을 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게송외우기를 할 수 없다. 이는 좌선에서 단지 호흡만 지켜보는 것과는 다르다. 생각을 애써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모된다. 개송 외우다 보면 허기가 지는데 에너지가 과도하게 소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새벽 잠이 오지 않아서 게송을 외웠다. 이미 외운 7개의 게송을 차례로 암송했다.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꺼내 암송한 것이다.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마치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새로운 게송은 무척 힘이 든다. 생소한 말을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외울 8번째 게송도 그렇다.


Kumbh
ūpama kāyamima viditvā,
nagar
ūpama cittamida hapetvā;
Yodhetha m
āra paññāvudhena,
jita
ñca rakkhe anivesano siyā.

꿈부빠망 까야미망 위디뜨와
나가루빠망 찟따미당 타뻬뜨와
요데타 마랑 빤냐뷔데나
지딴짜 락케 아니웨사노 시야

이 몸을 옹기라고 알고
이 마음을 성채처럼 확립하여
지혜를 무기로 악마와 싸워
성취한 것을 수호하되 집착은 여의어야 하리.” (Dhp.40)


이것이 오늘 외울 게송이다. 처음 접하는 단어가 많다. 꿈부빠망, 위디뜨와, 나가루빠망, 타뻬뜨와, 요데타, 뷔데나, 지딴짜, 아니웨사노같은 말이다. 이럴때는 빠알리 사전을 찾아보아야 한다. 외울 때는 영어로 된 뜻을 떠올리며 함께 외운다.

게송을 보면 몸을 옹기로 비유했고 마음을 성채로 비유했다. 이런 비유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몸을 왜 옹기로 비유했을까? 이는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이를 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또한 그렇습니다.”(stn577)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릇은 깨지기 쉽다. 흙을 빚어서 만든 옹기 역시 깨지기 쉽다. 언제 깨질지 모른다. 우리 몸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할머니의 경'에서 대왕이여, 마치 옹기장이가 만든 옹기는 구워지지 않은 것이든 구워진 것이든 어떤 것일지라도 그 모두가 부서져야 하는 것이고 부서짐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부서짐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S3.22)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기대수명을 말하지만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사람 목숨은 언제 깨질지 모를 옹기와도 같은 것이다. 반면 마음은 다르다. 게송에서는 마음에 대해서 "나가루빠망(nagar
ūpama)"이라고 했는데 이를 "성채처럼"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을 성채처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을 말한다. 몸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지만 지혜로운 마음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철옹성 같은 것이다.

성채를 뜻하는 나가(naga)는 남성명사로서 'mountain'의 뜻이다. 흔들림 없는 마음을 바위산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현자에 대하여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Dhp.81)라고 했다.

게송에서는 악마(m
āra)가 등장한다. 악마는 싸워서 물리쳐야 하는 존재이다. 게송에서 말하는 악마는 어떤 성격일까?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한 것은 모두 악마에 해당된다. 당연히 번뇌도 악마가 된다. 오온도 악마로 본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보면 번뇌와의 싸움이었다. 부처님이 번뇌라는 악마와 싸워 승리한 게송이 있다. 자야망갈라가타 1번 게송을 보면 "악마가 수천의 무기들을 가지고 기리메칼라라고 불리는 무서운 코끼리 위에 타고, 군대를 동원하였을 때, 성자들의 제왕 자비로운 가르침으로 섭수하셨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군대는 마라의 군대(m
ārasenā)를 말한다. 흔히 마군 또는 마구니라고 한다.

마군에는 모두 7군이 있다. 욕망(k
āmā), 혐오(arati), 기갈(khuppipāsā), 갈애(tahā), 권태와 수면(thinamiddha), 공포(bhīrū), 의혹(vicikicchā), 위선과 고집(makkho thambho)의 군대를 말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자는 마치 전사(soldier)와도 같다. 전장에 나가 적을 마주 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전사를 뜻하는 요다(yodha)가 나온다. 무기는 어떤 것일까? 지혜의 무기라고 했다. 위빠사나 지혜로 번뇌를 물리친 것이다.

수행자는 악마와 싸워서 이겼다. 이는 마음의 번뇌를 소멸시켰음을 뜻한다. 수행자는 마침내 승리자가 되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승리를 뜻하는 빠알리어 지따(jita)를 사용했다. 번역에서는 성취라고 했다. 번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번뇌가 다한 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부처님도 아라한이다. 악마와 싸워서 이긴 것이다. 더 이상 번뇌도 없고 업형성력도 없다. 오온에 대한 집착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악마는 번뇌, 업형성력, 오온이 된다. 부처님은 자신과 싸워서 승리자가 된 것이다.

날이 밝았다. 지금 시각 6 12분이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오늘 토요일임에도 집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낼순 없다. 식사하는 것이 하루일과 중에 최대행사가 된다면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다. 애써 일을 해야 한다. 애써 힘든 일을 해야 한다. 이에 게송외우기만한 것이 없다.

게송외우기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행선과 좌선을 하여 번뇌와 싸움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근기가 약하여 이렇게 애써 힘들게 게송을 외우는 것으로 자신과 싸우고자 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게송을 외우면 그 결과를 즉각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외워서 내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충만감은 느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오늘도 나는 나 자신과 싸운다.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라고 생각하면서.


2021-09-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