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겟투(Get two) 산행, 백운산 정상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19. 19:52

겟투(Get two) 산행, 백운산 정상에서

 


지금 시각 오후 2시 26분 백운산 정상에 서 있다. 해발 567미터로 만만치 않은 높이의 산이다. 백운사에서 출발하여 꼬박 한시간 걸렸다. 오로지 오르막만 있는 길을 한번도 쉬지 않고 올라왔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 일요일에도 산행을 했다.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산행이야말로 한꺼번에 몰아쳐 하기에 딱 알맞은 운동이다. 일주일 동안 할 운동을 일요일 한번에 해치워 버리는 것이다.

 


지난주 수리산 산행과 마찬가지로 산행하면서 게송을 외웠다. 오늘 외운 게송은 법구경 41번 게송으로 찟따왁가 9번 게송에 해당된다. 오늘 오전 글쓰기에서 오늘 외우기로 약속한 게송이기도 하다.

백운산 등산로는 나무계단길이 반은 차지한 것 같다. 스틱 없으면 걷기 힘들다. 스틱으로 다리 힘을 분산시키면서 한걸음 한걸음 올라갔다. 동시에 41번 게송을 외웠다. 오늘 외울 빠알리게송은 다음과 같다.

"아찌랑 와따양 까요
빠타윙 아디세삿띠
춧도 아뻬따윈냐노
니랏탕와 까링가랑"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째,
머지 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 (Dhp.41)

오늘 외울 게송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그럼에도 빠타윙, 아뻬따, 춧도, 니랏탕은 외우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해야 쉽게 외울 수 있을까?

빠알리어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다. 영어와 어근이 같은 것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한번도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소한 것은 억지로 외울 수밖에 없다.

나의 몸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10년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 알 수 없다. 아니 1년 후가 될수도 있다. 아니 한시간 후가 될 수 있다. 왜 그럴까? 업생이기 때문에 그렇다.

언제 업의 과보를 받을 지 알 수 없다.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이 건강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특히 나이 든 자의 건강이 그렇다. 그래서일까 노인 건강은 건강이 아니라고 했다. 오늘 멀쩡한 사람이 내일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생명기능이 끊어짐에 따라 체열이 사라져서 딱딱하게 굳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이라고 했다. 마치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시체는 쓸모없는 나무토막 같은 것이다. 생명기능이 없을 때 시체는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춧도 아뻬따윈냐노"라고 했는데, 이는 "의식이 빠져나간 경멸적인 시체"를 뜻한다. 왜 경멸적인가? 이는 빠알리어 춧도(chuddho)가 'Mean, contemptible'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빠알리어 춧도는 경멸, 비열, 혐오를 뜻한다. 아마도 의성어에서 유래한 것 같다. 우리 말로 경멸할 때 "쯧쯧"하는데 춧도도 혀를 차는 듯한 의성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잘 외워진다.

게송에서는 생명기능이 떠난 몸에 대하여 혐오스런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쓸모없는 나무토막과 같은 몸을 말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죽으면 화장터 나무토막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빨리 묻어 버리거나 태우고자 할 것이다.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그날이 언제일지 알 수 없다. 그날이 왔을 때 "아찌랑 와따양 까요 빠타윙 아디세삿띠"라고 할 것이다. 이 말을 직역하면 "아, 이 몸은 머지않아 땅바닥에 뉘어지게 될 것이다."가 된다. 그런 다음 어떻게 될까? 몸이 죽었으니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될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몸은 죽지만 의식은 분리되어 결생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분리됨을 뜻하는 구절은 "아뻬따윈냐노(apetaviññāṇo)"이다. 여기서 아뻬따(apeta)는 아뻬티(apeti)의 과거분사형으로 'gone away'의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의식이 떠나버린 상태를 말한다. 의식이 죽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몸에서 생명기능이 정지 됐을 때 의식은 떠나버린다. 의식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죽는 순간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paṭisandhi)이 일어난다고 한다. 재생연결식은 이 생과 다음 생을 연결해 준다. 십이연기에서 식(윈냐나)이 이에 해당된다.

"아뻬따윈냐노"에서 위냐나는 이 생과 다음생을 연결하는 재생연결식으로 본다. 생명기능이 떠난 몸은 마치 화장터 나무토막처럼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의식은 다음 생의 결생조건이 된다. 그렇다고 의식(마음)이 윤회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조건발생 되는 것으로 영혼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일생윤회에 있어서 일생의 마음이 있다고 보는데 이를 바왕가찟따, 존재지속심이라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몸이 죽으면 의식도 죽어서 단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은 죽지만 일생동안 행위한 것에 대한 과보가 죽는 순간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으로 나타나서 이들 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결생식이 일어남을 말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아뻬따윈냐노" 즉, "의식이 떠난"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한시간 동안 법구경 41번 게송을 외우면서 올라갔다. 한편으로 다리운동도 되고, 또 한편으로 게송외우기도 되었다. 이를 일석이조라고 해야 할까? 요즘말로 겟투(Get two)가 된다. 한번에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 것이다.

산행하면서 오늘 외워야 할 게송을 다 외웠다. 총 32자를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시간이면 충분하다.

한번 다 외웠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더구나 앞서 외운 8개 게송도 점검해야 한다. 법구경 찟따왁가 11개 게송중에 9개를 외웠으므로 이제 2개 밖에 남지 않았다.

 


백운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많다. 안양권에도 백운산이 있다. 의왕시에 있는 백운산은 수원과도 경계를 함께 하고 있다.

백운산 전망대에서 서쪽을 보니 서해바다가 보인다. 정상에 서니 유쾌하기도 하고 상쾌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산행을 해서 유쾌하고, 게송을 외워서 상쾌하고, 세상을 내려다 보니 승리자가 된 것 같아서 통쾌하다.

2021-09-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