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16. 07:53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나는 안죽고 왜 살아 있을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의심해 본다.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나만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불가사의해 보이는 것이다.

세상은 왜 존재할까?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사실에 의문해 본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제도 있었고 그제도 있었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몹시 두려웠다. 죽음은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다. 죽음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만큼은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기 마련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과 같다. 태어남은 있는데 죽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개체수가 너무 많아서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다.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다면 논리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시작은 끝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나의 삶이 있다면 나의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삶만 있고 죽음은 없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의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 죽을 수 있다. 사고가 나서 오늘이 나의 최후의 날이 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나의 죽음은 보험회사에서 말하는 기대수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나의 삶이 단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면 소유가 왜 필요할까? 오늘 주식이 10%오른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천문학적 금액의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애착 가졌던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모든 것을 놓고 저세상으로 가야한다.

이세상이 있다면 저세상은 있을 수밖에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이 세상이 있으면 저세상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알수 없다. 알 수 없기에 두려운 것이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캄캄한 밤에 방에 불을 켜면 한꺼번에 다 보인다. 그러나 불이 없다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다. 죽음이 두려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고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죽음에 대해 안다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다지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아는 것이 없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죽음은 악마(마라)와 같은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죽음을 악마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죽음의 신을 악마 빠삐만으로 묘사했다.

악마는 두려운 것이다. 죽음만큼 두려운 존재이다. 그런데 악마는 알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악마가 나타나서 무섭게 하지만 그것이 악마라는 사실을 알면 악마는 사라진다. 어떻게 사라지는가? 초기경전에 따르면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곧 사라졌다."(S4.1)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악마는 정체가 탄로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여기 통증이 있다. 통증을 통증이라고 알면 아프지 않다. 위빠사나 수행하면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알면 사라진다'는 원리를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번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번뇌를 번뇌라고 알면 사라진다. 탐욕이 일어났을 때 욕망이라고 알면 사라진다. 화가 났을 때 성냄이라고 알면 사라진다. 악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이 악마, 악마하는데 악마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초기불교에서는 다섯 가지로 본다. (1)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
āra), (2)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를 말한다. 다섯 종류의 악마를 보면 놀랍게도 번뇌도 악마이고, 오온도 악마이고, 업도 악마인 것을 알 수 있다.

번뇌가 악마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부처님이 성도할 때 악마와 싸웠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마라의 군대(마군, 마구니)와 싸웠다. 어떤 군대인가? 이는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에서 부처님이 악마에게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린다.”(Stn.436)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번뇌가 있다는 것은 악마의 군대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과 같다. 마구니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구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청정한 삶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계율과 삼매와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닦아서 나는 위없는 청정한 삶에 이르렀으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S4.1)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마음의 번뇌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는 계, , 혜 삼학을 닦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다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어 분석한 것이다. 그결과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밝혀 낸 것이다. 마치 컴컴한 방에 전구를 켜는 것과 같다.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죽음은 항상 옆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죽음명상(
死隨念) 첫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Addhuva
jīvita
Dhuva
maraa
Avassa
mayā maritabba
Mara
a-pariyosāna me jīvita
J
īvita me aniyata
Mara
a me niyata

앗두앙 지위땅
두왕 마라낭
아왓상 마야 마리땁방
마라나 빠리요사낭 메 지위땅
지위땅 메 아니야땅
마라낭 메 니야땅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이것이 오늘 외워야 할 게송이다. 죽음명상 다섯 개의 게송중에 첫번째 게송이다. 출처는 알 수 없다. 아마 오래 전부터 죽음명상 대표게송으로 암송되어 왔을 것이다.

게송에서 삶은 불확실하다고 했다. 이는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한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죽을 수 있다. 사고사같은 것이다. 이는 부처님도 '우연의 피습'이라 하여 인정했다. 그렇다고 우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연기법적으로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사고사에 대하여 8지연기로 설명했다. 12지 연기에서 무명, , , 명색이 삐진 것이다. 육입에서부터 8지 연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흔히 접촉사고가 났다고 말한다. 자동차사고를 말한다. 접촉사고가 심하게 나면 사망할 것이다. 이처럼 사고는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우연의 피습 역시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상 사고사를 설명하는 우연의 피습에 대한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삼사화합촉에서부터 연기가 시작된다.

사고사에 대하여 업보의 성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숙명론으로 빠지기 쉽다. 무명부터 시작되는 12연기로 설명했을 때 업보의 성숙으로 본다. 모든 것을 12연기로 설명하면 숙명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연의 피습과 같은 사고사에 대하여 8지연기로 설명했다. 접촉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 것이다.

사고사는 우연의 피습으로 본다. 그런데 사고사는 12지 연기가 아니라 8지연기가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고사가 숙명론적이 아님을 말한다. 접촉에 의해 발생된 것임을 말한다. 이런 사고사 역시 연기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우연이 아님을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인과를 벗어나는 것은 없다. 어느 연기를 적용하는냐에 따라 달라진다. 업보의 성숙은 12지 연기가 적용되고, 사고사는 8지연기가 적용된다. 우연론적으로 보이는 것도 연기법칙에 따른다. 어느 것도 인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실의 삶은 접촉의 연속이다. 시각접촉, 청각접촉 등으로 인하여 8지연기가 회전된다. 그래서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오늘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죽음은 확실히 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은 불확실한 것이다. 매일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며 죽음명상 해야 한다.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S4.9)


2021-10-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