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즉각적 결과를 가져오는 게송외우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21. 07:25

즉각적 결과를 가져오는 게송외우기

 


눈을 떠보니 2시 50분이다. 또 일찍 깼다. 이럴 때 무엇을 해야 할까? 가만 있으면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이 흘러간다.

떠오른 생각과 흘러간 생각을 붙잡고자 한다. 새벽생각은 붙잡을만한 가치가 있다. 노트에라도 써 놓아야 할 것이다.

생각이 생각을 하여 꼬리를 문다. 이런생각 저런생각하다 보면 시간만 간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할까? 게송을 암송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깜마삿까 삿따 깜마다야다 깜마요니 깜마반두 깜마빠띠사야다 양 깜망 까론띠 깔리야낭 와 빠빠깡와 땃사 다야다 바완띠"

마치 주문 외우는 것 같다. 모두 49자로 이루어진 죽음명상 2번 게송이다. 우리말로는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라고 번역된다.

이 게송을 30분 동안 외웠다. 사실 이 게송은 무수히 접했다. 글을 쓸 때 무수히 써먹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짧은 게송을 인용할 때는 경전을 열어 보았다. 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외움으로 인하여 확실히 내것으로 만들었다.

죽음명상에 대한 게송은 모두 다섯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두 개 외웠다. 나머지도 시간 지나면 외워질 것이다. 외워 놓으면 확실히 내것이 된다. 언제 어느 때나 책을 보지 않고 머리 속에서 꺼내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외워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왜 이렇게 게송외우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것을 들라면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외운다. 외우는 그순간 만큼은 번뇌에서 해방된다.

게송 암송하는 또하나 목적은 강한 성취감이다. 게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송했을 때 그 기쁨은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내가 해냈다!"라며 스스로 기뻐하고 만족해 한다. 그리고 충만해진다. 이런 맛에 게송을 외운다.

게송은 생활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외운다. 마음에 드는 게송을 접하면 꼭 외워 두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런 게송 하나쯤 외워 두면 삶에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책을 백권 읽는 것이나 유튜브를 백번 보는 것보다 게송 하나 외우는 것만 못하다. 왜 그런가? 단지 이해 차원에 그치는 것과 외워서 내것으로 만드는 것과는 삶의 태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이는 수동적 삶과 능동적 삶과의 차이이고, 또한 소극적 삶과 적극적 삶과의 차이이기도 하다.

수동적이고 소극적 삶이 있다. 감각을 즐기는 삶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삶을 말한다. 동물적 삶이다. 반면 능동적이고 적극적 삶이 있다. 사유를 즐기는 삶이다. 사유는 언어능력이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정신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다르다. 책을 읽는 것은 수동적이고 소극적 범주에 해당된다. 물론 책을 읽는 것이 책을 읽지 않는 것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긴 하지만 글쓰기에 비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암송하는 것은 글쓰기 보다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글쓰기 보다 더 힘이 들기 때문이다. 큰 노고가 따른다. 마치 마음 밭을 가는 정신노동하는 것 같다.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지금으로 부터 12년전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좌선 중에 법사가 "이것은 가장 강력한 삶의 방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글에서 종종 써먹기도 한다. 좌선이 왜 가장 적극적인 삶의 방식일까?

먹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한다. 돈버는 것이 힘들다는 말과 같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저당잡혀 급료를 받는 행위는 모두 힘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좌선만큼 힘든 것이 없는 것 같다. 꼼짝하지 않고 한시간 앉아 있으라고 할 때 어떤 중노동 보다 강도가 세다. 더구나 집중수행 들어가면 하루 종일 명상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상에 힘든 일이 많지만 명상만큼 힘든 일은 없는 것 같다. 초심자는 단 오분 앉아 있기도 힘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말고 앉아 있으라고 할 때 이런 고문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선원에서는 어떠할까?

명상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고작 집중수행 몇번 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종일 밥만 먹고 명상만 하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의 삶은 어떠할까? 마하시전통의 경우 한시간 좌선에 한시간 행선을 기본으로 한다.

선원에서는 새벽 4시에 첫번째 좌선을 시작하는 것으로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저녁 8시에 마지막 좌선을 하는 것으로 하루일과가 끝난다. 새벽 4시 부터 저녁 9시까지 깨어 있는 시간은 모두 명상시간으로 보면 된다. 마하시전통의 시간표를 보면 짝수 시간은 좌선시간이고 홀수 시간은 행선시간이다. 시간마다 좌선과 행선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만일 시간표대로 한다면 녹초가 될 것이다. 대개 좌선은 4회 내지 5회 하는 것 같다.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한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노동은 힘든 것이다. 더구나 남의 밑에서 급료를 받으며 노동하면 더 힘들다. 육체노동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힘든 것이다. 그러나 행선하는 것과 좌선하는 것에 비하면 힘든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노동은 아마 명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행자는 일을 하지 않는다. 돈버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빌어먹고 산다. 그렇다고 아예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행자는 마음의 밭을 가는 일을 한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일도 하지 않는 게으른 자로 볼 수 있다. 바라문 농부도 그랬다.

바라문 농부가 탁발나온 부처님에게 물었다. 바라문 농부는 “그대는 밭을 가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밭을 가는 자라면 묻건대 대답하시오. 어떻게 우리는 그대가 경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Stn.76)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했다.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77)

“몸을 수호하고 ,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stn78)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stn79)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stn80)

 


밭은 농부만 가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도 밭을 간다. 마음밭을 가는 것이다. 땅의 밭을 가는 것이 더 힘들까 마음의 밭을 가는 것이 더 힘들까? 마음밭을 가는 것이 땅밭을 가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고 본다.

수행자로서 삶은 노동자로서 삶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 왜 그런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댓가를 바란다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최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각만을 즐기는 삶이다. 축생과 같은 삶이다.

"믿음이 씨앗이고"로 시작되는 네 개의 게송을 보면 외우고 싶어 진다. 강한 결심을 하면 외우게 될 것이다. 늘 마음에 새겨 두면 수행하는데 경책이 될 것 같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 소의 숫자만 세는 목동과 같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의 숫자를 세는 목동이 되기 보다는 소를 소유한 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밭을 갈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집중수행이나 들어가면 모를까 생업에 종사하며 현실의 삶을 사는 자에는 힘든 일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게송외우기를 하고 있다.

게송외우기를 하면 여러 이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우고, 강한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서 외우고,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외운다. 그러나 무엇보다 즉각적 효과를 보기 때문에 외운다.

돈은 쉽게 벌리지 않는다. 남의 호주머니에 있는 것을 가져 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게송 외우기는 마음만 먹으면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게송외우기가 돈버는 것보다 더 쉬운 것 같다.

세상에 내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배우자도 내뜻대로 되지 않고, 자식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당연히 돈도 내뜻대로 벌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것이라면 내마음대로 해야 할 것이다.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뜻대로 되는 것도 있다. 게송외우기 같은 것이다.

행선이나 좌선은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글쓰기와 게송 암송하는 것은 내뜻대로 된다.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실행하면 즉각적인 결과가 나온다. 이런 맛에 산다. 감각만을 즐기는 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사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2021-10-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