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명상 3번 게송을 외우며
아침 햇살이 아쉽다. 사무실 창문에 일부만 간신히 비치고 있다. 북동향이라 어쩔 수 없다. 늦가을에는 한두시간 비치고 만다. 이럴 때는 남향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일터가 마치 절간 같다. 절간이라는 표현이 불교를 비하하는 표현이 아닌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많이 써서 그렇게 써 보았다. 그럼 암자 같다고 해야 할까? 들리는 것은 찻소리 뿐이다. 가끔 기차소리도 들린다. 지하철 1호선의 연장선인 수도권전철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지금 시각은 오전 8시 42분이다. 대부분 회사에서는 오전 9시부터 일과가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에 일과시작 직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인사업자에게는 밤낮이 따로 없고, 주말이 따로 없다.
작은 사무실이지만 임대료와 관리비가 나가기 때문에 가능하면 풀가동해야 한다. 집에서 일찍 떠나 일터로 부리나케 달려오는 이유에 해당된다. 직장은 없지만 직장처럼 여기고 다니는 것이다. 이런 세월이 벌써 14년 되었다.
아지트에 혼자 앉아 있다 보니 고요하다. 유튜브를 보면 고요가 깨진다. 밖에 차 지나가는 소리는 방해되지 않는다. 이런 때 차를 마시면서 못다 외운 게송을 외운다. 방금 죽음명상 3번 게송을 외웠다.
“이다 난다띠 뻿짜 난다띠. 까따뿐뇨 우바야타 난다띠. 뿐냥 메 까딴띠 난다띠. 비이요 난다띠 수가띵 가또.”
이 게송은 법구경에 야마까왁가(쌍의 품)에 실려 있는 18번 게송이다. 이 빠알리게송은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Dhp.18)라고 번역된다.
법구경 야마까왁가는 모두 20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모두 빠알리어로 외운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 죽음명상 3번 게송에 실려 있는 법구경 18번 게송을 보자 그때 외운 것을 모두 잊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단어가 조각조각 생각날 뿐이다.
오래 전에 외웠던 게송을 지금 되살릴 수 없다. 다시 외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때 당시 마르고 닳도록 외웠다고 하더라도 세월 지나면 다 잊어버린다. 그렇다고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 저편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블로그 기록을 찾아보니 법구경 야마까왁가는 2014년에 외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년전의 일이다. 그때 당시 외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밤낮으로 암송했다. 그렇게 몇 달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다시 외워야 했다.
이전에 외워 놓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다시 외우기 할 때 크게 힘들지 않았다. 기억 저편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것을 꺼내 오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입으로 수십번 중얼거리니 다 외워졌다.
법구경 18번 게송이 왜 죽음명상 3번 게송으로 나오는 것일까? 이는 첫구절에서 “이다 난다띠 뻿짜 난다띠(Idha nandati pecca nandati)”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니”라고 번역된다. 여기서 이다(Idha)는 ‘in this world’의 뜻으로 ‘이 세상’으로 번역되는데 존재 (existence)를 뜻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법구경에서는 뻿짜(pecca)라 하여 ‘after death’를 뜻하는 ‘저 세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대구를 이룬다.
여기가 있으면 저기가 있고,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현재의 삶을 살고 있지만 이 삶이 언제나 영원히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다. 주변에 죽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젠가 나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이 없고 눈조차 뜰 힘이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세상이 있기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저 세상에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동안 모아 놓은 돈과 재산도 가져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져 갈까? 게송에 답이 있다.
게송을 보면 뿐냐(puññ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선행으로 번역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공덕이라고 번역된다. 어떤 공덕인가? 세속적인 삶에서 있어서 공덕행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을 말한다.
뿐냐와 유사한 말이 있다. 그것은 꾸살라(kusala)이다. 꾸살라는 니까야에서 착하고 건전한 행위로 번역된다. 경전에서는 구체적으로 십선행에 대한 것이다. 꾸살라의 반대말은 아꾸살라(akusala)이다. 아꾸살라는 경전에서 십악행으로 설명되어 있다.
뿐냐와 꾸살라는 비슷한 것 같지만 쓰임새가 다르다. 뿐냐는 윤회하는 삶속에서 공덕 짓는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꾸살라는 출세간적 삶에서 적용되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 뿐냐라고 한 것은 윤회하는 삶, 즉 세속에서 공덕행에 대한 것이다.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은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대개 삼심삽천(tāvatiṃsa)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욕계 두 번째 천상이다. 수명은 3억6천만년이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좋은 곳이라는 뜻을 지닌 ‘수가따’라는 말이 나온다. 이 천상은 어떤 천상일까? 주석에서는 도솔천(tusita)이라고 했다.
욕계육천 중에서 도솔천이 가장 수승한 천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명으로 따진다면 화락천과 타화자재천이 있지만 초기경전에서는 도솔천을 더 수승한 천상으로 보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이는 맛지마니까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M123)에 따르면, 부처님이 보살로서 삶을 살다가 입태 했을 때 상황을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보살이 입태 했을 때 어떠했을까? 경에 따르면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과거 전생에 있었던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일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세존이시여, 저는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보살이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 무리에서 죽어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왔다.’라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듣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배웠습니다.”(M123.10)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경에서 언급된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 무리’는 어느 천상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 주석에 따르면 ‘뚜시따 까양(tusita kāyaṃ)’이다. 이는 ‘도솔천의 무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Vessantara라는 전생의 인간 이후에 그리고 Siddhattha Gotama로서 인간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도솔천에 태어난 것이다.”(2202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과거 출현했던 부처님들이 있다. 고따마부처님만 출현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위빳씨 붓다를 비롯한 과거칠불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한결 같이 행적은 같다는 것이다. 입태하기 전에 머문 곳도 도솔천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D14)을 보면 알 수 있다.
비유의 큰 경에 따르면 보살이 입태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있다. 과거칠불의 선두인 위빳씨 붓다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보살이었을 때 비빳씬은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에서 사라져서 새김을 확립하고 모태에 들 때,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신들의 위신력을 압도하며 나타난다.”(D14.20)라고 했다. 여기서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는 도솔천인 것이다.
과거 모든 부처님들은 보살로서 삶을 살다가 최후로 도솔천에서 인간의 몸으로 입태 되었다. 그래서 과거불의 모든 행적은 동일하다. 이를 경에서는 담마따(dhammatā)라고 하는데 ‘원리’ 또는 ‘정해진 원리’, 법성(法性)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다음 부처님도 역시 도솔천에 있을 것이다.
부처가 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정법이 오래 가지 않음을 말한다.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을 펼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림을 말한다. 그러나 정법은 그대로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라고 했다.
과거 출현 했었던 부처님들은 보살로 살 때 입태하기 바로 전생에는 한결 같이 도솔천에 있었다. 앞으로 미래 오실 멧떼이야(彌勒) 부처님도 도솔천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욕계육욕천 중에서 가장 수승한 천상은 도솔천이라고 할 수 있다.
공덕을 쌓으면 도설천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윤회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대개 삼심삼천에 태어나지만 게송을 보면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도솔천은 욕계 네 번째 천상으로서 수명은 5억7천6백만년이다.
저 세상은 있을까? 죽음명상 게송을 외우면서 생각해 보았다.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행위를 모두 가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행위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저 세상을 말했다. 이는 초기경전을 보면 수도 없이 나온다. 어떻게 말했을까? 이를 업보성숙으로 설명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름을 말한다. 그렇다고 숙명론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 접촉하는 것에서부터 연기가 회전된다고도 설했기 때문이다.
업보에 따른 윤회는 과거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머리털로 만든 옷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과거출현한 모든 부처님은 업보윤회를 말씀하신 것이다.
죽음명상 두번째 게송은 업자성정견에 대한 것이다. 이는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아는 것이다. 죽음명상 세번째 게송은 저 세상에 대한 것이다. 공덕을 지으면 도솔천에 태어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저 세상은 있는 것이고 윤회는 있는 것이다.
불교인 중에는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그 중에는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도 있다. 법륜스님은 왜 윤회를 부정할까? 아마 전국구 스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전종교 스님이기 때문에 그런지 모른다. 그래서 현실의 삶에 대해서만 말한다. 저 세상이나 윤회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 같다. 혹시 부처님의 말씀을 방편으로만 보는 것은 아닐까?
죽음명상은 저 세상에 대한 명상과 같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마지막 명상은 열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번뇌가 남아 있는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항상 저 세상을 생각해야 한다. 윤회하는 삶을 속에서 갈 수 있는 천상으로 최상은 도솔천이지만 차선은 삼십삼천이다.
죽음명상 3번 게송이자 법구경 18번 게송은 선업공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Dhp.18)라고 했다.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2021-10-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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