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식한테 떳떳하기 위해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25. 07:46

자식한테 떳떳하기 위해서

 


선거철이다. 대선이 아직 반년 이상 남았음에도 후끈 달아올랐다. 평소 정치에 대해서 불가근불가원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으나 가까이하고 있다. 그 결과 매일 후보와 관련된 글을 쏟아 내고 있다.



불교블로거가 정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허물이 된다. 어떤식으로든지 한쪽편을 들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에서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지 관리를 하려 한다면 정치 이야기를 써서는 안된다.



이미지 관리할 것이 없다.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금기시하는 정치, 종교, 지역, 여자 이야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드러내서는 안된다.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글을 쓸 때는 무엇이든지 가르침을 가져다가 붙인다. 정치이야기도 그렇다. "이럴땐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라며 초기경전을 열어 보는 것이다. 담마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전을 보면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소들이 강을 건너는데,
우두머리 황소가 잘못 가면,
지도자가 잘못된 길을 가기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따르네.”(A4.70)


이 게송은 정의롭지 못한 지도자를 뽑았을 때 초래되는 재앙에 대한 것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저열한 자는 저열한 자들끼리 관계를 맺고 서로 어울린다. 정의롭지 못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그 밑에 사람들 역시 정의롭지 못한 자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 결과 행성의 운행에 차질 날 것이라고 했다. 요즘말로 하면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상승으로 대재앙이 초래되는 것과 같다.



인터넷과 에스앤에스에 정치와 관련되 이야기를 쓰면 허물이 된다. 블로그 댓글을 보면 "참 딱하십니다."로 시작되는 글을 종종 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른다. 아마 실망해서일 것이다. 불교관련 글만 쓰다가 정치이야기 쓴 것이 영향을 준 것이다. 반대편에 있다면 블로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페이스북에서도 볼 수 있다.



정치이야기를 쓰면 손해가 난다. 이미지 관리에도 좋지 않다. 지위와 명예를 생각하는 자들은 정치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아예 인터넷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 삶은 출가자의 삶이다. 어떤 삶인가?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Thag.501)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진실해진다. 내일 죽는다고 했을 때 경거망동할 수 있을까? 오늘 밤까지 만 산다고 생각했을 때 글쓰기는 멈추어야 할 것이다.



개구즉착(開口卽錯),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는 말이다. 그가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어긋날 수 있음을 말한다.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진리는 개념화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서 진리를 설명하고자 했다. 비유를 들어 쉽게 설명하면 알아듣는 이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침묵하지 않았다. 언어로서 진리를 설했다.



부처님이 침묵했다면 담마가 오늘날까지 전승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마음과 뜻으로만 전달되었다면 소수가 진리를 독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진리를 언어로써 설함으로 인하여 누구나 진리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가 허물이긴 하지만 진실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언어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반대 견해를 가진 자도 있기 때문에 비난은 감수해야 한다. 불교블로거가 정치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럴 것이다.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재가수행자라고 말하면서 매일 장광설을 쏟아 놓는다. 그것도 하루에 두 개도 좋고 세 개도 좋다. 이 많은 장광설을 모아 놓으니 산이 되었다. 더구나 책으로 만드는 작업도 하고 있다.



그 동안 뱉어낸 이야기를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블로그에 모두 저장해 두었다. 블로그는 살아 있는 책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누구나 키워드 검색만 하면 10년 전에 쓴 글도 소환할 수 있다.



말한 것에 책임져야 한다. 쓴 것에 대해서 책임진다. 그것도 무한책임 지고자 한다. 그래서 글을 쓰면 반드시 서명한다. 그것도 날자와 함께 이름을 기입한다. 하나라도 오류가 나오면 구업 짓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매우 신중해진다. "이럴 땐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라며 경전 문구를 인용하기도 한다.



인터넷에 글을 쓰는 행위는 비난받기 쉽다. 설령 담마에 근거해서 썼다고 할지라도 자신과 견해가 맞지 않으면 배척된다. 하물며 종치, 종교, 지역, 여자 이야기는 어떠할까?



오늘도 장문의 글을 쓴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 치는 것이다. 엄지 가는 대로 가는 것이다. 수행자의 허물이기 쉽다. 재가수행자로 보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허물은 크다고 했다. 그래서 "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 (S9.14)라고 했다. 수행자의 허물은 아주 작아도 구름처럼 크게 보인다는 것이다.



매일 담마에 근거한 블로거의 글도 허물이 될 것이다. 허물없이 살려면 글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멈추어지지 않는다. 마치 알콜 중독자처럼 자꾸 자판에 손이 간다.



언젠가 멈출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 싸질러 놓듯 써 놓은 글을 본다면 부끄럽고 창피할 것이다. 그래서 살피고 또 살핀다. 단어 하나 선택에도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글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볼 수 있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볼 수도 있다.



자식 앞에서 떳떳해야 한다. 지식 앞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는 글을 써야 한다. 항상 자식이 읽어 볼 수 있다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백 종류의 책을 만들어 물려줄 사람은 자식밖에 없기 때문이다.



엄지 하자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오늘도 장문의 글이 되었다. 한번 써 놓은 글은 버리지 않는다. 블로그와 에스엔에스에 저장된다. 나중에 책이 되어서 나올 것이다. 세상에 단 두 권 밖에 되지 않는 개인 보관용 책이다.



글은 아무리 잘 써도 허물이 된다. 언젠가는 멈출 날이 있을 것이다. 구업만 잔뜩 짓고 퇴장하는 것이다. 진짜 수행자로 살고자 한다면 멈추어야 할 것이다.


"
날아 오를 때는 나는 낮추리라.
떨어질 때는 나는 높이리라.
잘못 살고 있을 때는 나는 바르게 살리라.
즐기고 있을 때 나는 즐기지 않으리라."(Thig.76)


2021-09-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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