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천장사 가을밤 달빛정진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24. 15:02

 

천장사 가을밤 달빛정진


동쪽하늘이 열렸다.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불그스레한 기운이 있다. 조금 있으면 어제 사라진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산사의 새벽이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떠오른다. 어제의 태양은 어제 떠올랐다. 어제 저녁에 뜬 달은 지금도 떠 있다. 새벽예불이 끝난 산사 서쪽하늘에서 이제 지려 한다. 또 하루가 시작된다.

 


어제 오후 달빛이라는 말에 찾아왔다. 고월정에서 달빛다회를 상상했다. 그러나 달빛정진이 되었다. 이번 행사 본래 명칭은 천장사 가을밤 달빛정진이다. 가을밤과 달빛이라는 말이 낭만적이다.

그곳에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있다. 천장사 일요법회 식구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상하다. 네 명 빼고 새로운 사람들이다. 벨라거사님, 당진거사님, 길상화님, 락화보살님을 보니 친지를 보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같을까?

흔히 절에 갈 때 부처님 보고 간다고 말한다. 절에 갈 때 법우들 보고 간다. 얼굴 익숙한 사람을 보고서 가는 것이다. 천장사에 가면 옛날 일요법회 멤버들이 있다. 언제라도 가면 반가이 맞아 준다. 마치 나그네가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가을밤 달빛정진에 새로운 얼굴들이 많다. 함께 정진하고 함께 밥을 먹으면 얼굴이 익혀진다. 다음에 만나면 구면이 될 것이다. 이것도 인연이다. 이미우이 명상음악씨디를 나누어 주었다.

 


시월 하순 가을밤은 차갑다. 냉추(
冷秋)의 밤에 사람들은 고월정(古月精)에 앉았다. 천장사에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서쪽 들판과 서쪽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달이 뜨면 달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경허스님도 고월정에서 보름달을 보았다고 한다.

 

 

달은 아직 뜨지 앉았다. 달은 밤 9시 넘어야 뜬다. 달이 뜨기 전에 중현스님은 달빛정진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천장사는 경허도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오늘 달빛정진 주제를 무비공(無鼻孔)’으로 했다고 한다. 경허스님의 깨달음의 기연(機緣)과 관련된 것이다. 이는 소의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라는 화두를 말한다.

 

달이 뜨려면 더 있어야 한다. 자리를 옮겼다. 염궁선원에서 정진했다. 마침 해제철이라 선방은 열려 있다. 사람들은 무비공화두와 함께 부시하물(復是阿物)”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라는 뜻이다. 경상도 말로는 이뭐꼬이고 전라도 말로는 이것이 뭐시다냐?”가 된다.

 


불과 삼십분 정진했다. 다시 고월정에 가서 냉추의 달빛을 보았다. 보름에서 삼일지나서인지 이지러져 있다. 그러나 원형은 유지하고 있다. 음악을 들었다. 중현스님이 유튜브로 틀어준 고금(
古琴)연주음악이다. 중국고금은 돈성스님이 연주한 것이다. 돈황 명사산에서 연주한 것이라고 한다. 거문고 소리와 유사하지만 중극고금만의 독특한 소리가 난다. 달빛이 교교한 고월정 정자에서 고금소리를 들으니 운치 있는 것 같다.

 


다시 염궁선원에 왔다. 두번째 정진을 했다. 삼십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다. 사람들은 무비공화두를 타파했을까?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라며 무비공 화두를 들어 보지만 다급하지 않다. 앉으나 서나 의심으로 꽉 차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절실하지 않은 것 같다.

 

경허스님의 오도송은 유명하다. 한자어로 된 것을 보면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연암산하로(六月 巖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라고 되어 있다. 우리말로는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나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 구나라고 번역된다. 연암산이 나오는 것을 보니 천장사와 매우 깊은 인연이 있는 오도송임을 알 수 있다.

 

소 콧구멍이 없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 분명한 사실은 경허스님은 아동의 이 말을 듣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기연은 많다. 중현스님에 따르면 어떤 이는 종소리 듣고 깨달았고, 낙수물 소리를 듣고 깨달았고, 복숭아 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기연은 테라가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때 나는 삭도를 들고

침상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목의 정맥을 자르기 위해

삭도를 가져다 그 곳에 대었다. (Thag.408)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Thag.409)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410)

 

 

쌉빠다싸 장로가 읊은 게송이다. 장로는 출가한지 25년이 되었지만 깨닫지 못했다. 한계를 느껴서 삭도로 자결하고자 했다. 삭도를 목에 대는 순간 깨달았다. 이것도 깨달음의 기연일 것이다.

 

테라가타는 부처님 직제자들의 해탈과 열반을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바구 장로는 문지방에서 넘어지는 순간 깨달았다. 아난다 존자는 침상에 몸을 기울이는 순간 깨달았다. 모두 깨달음의 기연에 대한 것이다.

 

경허스님은 아동의 무비공 이야기를 듣고 깨달았다. 그렇다고 우연히 깨달은 것은 아니다. 깨달음의 기연이 되어서 깨달은 것이다. 이는 깨달음의 조건이 성숙되었기 때문이다.

 

경허스님은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화두를 들고 있었다. 이 문구는 아직 당나귀 일도 채 끝내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다가왔다.”라는 뜻이다. 중현스님에 따르면 이 말은 십이지간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말의 해는 있어도 당나귀의 해는 없는데 왜 이런 말이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한 것이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이 의문으로 가득할 때 마침 동자승이 소 콧구멍이 없다(無鼻孔)’라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무비공화두를 타파할 수 있을까? 중현스님은 숙제를 주었다. 그러면서 경허스님의 열반송을 말했다. 마치 힌트를 말하는 것 같다. 경허스님의 열반송은 마음달이 홀로 둥글어 그 광명이 삼라만상을 삼키었네. 광명과 경계를 모두 잊으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이다.

 

경허스님의 열반송은 한문 심월고원 광탄만상 광경구망 부시하물(心月孤圓 萬象 光境俱忘 復是何物)”을 번역한 것이다. 이 한문 게송은 마치 깨달은 것을 한번 더 깨닫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중현스님은 염라대왕을 넘어서 블랙홀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열번송에서는 부시하물(復是何物)이라 하여 이 무슨 물건인고?”라며 묻는다. 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경상도 말로는 이뭐꼬라고 하고, 전라도 말로는 이거시머시다냐라고 한다. 지역마다 달리 말하지만 공통적으로 이것은 무엇인가?”라며 의심하는 것이다.

 

중현스님은 무비공 화두를 주면서 부시하물하라고 했다. 경허스님의 오도송과 열반송을 번갈아 설명하면서 의문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심자에게는 무리인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머리로만 알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화두는 의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치적으로 따져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비논리적인 것을 화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따져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안될 것이다. 가면 갈수록 의문이 쌓이고 쌓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아주 작은 것이 인연이 되어서 화두가 타파된다고 한다. 이를 깨달음의 기연이라고 하는데 무비공도 그런 것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머리로 알려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언어적 개념을 타파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는 언어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교교한 달빛을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짧은 달빛정진이 끝났다. 화두는 각자 간직해야 한다. 저녁 10시 넘어서 다회가 시작되었다. 준비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달빛다회라고 볼 수 있다. 달은 밖에 떠 있고 안에서는 대화가 오간다. 처음 본 사람들과도 익숙해졌다. 다음에 오면 구면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무비공, 알수 없는 화두이다. “이뭐꼬?” 또는 이거시머시다냐?”라며 의심해 보지만 알 수 없다. 언어로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독을 독으로 제독하듯이, 작은 의심으로 큰의심을 타파할 수 있을까? 무비공화두를 뚫을 수 없을 것 같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을 것이다. 원한은 원한을 내려 놓았을 때 원한을 여의는 것이라고 했다. 언어로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언어를 내려 놓아야 큰의문을 타파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큰 숙제를 받았다.


2021-10-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