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비대면에서 대면모임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1. 9. 09:32

비대면에서 대면모임으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속속 일상이 회복되고 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든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줌모임이다.

어제 사람들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비대면에서 대면모임으로 전환되는 것에 대한 안내 메세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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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부로 방역지침이 완화되었다. 집합금지업종에 대한 인원제한도 풀렸다. 이에 금요니까야공부모임도 대면으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다.

단체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에게 개별문자를 보냈다. 또 단톡방에 다음과 같이 장문의 글을 올렸다.


"
금요모임 관련 하여 알려 드립니다. 여러 분에게 의견 물어보았습니다. 대면모임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줌과 병행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녹음피일을 공유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번주 금요일부터 대면모임 하고자 합니다.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줌모임에 익숙한 사람들은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대면모임이 이동시간 등 힘든 요인이 있지만 단지 화면으로만 접하는 것 이상 의미기 있다는 것에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화면에서 느낄 수 없는 자애, 연민, 기쁨, 평정입니다. 사무량심입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전재성 박사님 설명을 듣는 것이 단순하게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지식전달이 목적이라면 학원강사와 다를바 없을 겁니다. 비대면 수업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우리 금요모임은 수행적 측면도 강합니다. 숨소리, 표정, 눈빛 등을 통해서 소통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금요모임은 니까야 공부모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행모임이기도 하다."라고.

수행모임은 또한 도반모임이기도 합니다. 화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우정과 유대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도반은 인생의 반이 아니라 인생의 전부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화면모임에서도 도반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도반은 청정한 삶의 전부라고 했습니다. 화면모임이 편리한 점은 있지만 우리모임은 단순히 지식만 듣는 것만이 아니라, 수행모임도 되고 동시에 도반모임도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시대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때에 금요모임을 다시 대면모임으로 되돌려 놓고자 했을 때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미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참여자가 적어서 실패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가 봐야 알겠습니다.

이번주 금요일에는 대면모임의 날입니다. 화면이 아니라 실제로 오감으로 만나는 날입니다. 사무량심으로 만나는 날입니다.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니라, 수행모임이고, 도반모임이고, 우정의 모임입니다.

참여에 모임의 미래가 달렸습니다. 부득이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는 음성녹음하여 공유할 것입니다. 이번주 금요일(12) 오후 7시 삼송테크노밸리 B 348호입니다."


줌은 어쩔수없는 선택이었다. 5인 이상 집합금지에 따라 모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수도 없었다. 이런 때 어느 모임이나 찾는 것 중의 하나가 줌이다.

사람들은 편리에 익숙해지면 머물고자 한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들 심리이다. 누워 있으면 어떨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난다고 말한다. 줌모임도 그렇다.

줌모임은 이동 없이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안방이나 사무실에서도 가능하다. 이런 점이 장점이자 최대 매력이다.

대면모임하면 이동해야 한다. 그것도 먼거리일 수 있다. 금요니까야공부모임도 그렇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가 고양시 삼송역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 북서쪽 끝자락 너머에 있어서기 분당이나 안양, 부천 등 수도권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못잡아도 두 시간 생각해야 한다.

비대면 줌모임은 화면모임이다. 화면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코로나와 같은 전쟁과도 같은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다. 학교는 문을 닫고 비대면 수업했다. 위드코로나가 되자 일제히 등교하여 대면수업 받고 있다.

코로나가 끝났음에도 학교가 비대면을 유지하면 어떻게 될까? 학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학교에 가는 것은 홀로 공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관계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학생과 학생과의 관계이다. 이런 관계속에서 정이 생겨난다. 우정이다.

 


우정이라 하여 친구간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승과도 우정의 관계가 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S3.18)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은 모두 도반임을 말한다. 그런 도반은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

진리의 길에 함께 가는 자가 있으면 힘이 될 것이다. 아난다는 부처님에게 도반은 삶의 절반과도 같다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아니다, 아니다."라며 아난다를 나무라며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S3.18)라고 말했다.

도반은 같은 또래 친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은 모두 도반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도반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도 같다고 했다. 해탈과 열반의 길에 함께 가는 사람은 모두 도반이다. 이렇게 본다면 스승도 당연히 도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S3.18)라고 말한 것이다.

 


금요니까야모임은 단순히 지식이나 전달하는 모임이 아니다. 돈을 받고 수업하는 학원이 아니다. 수강료를 냈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교육받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돈을 받은 선생은 학생이 하자는 대로 할 것이고 학생을 찾아 다닐 것이다. 선생은 비대면 온라인 수업도 불사할 것이다. 그러나 돈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발적 모임에서는 선생이 학생을 찾아가는 개념이 아니다. 반대로 학생이 스승을 찾아 가야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선생은 학생을 찾아 가는 사람이고, 스승은 학생이 찾아오는 사람이다."라고.

도의 길에서는 선생보다 스승이 되어야 한다. 학생이 가서 배움을 청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니까야모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다. 찾아가서 배우고 토론하고 우정을 쌓는 것이다. 듣는 자나 설명하는 자나 토론하는 자나 모두 진리의 길을 가는 도반이다.

화면만 바라보면 우정이 성립될 수 없다. 대면 접촉해야 우정이 생겨 난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한길을 가는 도반으로서 우정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자애의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금요모임에서는 마무리로 자애경을 독송하는가 보다.

화면으로는 한계가 있다. 마치 스마트폰으로 친구 사귀는 것과 같다. 페이스북에 친구가 수천명 되도 화면속의 사람일 뿐이다. 화면속에서 우정이 생겨날 수 없다. 공감은 하겠지만 공감을 우정으로 볼 수 없다. 대면해 보아야 정을 느낀다. 그것도 여러차례 만나야 한다.

자주 만나면 정이 든다. 진리의 길에 정은 우정이다. 불교는 자애를 강조하는 우정의 종교이기 때문에 우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화면속에서 우정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면모임을 해야 우정이 생긴다.

 


비대면에서 대면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비대면에 익숙한 사람들이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면 대면모임은 이루어질 수 없다. 모임도 생멸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제행무상이다. 금요니까얌모임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내년이 될 수도 있고 내후년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교재 '생활속의 명상생활'진도가 다 나갔을 때 모임도 끝난다는 것이다. 현재 법수가 다섯이므로 몇 년 더 갈 것 같다. 그러나 모이지 않으면 올해가 가기전에 끝날 수 있다.

이번주는 비대면에서 대면으로 전환하는 주이다. 과연 몇 명이나 나올까? 사람이 모이지 않아 모임이 이루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법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질되어 사라지고 만다. 모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임은 2017 2월 이후 5년 동안 유지되어 왔다. 과연 금요니까야 독송모임은 계속될까?


2021-11-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