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법담 넘쳐나는 서고(書庫)의 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1. 27. 10:45

법담 넘쳐나는 서고(書庫)의 밤

 

 

심해에 생명체가 있다. 한결같이 괴이하게 생겼다. 머리가 지나치게 큰 것이 많다. 몸집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비대해서 괴물을 보는 것 같다. 어떤 것은 입이 지나치게 커서 아귀라고 한다. 몸은 흐물흐물하고 투명한 것도 있다. 어떤 것은 발광하는 것도 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심해에는 알 수 없는 기괴하고 기이한 생명체로 가득하다.

 

심해생명체의 특징은 움직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의 압력으로 인하여 움직이지 않고 가만 있다가 커다란 입으로 먹이를 흡입한다. 이들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거의 움직임 없이 살아 간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퇴보를 말한다.

 

화식조가 있다. 뉴기니와 호주에 서식하는 땅에서 사는 새를 말한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한다. 왜 날지 못하게 되었을까? 열매 등 주어먹을 먹이가 풍부한 이유가 있다. 천적이 없는 이유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날개가 있어도 날지도 못하는 새가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립되어 사는 사람이 있다. TV에서는 종종 기인을 보여준다. 대부분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위를 하거나 비상식인 행위를 하면 금방 드러나 보인다. 이런 사람들을 기인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TV 기인열전에 나오는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세상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이유가 크다고 본다.

 

스님중에도 기인이 있다. 이를 괴각승이라고 한다. 행위가 바르지 못한 모난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깨달은 도인에게도 괴각승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기도 한다. 대체로 걸림 없는 삶을 살아 가는 스님을 말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고립되어 살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상사람들과 떨어져 나홀로 살 때 기인이 될 수 있다. 마치 심해의 생명체처럼 아무 움직임 없이 살아 갈 때 기이한 모습이 될 수 있다. 마치 화식조처럼 안주했을 때 날개가 있어도 날지도 못하는 새와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종종 접한다.

 

며칠전 종로에 갔었다. 거리에 어떤 노인은 홀로 앉아 있었다. 입으로는 무언가 계속 말을 뇌까리고 있다. 얼굴 모습을 보니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눈의 초점은 멍하다. 생긴모습도 기이한 모습으로 변형된 것 같다. 아마도 오랫동안홀로 산 것 같다.

 

사이버공간에서도 홀로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열심히 글을 올린다.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쓰는 언어는 일반사람들이 쓰는 용어가 아니다. 타인들과 교류없이 나홀로 인터넷 공간에서 외치다 보니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동떨어진 것이 되었다. 마치 심해의 괴생명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될 때가 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하여 줌모임이 일반화되었다. 누구나 편리하게 자신의 방에서 접속만 하면 세상사람들과 연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세상사람들과 소통한다고 하지만 화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나홀로 사는 삶에 지나지 않는다.

 

나홀로 사는 삶은 대단히 위험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홀로 사는 삶에서 탈출해야 한다. 노인이 나홀로 산다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때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밖으로 나가라고 말한다. 거리로 나가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다.

 

11월 들어서 방역지침이 완화되었다. 이에 따라 줌모임이 속속 대면모임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화면모임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대면모임에서는 화면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11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서고에서 열렸다. 올해 들어서 두 번째 대면 모임이다. 대면모임은 화면모임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있다. 그는 홀로 공부하여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다. 그는 많이 아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그가 홀로 살아 가는 한 기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가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

 

홀로 살다 보면 자극이 없다. 거의 움직임 없이 가만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을 때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주변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극을 받는 생명체와는 다른 것이다.

 

자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생존에 위험에 대하여 방어하는 대처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접촉에서 오는 경험에 의하여 지혜가 생겨나게 된다. 이는 책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서 나오는 삶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가르침에도 생존의 지혜가 있고 삶의 지혜가 있다.

 

홀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은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자극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인 상태로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우물 밖에는 넓고 큰 세상이 있다.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벗어난 세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런 것이다. 가르침을 접하면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작고 초라하고 별볼일 없는 것인지 알게 된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도 크다. 나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도 많다. 많이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널리 배워 가르침을 새길 줄 아는, 고매하고 현명한 친구와 사귀고 유익한 길을 분명히 알아 의혹을 제거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58)라고 했다. 혼자 길을 가되 나보다 낫거나 동등한 도반들과 함께 가라는 말이다.

 

결국 홀로 가는 길이다. 홀로 가지만 고립되어서 홀로 가는 것은 아니다. 현명한 친구가 있으면 사귀어야 한다. 그래서 축복경에서는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은 축복입니다.”(Stn.265)라고 했다. 수행자들이 서로 모여서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은 최상의 축복중의 하나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라고 했다. 가르침(Dhamma)에 대하여 밤샘 토론해도 좋다고 했다. 홀로 고립되어 독각승처럼, 괴각승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니까야에서는 홀로 사는 즐거움에 대한 찬탄의 게송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세상과 단절되어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탁발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면모임을 하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줌모임에서는 화면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되지만 대면 모임을 하게되면 숨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오감으로 접촉하게 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정이다. 어떤 정인가? 그것은 우정(友情)이다!

 

우정이라고 하여 반드시 친구나 동료들간의 우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스승과도 우정의 관계가 될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좋은 친구의 경(Kalyāamittasutta)’(S3.1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이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왜냐하면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 태어나야 하는 존재가 태어남에서 벗어나고 늙어야 하는 존재가 늙음에서 벗어나며 병들어야 하는 존재가 병듦에서 벗어나고 죽어야 하는 존재가 죽음에서 벗어나며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빠져야 하는 존재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이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S3.18)

 

 

여기서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처님을 친구로 삼으라는 말과 같다. 이 말은 “Mamañhi, ānanda, kalyāamittaṃ” 번역한 것이다. 이는 아난다여, 나를 벗으로 삼아 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나를 좋은 친구로 삼아서라고 번역했다.

 

부처님은 자신을 친구로 삼으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승도 친구가 있음을 말한다. 스승은 항상 스승이고 제자는 항상 제자가 아님을 말한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날 있다. 이를 청출어람이라고 말할 있다.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담마딘다장로 이야기’(Vism.20.111-113) 좋은 예이다. 먼저 아라한이 제자가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은 스승을 제도한다는 일화를 말한다.

 

진리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도반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진리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매우 빠른 길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홀로 살면 고립되어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질 수 있다.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종종 접한다. 세상이 싫다고 하여 심산유곡에 나홀로 신선처럼 사는 사람들도 해당될 것이다. 오로지 화면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도 해당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교류가 없이 홀로 살다 면 기인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마치 심해에서 움직임 없이 살아가는 기괴한 모양의 심해생명체와 같고,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화식조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또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코로나 확진자가 4천명을 기록하는 시기에도 어김없이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모임이 20172월 이후 지금까지 모임이 유지되어 왔다.

 

도현스님이 오셨다. 도현스님이 와야 모임에 활력이 솟는 것 같다. 장계영선생과 함께 왔다. 장계영선생이 모시고 온 것이다. 올해 처음 들어 직접 대면했다. 줌에서 화면으로 보긴 보았지만 직접 대면해 보니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오랜만에 친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좋은 도반들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좋은 친구(kalyāamitta), 좋은 동료(kalyāasahāya), 좋은 도반(kalyāasampavaka)”이라고 했다. 여기에 담마를 설명하는 자도 포함되고 출가한 스님도 포함된다. 당연히 부처님도 포함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라고 말했나 보다. 어제 저녁은 오랜만에 법담이 넘쳐나는 서고(書庫)의 밤이 되었다.

 

 

2021-11-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