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번뇌가 소멸된 자에게 다시 번뇌가 일어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1. 28. 12:35

번뇌가 소멸된 자에게 다시 번뇌가 일어날 수 있을까?

 

 

금요니까야모임 교재는 생활속의 명상수행이다. 법수별로 되어 있는 11권의 방대한 앙굿따라니까야를 한권으로 만들어 놓은 책이다. 이는 편저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을 모아 놓은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는 법수가 모두 11개이다. 이번 11월 금요모임 부터는 여섯 번째 법수로 진입하게 되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할 때 모두 여섯 가지 법을 설하신 것으로 보면 된다. 이번 11월 두번째 금요모임에서 모두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여읨의 경(A6.13)에서

 

첫번째로 합송한 경은 여읨의 의미와 여읨의 세계는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여읨의 경’(A6.13)에 해당된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에는 자애의 경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경의 제목이 다른 것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보았다.

 

빠알리사전을 찾아보니 ‘Nissāraīyasutta’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닛사라나(nissaraa)‘going out’의 뜻이다. 한자어로는 출리(出離)’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여읨으로 번역했다. 그럼에도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자애경(Metta sutta)’으로 제목을 붙였다.

 

모두 여섯 가지 여읨이 있다. 법수가 여섯 이므로 당연히 여섯 가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무량심 네 가지에다 인상의 여읨과 자만의 여읨이 추가되어서 여섯 가지 여읨이 있음을 말한다.

 

경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번뇌가 소멸된 자에게 다시 번뇌가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는 번뇌가 소멸된 자에게는 다시는 번뇌가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여섯 가지 법수마다 마치 후렴구처럼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neta hāna vijjati)”라고 강조되어 있다. 빠알리원문을 해석하면 그 상태로 있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라는 것을 말한다.

 

깨달은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깨닫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사람의 언행이 일치되는지로 확인할 수 있다. 낮에 한말 다르고 밤에 행위하는 것 다르다면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 사람에게 탐, , 치가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로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어리석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탐욕이다. 가장 드러나기 쉬운 것은 성냄이다.

 

그 사람이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라한은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화를 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알려 주기 위한 자비의 분노일지라도 화를 냈다면 마음속에 분노라는 오염원이 남아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여섯 가지 여읨이 있는데

 

경에서는 여섯 가지 여읨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아라한의 경지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자

2) 연민의 마음에 의한 해탈자

3) 기쁨의 마음에 의한 해탈자

4) 평정의 마음에 의한 해탈자

5) 인상을 여읜 마음에 의한 해탈자

6) 자만을 여읜 마음에 의한 해탈자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자를 멧따 쩻또위뭇띠(mettā cetovimutti)’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자심해탈(慈心解脫)이다. 특징은 절대로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가 나의 마음을 묶고 있습니다.”(A6.13)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심해탈자가 아니다.

 

자애의 마음을 닦은 자에게 분노가 일어나서 분노가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미 훌륭하게 성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그의 마음을 묶고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6.13)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

 

 

게송에서는 토한 것을 다시 삼킬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똥이 되어서 나온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토한 음식을 또다시 먹을 수 없다. 번뇌도 그런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닦아 자애의 마음의 해탈을 이룬 자가 분노에 지배되었을 때 이는 토한 음식을 다시 삼키는 것이 된다.

 

경에서 여섯 가지 해탈에 대응되는 번뇌가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분노를 여의는 것이 곧,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입니다.”

2) “폭력를 여의는 것이 곧, 연민의 마음에 의한 해탈입니다.”

3) “불쾌를 여의는 것이 곧, 기쁨의 마음에 의한 해탈입니다.”

4) “탐욕을 여의는 것이 곧, 평정의 마음에 의한 해탈입니다.”

5) “인상을 여의는 것이 곧, 인상을 여읜 마음에 의한 해탈입니다.”

6) “의혹과 불확실성의 가시를 여의는 것이 곧, ‘라는 자만의 부숨입니다.”

 

 

자애는 분노에 대응되고, 연민은 폭력에, 기쁨은 불쾌에, 평정은 탐욕과 대응된다. 여기서 연민은 왜 폭력과 대응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폭력이라고 했다. 그래서 장로가 축원할 때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과 함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불쾌를 여의는 것이 기쁨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선정에서 일어나는 기쁨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탐욕을 여의는 것이 평정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업보에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했을 때 탐욕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항에서 인상을 여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럴 때는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주석에 따르면 인상의 여읨(animitta)강한 통찰을 의미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탐욕 등의 인상과 물질 등의 인상과 영원 등의 인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탐진치 삼독과 색수상행식 오온과 상락아의 인상이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이런 번뇌가 일어났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토한 음식을 다시 삼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여섯 번째 항을 보면, 의혹과 불확실성의 가시를 여의는 것이 자만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내가 있다는 자만을 여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내가 있다(asmi)’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오온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이말로 나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아라한에게는 자만이 일어날 수 없다. 왜 그런가? 무아의 성자이기 때문이다. 무아의 성자가 내가 아라한인데.”라는 자만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내가 깨달았는데.”라며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니기 쉽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에게 의혹과 불확실성의 가시가 그의 마음을 묶고 있다.”(A6.13)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아라한이 되었음에도 의심의 화살이 마음에 침입하여 머문다.”라고 말할 수 있다.

 

토한 음식은 다시 먹을 수 없다

 

불교의 목적은 해탈과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니까야에서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구문이 있다. 그것은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S22.59)라는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라고 했다. 키워드는 염오(nibbinda), 이욕(virāgā), 해탈(vimutti)인 것이다.

 

무엇을 싫어 하고 무엇을 염오해야 할까? 이는 경을 보면 명백하다. 경에서는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S22.5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서 싫어하여 떠나라는 것이다. 이를 닙비다(厭惡)와 위라가(離慾)라고 한다

 

수행을 하여 번뇌가 소멸되면 다시는 번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번뇌에 묶여 있다는 그는 그 번뇌를 소멸한 것이 아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뿌리에 대한 번뇌가 뽑혔을 때 다시는 번뇌의 싹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태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아라한에게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라도 탐욕이 붙어 있지 않다. 무아의 성자에게 내가 아라한인데.”라는 견해도 생겨날 수 없다. 토한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번뇌가 소멸된 자에게 다시 번뇌가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2021-11-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