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죽음백신을 맞아 놓으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10. 08:52

죽음백신을 맞아 놓으면

 

 

지금시각 아침 650, 하얀 여백을 마주하고 있다. 창 밖은 캄캄하다. 어둠이 점차 절정에 달하고 있다. 동지가 머지 않은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부리나케 일터로 달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해야 할 일이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이미우이 음악이 흐른다. 빠알리 라따나경이다. 십년도 넘게 매일 듣고 있다. 언제 들어도 새롭다. 음악도 좋지만 무엇보다 내용이 좋다.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 대한 것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된다. 이것으로 아침 예불 삼아도 될 것 같다. 라따나경은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기 때문이다.

 

절구커피를 만들었다. 원두를 절구에 으깨어서 만든 것이다. 절차는 번거롭다. 절구질을 하고 필터를 사용하여 원두를 내리는 과정이 복잡하다. 그러나 매일 하다 보니 일상이 되었다. 밥먹는 것이나 똑같다.

 

 

글쓰기도 일상이다. 매일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일상이 된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차를 마시는 것은 일상이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일상이 된다.

 

오늘 서둘렀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일감이 밀려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계속 놀다가 이번주에 일감이 폭증했다. 모두 급한 것이다. 어제는 무척 바빴다. 글을 쓸 시간이 나지 않았다. 초분을 다투며 일처리 하다 보니 밤 11시 넘어 자정 가까이 되어서 귀가했다.

 

오늘은 일과 시간 중에 마무리 작업해야 한다. 글쓰기도 해야 한다. 시간을 확보하려면 일찍 일어나서 일찍 나오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두 시간이 확보된다면 글이 하나 나온다.

 

오늘 써야 될 글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지난번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독송한 경에 대한 것이다. 오늘 금요모임이 있는 날이니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나와 이렇게 두드리고 있다.

 

11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마지막 경에 대한 것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통해 어떻게 불사(不死)의 길을 예비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2(Dutiyamaraassatisutta)’(A6.20)에 해당된다.

 

죽음에 대한 새김을 마라나사띠(maraassati)라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는 사수념(死隨念)이다. 죽음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두 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경은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A6.19)라는 것이 가르침이 핵심이다. 두 번째 경은 어떤 내용일까? 부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이와 같이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 뱀이 나를 물거나, 전갈이 나를 물거나, 지네가 나를 물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 나는 걸려 넘어져서 떨어지거나, 내가 먹은 음식이 탈이 나거나, 담즙이 나를 격분시키거나, 점액이 나를 막히게 하거나, 날카로운 바람이 나를 괴롭히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성찰한다.”(A6.20)

 

 

경을 보면 죽을 요인이 많다. 출가수행자가 집없는 숲에서 살 때 도처에 죽을 위험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뱀, 전갈, 지네와 같은 독충도 있을 것이다. 넘어져서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것으로 인하여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밖에도 담즙, 점액, 바람 등 수많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인은 많다.

 

경에서는 죽음에 이르게 할 가능성 몇 가지를 나열했다. 이 밖에도 죽음에 이르게 할 요인은 수없이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서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다. 오래 전에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 있는지 모른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분명히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십년후가 될지, 이십년후가 될지 알 수 없다. 아니 오늘 저녁이 될 수도 있다. 한시간 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사고는 도처에 깔려 있다. 뉴스를 보면 갖가지 요인으로 죽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입생 환영회 때 강당 천정이 무너져서 죽고, 공연관람하다가 바닥이 꺼져서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죽는 경우는 이제 뉴스도 되지 않는다.

 

비행기 타고 가다 죽고 배를 타고 가다 죽는다. 집 밖에 나오면 죽을 요인은 많다. 언젠가 뉴스를 들었는데 보도를 지나가다 간판이 떨어져서 즉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뉴스를 듣고서는 간판 밑을 지날 때 저 간판이 떨어져서 죽을 수도 있다.”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피해서 지나가게 된다.

 

태어난 자는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용감하게 맞닥뜨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죽음과 맞서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나는 밤에 나에게 죽음을 초래하고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는가?’라고 성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성찰하면서 이와 같이 나는 밤에 나에게 죽음을 초래하고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다.’라고 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곧바로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옷이 불붙고 머리가 불붙었는데, 그 옷이나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곧바로 올바로 알아차려야 하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곧바로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A6.20)

 

 

경에서는 성찰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성찰은 ‘aisañcikkhitabba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aisañcikkhati’형태로서 ‘discriminated; considered’의 뜻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성찰하다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숙고하다라고 번역했다.

 

성찰의 뜻은 반성하며 깊이 살피다의 뜻이다. 숙고의 뜻은 곰곰히 잘 생각하다의 뜻이다. 이는 ‘paisañcikkhati’에서 ‘pai’‘against; opposite, towards, in opposition to.’의 뜻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조하는 것이다. 되돌아보는 것의 의미가 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어떤 우연한 사고로 지금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는가?”라고 표현되어 있다.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는 아꾸살라 담마(akusalā dhamma)’를 말한다. 아꾸살라 담마는 불선법이라고도 하는데 니까야에서는 십악행으로 표현되어 있다. 살생 등 몸으로 짓는 불선법 세 가지, 거짓말 등 입으로 짓는 불선법 네 가지, 그리고 탐욕 등 마음으로 짓는 불선법 세 가지를 말한다.

 

십악행은 천수경에서도 볼 수 있다. 천수경 참회게를 보면 살생중죄금일참회라고 하여 악행을 한 것에 대하여 즉시 참회하라고 했다. 이런 참회는 마음으로 짓는 불선법도 대상이 된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말한다. 다만 니까야에서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사견(邪見)’이라고 구체화해 놓은 것이 차이가 있다.

 

사견은 빗나간 견해를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은 사견이 된다. 대표적으로 “그는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흘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M41)라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열 가지 아꾸살라 담마(十惡行) 중에서 최악은 무엇일까? 단연 사견이다. 이는 오무간업에서 사견이 추가되어 육무간업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M115)에 따르면, 1)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2)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3) 아라한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4)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여래의 피를 흘리게 한 경우, 5) 승가를 분열시키는 경우, 6) 견고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육무간업이 된다.

 

육무간업 중에서 최악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견이다. 왜 사견이 최악일까? 부모를 살해하는 것 보다, 아라한을 죽이는 것 보다,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것 보다 더 엄중한 것은 승단을 분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단을 분열하게 하는 것 보다 더 엄중한 것은 사견이다. 이에 대하여 파옥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르면, “죽음의 순간에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 취착하는 것은 6가지 해롭고 무거운 업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업이다.(업과 윤회의 법칙, 346)라고 했다. 그래서 수 겁 동안 지옥에서 고통받는다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견이다. 사성제로 대표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 즉 십악행을 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자만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언제 죽음이 닥쳐올지 알 수 없다. 오늘 밤이 될 수도 있다. 한시간 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해 극도로 1)의욕을 일으키고(chandañca), 2)노력하고 (vāyāmañca), 3)정근하고(ussāhañca), 4)불퇴전하고(ussohiñca appaivāniñca), 5)새김을 확립하고(satiñca), 6)곧바로 올바로 알아차려야(sampajaññañca) 한다.”(A6.20)라고 했다.

 

왜 죽음명상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백신을 맞는 것과 같다고 했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로부터 보호되듯이,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새기면 죽음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열 가지 아꾸살라 담마를 버렸다면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불사가 된다.

 

불교의 목표는 무엇일까? 천상에 태어나는 것일까? 불교의 목적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꾸살라 담마,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실현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옷이 불붙고 머리가 불붙었는데”(A6.20)라고 표현했다.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

 

 

옷이나 머리에 불이 붙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꺼야 할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죽음이 바로 앞에 있다면 태연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면 커다란 과보가 따른다고 했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죽음에 대한 새김의 공덕이 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새김을 하는 수행승은 항상 방일을 여의고,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남의 지각을 얻어, 목숨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악을 꾸짖고, 쌓아 모으지 않고, 필수자구에 대한 간탐의 티끌을 여의고, 무상을 지각한다. 그것을 새김으로써, 그에게 괴로움의 지각과 실체없음의 지각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지 않은 뭇삶이 갑자기 맹수, 야차, , 도적, 살육자에게 공격당하면, 죽을 때 두려움-공포-혼미에 빠지듯, 그와 같이 빠지지 않고, 두려움 없이 혼미 없이 죽는다. 그가 만약 현세에 불사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는 좋은 곳으로 간다.”(Vism.8.41)

 

 

항상 죽음명상을 하는 자는 방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치 옷에 불이 붙은 듯하고 머리에 불 난 듯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죽음백신 맞아 놓은 것과 같다.

 

죽음명상을 하면 불사의 길로 갈 것이라고 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할수록 죽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죽음백신을 맞아 놓으면 이번 생에 불사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선처, 즉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시각 아침 840, 세상은 밝았고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12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있는 날이다.

 

 

2021-12-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