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정신적 가난과 십악행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24. 09:46

정신적 가난과 십악행

 

 

이 몸은 즐기기 위한 도구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즐기며 살자고 한다. 은퇴한 사람에게는 그 동안 일하느라 수고 많았으니 이제는 즐기며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나이 드신 어른에게도 이제는 남은 여생 즐기며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쾌락의 끝은?

 

즐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아닌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맛있는 음식이다. 혀의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여행도 들 수 있다. 여유가 있는 자들은 철마다 해외로 나가는데 이는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해외여행은 즐김의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즐거움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은 아마 허()와 무()일 것이다. 일시적으로 감각의 행복을 맛보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가지 못해서 불만족이다. 이것은 결국 괴로움에 속한다. 즐거움을 추구해 보지만 남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즐거움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즐기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즐김의 끝은 허무이기도 하지만 악업이기도 하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 왜 악업인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도처에서 감각을 즐기는 것에 대한 위험과 재난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감각을 즐기는 것은 악업을 짓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본 경도 그렇다.

 

밥맛이 나지 않을 때

 

12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두번째로 합송한 경이 있다. 교재에 쓰여 있는 타이틀은 누가 가난한 자이고 빚을 진 자이고 추궁당하는 자인가?’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빚의 경(Iasutta)’(A6.45)에 대한 것이다.

 

여기 빚쟁이가 있다. 그는 그 빚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보시를 하고 싶어도 이자가 나간다면 보시하기 힘들 것이다. 이자를 못 내면 추궁당할 것이다.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내지 못할 정도라면 사는 것이 지옥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세상에서 가난한 것과

빚을 진 것은 괴로움이라 불리네.

가난한 자는 빚을 지고

고통속에서 음식을 먹듯.”(A6.45)

 

 

장례식장에 가면 음식이 나온다. 사람이 죽었어도 먹어야 한다. 그때 그 음식 맛은 어떨까? 빚진자가 음식을 대할 때 어떨까? 배고픔에 먹긴 먹지만 음식을 즐기며 먹을 만한 여유는 없을 것이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빚을 내었을 때 괴로움이 되기 쉽다. 주식투기 하는 자가 돈을 빌려서 투기했을 때 어떤 심정일까? 잘되면 다행이지만 손실이 나면 더욱더 많은 빚을 지게 된다. 부처님은 물질적인 빚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가난한 자, 무일푼인 자, 재산이 없는 자가 이자를 약속하고 할당된 이자를 독촉에도 불구하고 갚지 못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독촉을 당하는 것도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괴로움인가?”(A6.45)

 

 

무일푼인 자는 돈을 빌리기 힘들다. 그럼에도 어떤 연유로 돈을 빌리게 되었을 때 고리의 이자를 물게 될 것이다. 돈이 급히 필요한 자가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사업하다 부도 위기에 처하면 은행을 찾는다. 은행에서 빌리지 못하면 사채업자를 찾아 갈 것이다. 그런데 사채이자는 매우 높다는 것이다. 고리의 사채이자를 갚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독촉에도 불구하고 갚지 못해 추궁당한다면이라고 했다.

 

독촉보다 더 무서운 것은 추궁당하는 것이다. 사채업자가 자주 전화를 거는 것은 독촉하는 것이고, 갚으라고 협박하는 것은 추궁당하는 것이다. 그래도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추궁을 당해도 갚지 못해 밧줄에 묶인 다면이라고 했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럴 때 밥맛이 날까?

 

경제적으로 사망한 자

 

주변에서 종종 신용불량자를 본다. 사업하다 부도가 나서 신용불량자도 있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해서 파산해서 신용불량자가 된 경우도 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용불량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수 없다. 자신의 이름으로 핸드폰도 개통할 수 없다. 당연히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을 수도 없다.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경제적으로 사망한 자라고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빚 때문이다. 사업한다고 빚을 냈을 때 문제는 발생된다. 사업하다 부도가 나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다. 그럴 경우 빚 독촉을 받는다. 협박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이들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를 빚의 밧줄에 묶인 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신적 재물이 없는 자

 

빚은 경제적 빚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빚도 있다. 경제적으로 빚진 자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빚진 자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바로 그 가난한 자이고 무일푼인 자이고 재산이 없는 자는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믿음이 없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비추어 부끄러움을 모르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비추어 창피함을 모르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향하여 정진이 없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관하여 지혜가 없어서,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나는 이것을 두고 빚을 진 것이라고 말한다.”(A6.45)

 

 

여기서 주어는 가난한 자이고 무일푼인 자이고 재산이 없는 자이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자를 말한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섯 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믿음, 부끄러움, 창피함, 정진, 지혜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 정신적 재물이 없으면 가난하고 무일푼이고 재산이 없는 자라고 했다.

 

가난해도 살 수 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가난은 다만 불편할 뿐이다. 그러나 가난은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을 때 돈을 빌려야 할 때 그렇다. 대개 이자를 약속하고 빌린다. 그러나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자마저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을 때 최악이 될 수 있다. 독촉당하고 추궁당한다. 그래도 갚지 못하면 포박당한다. 감옥에 쳐 넣는 것이다. 정신적 가난도 그럴 것이다.

 

재벌 2세와 3세가 마약에 탐닉하는 이유는?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가 있다. 그가 물질적으로 부자라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가난한 자일 수 있다. 그것은 정신적 재물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 부끄러움, 창피함, 정진, 지혜와 같은 정신적 재물이 없을 때 백만장자라고 하여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돈은 많고 정신적으로 가난한자가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각을 즐기는 것뿐이다.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자극적인 감각을 즐긴다. 그래서 소주를 마시기 보다는 양주를 찾을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은 일시적 즐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더 오래 지속되는 감각적 즐거움을 찾고자 할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예산에서 한계가 없는 부자들은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자극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마약일 것이다.

 

재벌 이세와 삼세들의 마약관련 이야기가 종종 뉴스에 나온다. 사용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없는 부자들은 일반사람들이 즐기는 것보다 더욱더 강렬한 감각을 즐긴다. 이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에 따른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란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같은 재화를 반복적으로 소비하면 사람이 느끼는 만족도가 떨어진다.”라는 것이다. 이를 짜장면 먹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위가 큰 사람이라도 짜장면을 세 그릇 먹기 힘들다. 그럼에도 네 그릇을 먹으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배고플 때 짜장면 한그릇은 먹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 첫번째 짜장면에 대한 만족도를 10이라 했을 때 연이어 두 번째 먹는 짜장면의 만족도는 떨어질 것이다. 이를 8이라 하자. 세번째 짜장면은 더 큰 폭으로 떨어져서 3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네번째 짜장면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리 좋아도 반복하면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를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 한다. 그런데 이 법칙에서 어긋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약이다.

 

마약은 자주 소비해도 만족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짜장면을 열개 먹으라면 고문에 가깝지만 마약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약에 대하여 고센의 제1법칙, 즉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비껴 나가는 것이라 한다.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예산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가지만 소비하지 말고 여러가지를 소비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소비할 수 있는 예산이 한정되어 있는 일반인들은 골고루 소비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어느 것 하나만 집중적으로 사서 먹는다면 금방 질려 버리고 말 것이다. 앞서 언급된 짜장면 먹기대회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한정된 예산으로 인하여, 그 한정된 예산으로 여러 가지를 구매함으로써 만족도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러나 예산에 있어서 한정이 없는 재벌 2세나 3세들은 다르다.

 

일반인들은 예산이 없기 때문에 이것저것 소비하며 만족도를 높인다. 재벌 2세와 3세들 역시 처음에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명품이나 고급양주, 고급차 등 여러가지를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금방 질리고 말 것이다.

 

무한정의 예산을 가진 재벌2세나 3세들은 오로지 한가지에만 올인해도 만족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약’이다. 예산에 있어서 한정이 없는 재벌 2세나 3세들에게 있어서 고센의 제2법칙이라 불리우는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은 무너진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감각적 즐거움은 끝은 어디일까?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마약이다. 마약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을 모두 비껴 나간다.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정신적으로 가난한자

 

재벌이세나 재벌삼세가 마약에 빠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와는 다른 것이다.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정신적으로 가난한자가 있다. 이런 자들은 감각적 재난에 빠지지 쉽다. 재벌이세나 삼세가 마약에 빠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당시에도 있었다. 장자의 아들 야사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야사는 오늘날로 말하면 재벌2세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세 개의 궁전이 있어서 철마다 돌아가며 이용했다. 그리고 궁전에서 매일 파티를 했다. 그런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벽에 환락의 끝을 본 것이다. 그것은 구역질 나는 것이었다. 마치 토한 음식을 보는 것 같았다.

 

야사는 감각적 쾌락의 끝을 보았다. 그때 야사는 ! 괴롭다. ! 고통이다.”(Vin.I.15)라고 외쳤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사는 자가 왜 괴롭다고 했을까? 더구나 고통이라고 했을까?

 

물질적으로 부유하면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야사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일 환락의 파티를 열었을 때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오래 가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감각적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양주파티를 해도 그때뿐이다. 파티가 끝났을 때는 혐오스러운 모습만 보일 것이다. 거기에다 누가 토하기라도 했다면 더욱 더 혐오스러울 것이다. 마약파티는 더할 것이다. 마약상태에서는 열반일지 모르지만 깨어났을 때는 지옥을 경험할 것이다. 야사도 그랬을 것이다.

 

야사는 장자의 아들로 오늘날 재벌2세와 같았다.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난했다. 매일 감각을 즐기는 파티를 했으나 결과는 늘 괴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새벽 ! 괴롭다. ! 고통이다.”라며 외친 것이다.

 

야사의 케이스를 보면 물질적으로 많이 가진 것도 괴로움이고 고통이다. 이는 정신적 재산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하게 살지라도 그에게 믿음, 부끄러움, 창피함, 정진, 지혜와 같은 정신적 재물이 있다면 그는 부자라고 볼 수 있다.

 

 

누가 빚진 자인가?

 

빚진 자는 괴롭다. 독촉당하고 추궁당하면 더 괴롭다. 원금은커녕 이자도 갚지 못하면 포박된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망이다. 경제적 사망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빚진 자는 반드시 물질적 빚 만을 말하지 않는다. 정신적 재물이 없어서 악행을 저지를 때 빚진자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나는 이것을 두고 빚을 진 것이라고 말한다.”(A6.45)라고 했다.

 

정신적 재물이 없는 자는 가난한 자이다. 그런데 믿음, 부끄러움, 창피함, 정진, 지혜와 같은 정신적 재물이 없는 자는 악행을 저지르기 쉽다는 것이다.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악행을 저질렀을 때 이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했다.

 

악행을 하면 빚진 자와 같다고 했다. 그런데 빚진 자는 이자를 갚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자를 말할까? 그것은 악행한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길”(A6.45)라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이것을 두고 이자를 갚는 것이라고 했다.

 

악행은 신구의 삼업에 대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이를 십악행으로 설명한다. 신체적인 것으로는 살생, 투도, 사음이 있다. 언어적인 것으로는 망어, 악구, 양설, 기어가 있다. 정신적인 것으로는 탐욕, 분노, 사견이 있다.

 

부처님은 십악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하여 빚진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악행을 숨기는 것에 대해서는 이자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악행을 숨길 수 없다. 주변에서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품행이 단정한 수행승이 보았다면 이 존자는 이와 같이 행하고 이와 같이 유행한다.”(A6.45)라고 말할 것이다. 이를 독촉당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지옥이나 축생의 밧줄에 묶여

 

독촉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추궁당하는 것이다. 십악행을 저지르면 마치 사채업자에게 추궁당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수반하는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따라다닌다.”(A6.4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른 사람을 다 속여도 자신의 양심만큼은 속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

 

 

이 가르침은 원초적 죄의식을 말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다 속여도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음을 말한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문득문득 떠 오른다는 것이다. 이를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고 표현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있다. 살인도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완전범죄를 저지른 자가 잘먹고 잘살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 한켠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산그늘의 비유로 설명했다. 그래서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라고 했다.

 

죽음의 순간 마음의 그림자가 지면 어떻게 될까? 살인했던 것이 임종순간에 드리워진다면 그것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그가 가야할 곳은 악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십악행을 하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지옥이나 축생의 밧줄에 묶인다.”(A6.45)라고 했다.

 

정신적 가난과 십악행

 

빚의 경은 난해하다. 여러 번 읽어 보아도 감을 잡기 힘들었다. 후기를 쓰기 위해서 어제 저녁 품어 두었다. 닭이 알을 품듯이 품은 것이다. 그리고 내용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었다.

 

오늘 새벽 실마리가 풀렸다. 부처님이 비유로 설명한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신적 가난과 십악행에 대한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정신적 재물이 없는 자를 말한다. 그리고 십악행은 빚진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하자 술술 풀리는 것 같았다.

 

부처님 가르침은 심오하다. 심오한 부처님 가르침은 비유로 알 수 있다. 열반을 체험해 보지 않았지만 비유로 설명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빚진자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기독교에서는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아마도 탐욕, 성냄 등이 가난한 자를 말하기 위함 일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정신적 재물이 없는 자를 마음이 가난한 자로 보았다. 그런데 믿음, 부끄러움, 창피함, 정진, 지혜와 같은 정신적 재물이 없는 자는 악행을 저지르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십악행을 말한다.

 

십악행은 빚을 진 것과 같다. 그런데 악행을 하는 자는 자꾸 숨기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자를 갚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악행을 하면 표가 날 것이다. 손가락질 받았을 때 독촉당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다 속여도 자신만은 속이지 못한다. 때때로 악행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이에 대하여 추궁당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최악은 죽을 때 악행이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이다. 마치 일몰 때 산그늘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그림자가 그를 압도했을 때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지옥의 밧줄에 묶이고 축생의 밧줄에 묶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2021-12-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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