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연기의 무시간성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27. 11:52

연기의 무시간성에 대하여

 

 

지금 시각 아침 75, 도시의 동녘에 동이 터간다. 동지가 지난지 며칠 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동트는 시각이 단축되는 것 같다. 이제 세상은 서서히 양의 기운이 우세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이른 아침 일터에 나왔다. 아침 7시 이전에 도착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밤은 길어서 모두 잠든 시간에 일찍 깨어 일터에 왔을 때 승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 아침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써야 할 글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해야 할 특별한 일이 없다. 아침에 글을 쓰기 위한 사전 작업을 어제 일요일 모두 마무리해 놓았기 때문에 쓰기만 하면 된다.

 

오늘 아침 써야 할 글은 지난주 금요일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첫번째 경에 대한 것이다. 경의 주제는 현세의 삶에서 유익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 있는 통찰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찾아 보니 앙굿따라니까야 현세에서 유익한 것의 경(Pahamasandiṭṭhikasutta)’(A6.47)이다.

 

지금 여기에서 효과 있는 가르침

 

경의 제목은 빠타마산딧티까이다. 빠타마는 첫번째라는 의미이다. 이어지는 경은 두번째가 될 것이다. 이 경에서 키워드는 경의 제목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산딧티까(sandiṭṭhika)라는 말이다.

 

산딧티까의 뜻은 무엇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으니 ‘visible; belonging to this life’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는 현세에서 유익한 것이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본에서는 스스로 보아 알 수 있음이라고 번역했다.

 

산딧티까라는 말은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D.I,51; II,93, 217; III,5; M.I,85, 474; A.I,156 sq.; II,56, 198; S.I,9, 117, IV.41, 339; Sn.567, 1137; Vism.215 sq. -- As sandiṭṭhiyā (f.) at J.VI,213 (Page 677)라고 소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Sn.567이 있다. 찾아보니 숫따니빠따 쎌라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쎌라여, 지금 여기에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뛰어 넘는 청정한 삶은 잘 설해져 있으니, 그것을 위해 출가하여 방일하지 않고 배우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닙니다.”(Stn.567)

 

바라문 쎌라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에게 귀의하고자 할 때 부처님이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즉시에 효과를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접촉에 따른 인과

 

산딧티까는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니까야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을 표현하는 여러 단어와 함께 사용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씨바까여, 그대가 안으로 탐욕이 있다면, ‘나에게 안으로 탐욕이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혹은 안으로 탐욕이 없다면, ‘나에게 안으로 탐욕이 없다.’라고 분명히 알면, 씨바까여, 그것이야말로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A6.47)

 

 

여기서 씨바까는 몰리야 씨바까를 말한다.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씨바까의 경’(S36.21)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경을 보면, 부처님은 인과가 반드시 업보의 성숙에 의한 인과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불운한 사건이나 우연의 피습등 여섯 가지가 있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재 겪고 있는 괴로움은 모두 접촉에서부터 시작됨을 말한다.

 

접촉이 없다면 세상도 없고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팔지연기를 보면 삼사화합촉에서부터 연기가 회전된다. 업보의 성숙에 인과는 무명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로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불운한 사건이나 우연의 피습 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인과가 반드시 업보의 성숙에 의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접촉에 따른 인과도 발생함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연기법의 무시간성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그것은 1)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고(sandiṭṭhiko), 2)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akāliko), 3)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ehipassiko), 4)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opaneyyiko), 5)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수는 법수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정도론 가르침에 대한 새김을 보면 각주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서 산딧티꼬와 아깔리꼬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sandiṭṭhiko’현세에 유익한, 지금 여기의란 뜻이고, ‘akāliko’무시간적인, 시간에 매이지 않는의 의미를 지닌다. 붓다고싸는 고귀한 길을 실천하면 그 결과가 즉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이 단어를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청정도론 1309번 각주)

 

 

산딧티꼬와 아깔리꼬를 함께 설명해 놓은 것이다. 각주를 보면 더 자세한 것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102쪽을 참고하라고 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열어 보았다. 관련 페이지를 열어보니 연기법의 무시간성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로 시작되는 법수념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깔리까, 즉 무시간성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들어 설명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가 이와 같은 늙음과 죽음을 분명히 알고, 이와 같은 늙음과 죽음의 원인을 분명히 알고, 이와 같은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분명히 알고, 이와 같은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분명히 안다. 그에게 이것이 사실에 대한 앎이다.”(S12.33)

 

 

상윳따니까야 앎에 대한 토대의 경’(S12.330에 실려 있다. 부처님이 사성제를언급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구조로 되어 있는 연기법과 관련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다. 시간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

 

무시간성은 하나의 사건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늙음과 죽음 역시 과정에 대한 것이다. 십이지연기에서 모든 고리 역시 과정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생멸이다. 조건발생하여 소멸하는 것이다. 무시간성임을 말한다. 이는 연기법이 무시간성임을 말한다. 이어지는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그는 앎과 봄을 갖추어 시간을 뛰어넘어 관통하여 깊이 이해한 이 가르침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라도 과거에 늙음과 죽음을 파악했고 늙음과 죽음의 원인을 파악했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파악했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파악했다면, 그들 모두는 내가 지금 이러하듯이 같은 방법으로 이와 같이 파악했을 것이다.”(S12.330

 

 

십이연기에서 자라마라나(늙음과 죽음)에 대한 것이다. 늙음과 죽음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태어남도 그렇고, 존재도 그렇고, 집착도 그렇다. 십이연기 모든 고리는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생성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되었을 때 반드시 소멸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것이다.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그들 모두는 내가 지금 이러하듯이 같은 방법으로 이와 같이 파악할 것이다. 그에게 이것이 보편에 대한 앎이다.”(S12.33)라고 했다.

 

부처님은 보편에 대한 앎을 말씀하셨다. 이 말은 ‘anvaya ñāa’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anvaya’는 선후, 순서, 관계를 뜻한다. 그래서 안와야 냐나에 대하여 한자어로 유지(類智)라고 한다. 이는 보편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임을 말한다.

 

아깔리까의 즉시성과 초월성

 

부처님은 가르침에 대하여 아깔리까(무시간)로 설명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세적이고 무시간성임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무시간성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즉시 효과가 있는 것과 시간이 지연되더라도 효과가 있는 것을 말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깔리까를 시간이 걸리지 않고라고 번역했다. 이는 아깔리까를 즉시성으로 해석한 것이다. 가르침을 접하고 실천하면 즉시 효과를 볼 수 있음을 말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아깔리까에 대하여시간을 초월하여라고 번역했다. 이는 시간의 초월성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시간이 지연되더라도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아깔리까에 대하여 시간을 초월하여라든가, “시간을 뛰어넘어라고 번역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에 따른 것이다.

 

시간은 흘러 가는 것일까?

 

생성과 소멸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조건발생하여 소멸하는 연기법은 언제나 원리로서 있는 것이다. 이는 연기법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기법은 사건과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흘러 가는 것일까?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서 그 시간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일까? 부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생성되는 것은 반드시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의 무시간성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서는 아깔리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연기의 특징이 그것의 무시간성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상대적인 과거, 현재,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시간의 무를 뜻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103)

 

 

연기법은 지금 여기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도 적용되었고 앞으로 올 미래에도 적용될 것이다. 그런 연기법은 시간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존재도 발생된다는 사실이다. 그때 인과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일시적인 인과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시공간도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제나 시간 속에서 산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 그러나 존재는 일시적이다. 생성되어서 일시적으로 존재할 때 시간도 생성된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시공간도 생겨나는 것이다. 마치 빅뱅을 연상케 한다.

 

빅뱅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아주 작은 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시간 속에서 빅뱅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빅뱅이 일어날 때 시공간이 동시에 발생되는 것이다. 연기에서 사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발생이라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소멸 때까지 시간도 생겨난다.

 

태어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 존재의 태어남은 죽을 때까지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의 무시간성이 아닐까?

 

비파소리의 비유

 

연기의 무시간성은 지금 여기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시각, 청각 등 여섯 감역에서 생멸하는 현상을 말한다. 청각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비파소리의 비유가 있다.

 

 

예를 들어, 비파를 연주할 때에 생겨난 소리는 생겨나기 전에 쌓여 있던 것은 아니고, 생겨나더라도 쌓였던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더라도 방향이나 사잇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소멸한 것이라도 어떤 곳에 쌓여 있는 것이 아니고, 비파와 연주와 연주자의 적당한 노력을 조건으로 전에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고,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명색의 현상은 전에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고,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Vism.20.96)

 

 

비파소리가 나는 이유에 대하여 세 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비파와 연주와 연주자의 적당한 노력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맞아 떨어졌을 때 소리가 난다. 그런데 소리는 나자 마자 금방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이다.

 

인과론적 존재

 

소리가 나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리가 사라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리가 나자마자 즉시 사라진다. 그래서 법이 머무는 기간은 매우 짧다. 어느 정도로 짧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러한 사실들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까닭에 항상 새로운 것으로서 형성들이 나타난다. 또한 단지 새로운 것만으로서가 아니라,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잠시 지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환술, 아지랑이, , 선화륜, 신기루, 파초 등처럼 견실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Vism.20.103)

 

 

법은 잠시 머문다. 사건도 잠시 일어났다고 사라진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날 때 시간도 함께 발생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시간 지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존재도 있게 된다. 그런데 존재는 인과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과는 시간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과가 형성됨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의 무시간성(akālika)에 대한 것이다.

 

연기는 사건에 대한 것

 

부처님은 연기법을 무시간성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앎의 토대에 대한 경’(S12.33)언표형식의 경’(S22.62)이 그것이다.

 

부처님은 앎의 토대에 대한 경에서 그는 앎과 봄을 갖추어 시간을 뛰어넘어 관통하여 깊이 이해한 이 가르침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S12.33)라고 하여 연기의 무시간성을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절대적인 의미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연기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연기송을 보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기송에서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서는 그것들은 결과가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것들이 시간의 계기를 수반하지 않는다.”(104)라고 했다.

 

상대적인 과거, 현재, 미래는 있을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사건은 금방 소멸하고 만다. 이렇게 본다면 절대적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 시간을 뛰어넘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이는 아깔리까가 무시간성임을 말한다. 연기법이 무시간성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가 무시간성인 것에 대하여 보편에 대한 앎(anvaya nāna: 類智)이라고 했다.

 

언어로 표현된 과거, 현재, 미래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무시간성이다. 그래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런데 있다고 믿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이와 관련된 경이 언표형식의 경’(S22.62)이다.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산다고 착각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런 착각을 깨 주고 있다. 이는 상윳따니야 언표형식의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과거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미 지나갔고 소멸되었고 괴멸된 물질은 있었다라고 언표되고, ‘있었다라고 표명되고, ‘있었다라고 시설된다. 그것에 대하여 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S22.61)

 

 

사람들은 언어로 말할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말한다. 그러나 모두 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부처님은 단지 언어로서 정의된 표현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과거는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단지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 현재도 있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과거, 미래, 현재는 없다. 있다면 언어적 표현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현재도 없기 때문에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했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사건을 관찰하면 생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연한 사고에 대한 이해

 

이제까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 따르면 불운한 사건이나 우연의 피습이 있다. 이는 업보의 성숙에 따른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를 접촉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연기의 무시간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해가 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연기는 사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대상을 보아 시각의식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하나의 세상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접촉에 따른 것이다. 시각과 형상과 시각의식이 화합하여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연한 사고 역시 접촉에 따른 것이다.

 

인과는 반드시 삼세에 걸쳐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이 나도 인과는 적용된다. 이를 사건에 따른 시간이 생겨남을 뜻한다. 사건이 생겨나서 시간 지연이 되었기 때문에 인과가 생겨난 것이다.

 

우연한 사고는 접촉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사고는 시간지연을 유발하기 때문에 인과가 발생된다. 우연한 사고 역시 인과법을 벗어날 수 없다.

 

사건이 소멸되면 인과도 소멸된다. 다시 무시간성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이를 연기의 무시간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깔리라까는 연기의 무시간성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글쓰기 삼매에 빠지다보니

 

아침 7시부터 시작된 글쓰기가 1130분이 되어서 끝났다. 정리를 하면 12시가 훌쩍 넘을 것이다. 글쓰기 삼매에 빠지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오전일과가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이런 세월을 10년 이상 살아왔다. 쓴 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나중에 써 놓은 글을 엮으면 책이 될 것이다.

 

 

2021-12-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