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 4. 12:40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미얀마 빤디따라마 명상센터에 가면 오력(五力) 문양이 있다. 정문에 오엽의 꽃잎문양이 있다. 수행자들이 말하기를 미얀마 여러 명상센터 중에서 가장  빡쎈곳이라고 한다.  미얀먀 여러 수행처 중에서 수행하기가 가장 엄격하기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아마도 오력 문양도 한몫한다고 본다.

 

 

쏘나의 경에서

 

12월 두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두번째로 합송한 경이 있다. 제목은 명상수행을 하는데, 비파의 연주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로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쏘나의 경(Soasutta)’(A6.55)을 말한다. 이는 오력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쏘나여, 너무 지나치게 열심히 정진하면 흥분으로 이끌어진다. 너무 느슨하게 정진하면 나태로 이끌어진다. 그러므로 쏘나여, 그대는 정진을 조화롭게 확립하고, 능력을 조화롭게 수호하고, 거기서 명상의 인상을 파악하라.”(A6.55)

 

 

수행을 지나치게 하면 흥분이 되고, 수행을 느슨하게 하면 나태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오근과 오력을 말한다. 오근과 오력에서 다섯 가지 요소의 상호 관계에 대한 것이다. 어떤 관계일까?

 

믿음과 지혜의 관계는?

 

오력은 믿음과 지혜, 삼매와 정진, 그리고 새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섯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어떤 조화인가? 청정도론 제4장에 땅의 두루채움이 있다. 여기서 근본삼매에 들기 위한 설명에서 오력을 예로 들었다.

 

믿음과 지혜는 어떤 관계일까? 청정도론에서는 믿음이 강하고 지혜가 약한 자는 미신에 빠져 근거없는 것을 믿는다. 지혜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간교하여 약으로 생겨난 질병처럼 치유가 어렵다.”(Vism.4.47)라고 설명해 놓았다.

 

믿음과 지혜는 마치 시소를 타는 것 같다. 이를 길항(拮抗)적 관계라고 말한다. 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항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한쪽이 우세하면 다른 한쪽은 약화된다. 믿음과 지혜의 관계도 그렇다.

 

믿음이 우세하면 미신으로 빠질 것이라고 한다. 이는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믿음만 있지 지혜가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 반대로 지혜가 우세하면 간교해진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무엇이든지 의심하는 사람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부처님 말씀도 의심할 것이다. 많이 배운 사람, 많이 아는 사람, 많이 경험한 사람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는 약도 없다고 했다.

 

삼매와 정진은 어떤 관계일까?

 

삼매와 정진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역시 길항적 관계에 있다. 삼매가 강한 것에 대해서는 삼매에는 권태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권태가 그를 지배한다.”(Vism.4.47)라고 했다. 정진이 강한 것에 대해서는 정진에는 흥분이 있기 때문에 흥분이 그를 지배한다.”(Vism.4.47)라고 했다.

 

삼매는 권태로 빠질 수 있고, 정진은 흥분으로 빠질 수 있다. 삼매가 왜 권태로 빠질 수 있을까? 이는 삼매를 즐기는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열 가지 경계에서 빛을 보며 즐기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는 그는 자신의 근본적인 명상주제를 포기하고 빛만의 유혹에 빠져 앉아 있는 것이다.”(Vism.20.10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정진은 흥분으로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잘 해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삼매에 들기 위해서, 빛을 보기 위해서 지나치게 집착했을 때 흥분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욕심이다. 빛을 보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다. 욕망으로 정진하는 한 결코 삼매에 들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향신료처럼 대신처럼

 

믿음과 지혜, 그리고 삼매와 정진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비파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현을 너무 팽팽하게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력에서 사띠로 설명된다. 청정도론에서 사띠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새김은 모든 경우에 강한 것이 필요하다. 새김은 흥분의 경향이 있는 믿음, 정진, 지혜를 통해서 흥분에 떨어지거나, 권태의 경향이 있는 삼매를 통해서 권태에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한다.”(Vism.4.49)

 

 

사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띠가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런데 사띠는 믿음과 지혜, 그리고 삼매와 정진사이에서 조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이를 조미료와 대신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사띠는 선법으로서 항상 강조되는 것이다. 특히 수행처에서 강조된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모든 조미료가운데 소금과 향신료처럼, 모든 국가적인 업무에서 일체의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경우에 필수적인 것이다.”(Vism.4.49)라고 했다.

 

비파(琵琶)는 어떻게 생겼을까?

 

부처님은 쏘나의 경에서 비파의 비유를 들었다. 비파 줄을 너무 팽팽하게 해서도 소리가 잘 나오지 않고, 비파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해도 소리가 잘 나오지 않음을 말한다.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잘 조절되어야 만 최상의 소리가 나올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조화롭게 하라고 했다.

 

비파는 악기의 한 종류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연주되어 오던 악기라고 한다. 삼국시대 때부터 조선시대 때까지 궁중은 물론 민간에서도 널리 연주되었다고 한다.

 

 

비파는 본래 서역에서 들어온 악기이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인도에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니까야를 보면 비파에 대한 경이 종종 보인다는 것이다. 비파를 뜻하는 빠알리어 비나(vīā)’를 찾아보니 ‘Sn.449, Th.1, 467, S.IV,196’등에서 발견된다.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에서 비나가 보인다. 이는슬픔에 넘친 나머지 옆구리에서 비파를 떨어뜨리고, 그만 그 야차는 낙심하여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Stn.449)라는 구절에서 발견된다. 악마가 칠년동안 부처님을 쫓아다니며 성도를 방해했지만 포기하고 떠남을 말한다.

 

비나는 테라가타에서도 보인다. 이는 라꾼따까 밧디야 존자가 어떤 사람들은 북과 그리고 비파와 심벌즈를 즐기지만, 나는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님의 가르침을 즐긴다.”(Thag.467)라며 게송으로 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비파는 어떻게 생겼을까? 백과사전에서 당비파에 대한 것을 보면 배가 볼록하고, 네 줄에 굽은 목을 지녔으며, 향악(鄕樂)은 손톱 모양의 가조각(假爪角)을 오른손에 끼고 연주하며, 당악(唐樂)은 발목(撥木)을 오른손에 쥐고 연주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비파를 영어로 루트(lute)라고 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루트라고 번역했다. 오늘날 루트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고대인도에서는 널리 연주되었던 것 같다. 마치 오늘날 기타를 치듯이 여유 있는 사람들은 비파를 치며 인생을 즐겼던 것 같다. 그런데 당비파를 보면 4현이라고 했다. 줄이 네 개인 것을 말한다.

 

사현비파는 간다라 조형물에서도 발견된다. 기원후 1세기에서 4세기에 만들어진 조형물을 보면 전형적인 사현비파의 모습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비파의 사현(四絃)과 네 가지 인상(nimitta)

 

부처님은 비파의 비유를 들어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정진하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그대는 정진을 조화롭게 확립하고, 능력을 조화롭게 수호하고, 거기서 명상의 인상을 파악하라.”(A6.55)라고 했다. 여기서 거기서 명상의 인상을 파악하라. (Tattha ca nimitta gahāhīti)”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명상의 인상을 파악하라는 것은 다섯 가지 능력이 조화롭게 되면, 거울에 비친 영상 같은 인상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멈춤의 인상, 통찰의 인상, 길의 인상, 경지의 인상을 파악하라는 뜻이다.”(Mrp.III.390)

 

 

명상의 인상은 니밋따 가하(nimitta gahā)를 번역한 것이다. 니밋따는 표상을 말하고, 가하는 붙잡음(grip) 또는 봄(view)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상은 삼매에서 볼 수 있다. 빛을 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오력수행을 하면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려면 거울이 깨끗해야 할 것이다. 마치 거울을 닦듯이 자신의 마음을 닦으면 지혜가 드러날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멈춤의 인상, 통찰의 인상, 길의 인상, 경지의 인상,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했다.

 

수행을 하면 빛을 볼 수 있다. 빛은 마음이 만들어낸 물질이다. 마음이라는 비물질이 빛이라는 물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눈 있는 자가 깨끗하지 않은 거울에서 얼굴의 인상을 보면, 인상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인상을 인지하지 못한다.’라고 거울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거듭해서 닦는다. 거울이 깨끗해지면, 인상은 스스로 분명해진다.”(Vism.18.16)

 

 

인상은 스스로 분명해진다고 했다. 더러운 거울을 닦았을 때 영상이 비치는 것과 같다. 삼매를 닦아 빛을 보았다면 멈춤의 인상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관찰을 하여 지혜가 생겨났다면 통찰의 인상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멈춤과 통찰을 하면 길()의 인상과 경지()의 인상도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드러날 것이다.

 

인상과 관련하여 질문이 있었다. 어떤 인상인지 물어본 것이다. 이에 전재성 선생은 비파의 현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길()의 인상은 길에 대한 현을 말하는 것이다. 길이라는 현을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조율해야 만 길이라는 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주석에서는 네 개의 인상이 있다. 멈춤의 인상, 통찰의 인상, 길의 인상, 경지의 인상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네 가지 인상은 비파의 네 개의 현과 같다고 생각한다. 주석에서는 사현의 비파와 네 가지 표상을 대비하여 설명한 것이라고 본다.

 

여섯 가지 인지가 있는데

 

쏘나는 부처님의 비파의 비유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정진했다. 경에서는 정진을 조화롭게 하고 감각능력을 조화롭게 수호하고, 그렇게 목표를 향해 정진했다.”(A6.55)라고 했다.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정진한 것이다. 그 결과 쏘나는 아라한이 되었다. 이에 쏘나는 여섯 가지 인지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처님에게 말했다.

 

 

그는 멀리 여읨을 인지하고, 멀리 떠남을 인지하고, 분노의 여읨을 인지하고, 갈애의 부숨을 인지하고, 집착의 부숨을 인지하고, 미혹의 여읨을 인지합니다.”(A6.55)

 

 

법수가 여섯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멀리 여읨을 인지가 있다. 이는 ‘nekkhammādhimutto’를 번역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출리에 대한 확신으로 번역했다. 아디뭇또(adhimutto)에 대하여 인지또는 확신으로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아디뭇따는 과거분사형으로‘was intent upon; inclined to’의 뜻이다. 그래서 ‘nekkhammādhimutto’는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남에 기울어져 있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알 수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자신이 알 수 있다. 아라한이 된 쏘나존자는 자신에게 여섯 가지가 사라지거나 부수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1)멀리 여읨의 인지 (nekkhammādhimutto), 2)멀리 떠남의 인지(pavivekādhimutto), 3)분노 여읨의 인지(abyāpajjādhimutto), 4)갈애 부숨의 인지(tahākkhayādhimutto), 5)집착 부숨의 인지(upādānakkhayādhimutto), 6)미혹 여읨의 인지(asammohādhimutto)를 말한다.

 

아라한은 견고하기가 바위산과 같아서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 다시 번뇌가 일어날 수 있을까? 만약 탐욕, 분노, 미혹과 같은 번뇌가 다시 일어난다면 그는 아라한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런가? 번뇌가 다한 자는 토한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아라한에 대한 비유가 있다. 견고하기가 바위산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위산이 균열되지 않고 동굴이 없고 하나로 뭉쳐 있다면”(A6.55)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아라한은 견고하기가 바위산과 같다.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여섯 감각영역으로 설명했다. 시각에 대한 것을 보면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다양한 형상이 시각영역 안에 들어오더라도, 그의 마음은 사로잡히지 않고 그의 마음은 혼란되지 않고 확립되어 동요하지 않고 그것의 소멸을 관찰한다.”(A6.55)라고 되어 있다.

 

 

경에서는 소멸을 관찰하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소멸의 지혜(bhaga ñāna)’에 해당될 것이다. 어떤 지혜인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물질-비물질의 현상을 관찰할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소멸의 지혜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다음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멸의 지혜가 나나탈 때에는 발생이나 유지나 생성이나 인상도 얻지 않고, 단지 부서짐-괴멸-파괴-소멸에 대해서만 새김이 확립된다.”(Vism.21.10)라고 했다.

 

소멸만 관찰되었을 때

 

소멸의 지혜가 나타났을 때 수행이 급진전 된다고 한다. 일어나는 것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소멸만 보일 때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서짐-괴멸-파괴-소멸은 어떻게 관찰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서 무상한 것이라고 관찰한다. 즐거운 것이 아니라서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한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실체가 없는 것(無我)으로 관찰하고, 환희가 아니라서 싫어하여 떠남, 물들지 않아서 사라짐, 발생이 아니라서 소멸, 취득이 아니라서 완전한 버림으로 관찰한다.”(Vism.21.11)

 

 

소멸에 대한 관찰은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관찰하는 것이다. 생성이 있지만 생성에 대한 인상은 보이지 않고 소멸만 관찰되었을 때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수행중에 빛이라는 니밋따를 볼 수 있다. 마음이 만들어 낸 물질인 것이다. 빛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보고 즐기며 앉아 있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나에게 이러한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파괴되기 마련인 것이고,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고, 소멸되기 마련인 것이다.”(Vism.20.126)라며 지혜로써 판별하고 고찰하라고 했다. 이는 추론의 지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은 것도 추론에 대한 앎을 통해서

 

추론에 대한 지혜가 있다. 이를 유지(類智)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안와야냐나라(anvaya ñāa)고 한다. 수반하는 지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소멸의 관찰을 설명할 때 그는 이미 보여진 형상의 영역을 소멸시키는 것과 같이 아직 보이지 않은 것도 추론에 대한 앎을 통해서 소멸시켜 나가게 한다.”(Vism.21.17)라고 설명해 놓았다.

 

하나를 꿰뚫어 알면 다른 것도 꿰뚫어 알 수 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철견하면 나머지 세 가지도 철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이는 형상에 대한 소멸을 관찰하면 비물질인 것의 소멸도 알 수 있다. 어떤 것인가?

 

행선을 하면 발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발은 의도가 있어서 움직인다. 발을 올리고 나아가고 내리고 디딜 때 아는 마음이 있다. 이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한 것이다. 물질은 보이지만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발을 드는 행위는 보이지만 이를 알아차리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행선할 때 발을 드는 행위나 아는 마음은 모두 다 무상하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 ‘대상의 교체라는 것은 물질의 부서짐을 보는 그 마음도 다시 부서지는 것으로 보는데, 그것도 부서짐을 보는 것을 통해서 첫 번째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으로 교체하는 것을 말한다.”(Vism.21.20)라고 설명해 놓았다.

 

물질의 무너짐을 보면서 정신의 무너짐도 본다. 행선할 때 발을 들어 올리면 이전 것은 무너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그러나 올린 발도 곧바로 무너진다. 이를 아는 마음도 무너진다. 그래서 무너짐-소멸-괴멸과 관련하여 이런 게송이 있다.

 

 

존재의 다발은 소멸할 뿐 다른 것은 없다.

존재의 다발의 파괴가 죽음이라 불린다.

방일을 여의는 자는 그것들의 괴멸을 본다.

금강으로 이치에 맞게 보주를 자르는 것과 같다.”(Vism.21.24)

 

 

부처님은 수많은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설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포말의 비유이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S22.9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소멸에 대한 것이다.

 

오온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된다. 그러나 정신-물질을 잘 관찰하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멸만 관찰될 것이다. 특히 느낌에 대해서는 물거품처럼 관찰된다고 했다.

 

비오는 날 빗물 떨어지는 것을 관찰하면 부서지는 것만 보게 된다. 세찬 비가 땅바닥에 떨어질 때 포말과 함께 부서지는 것만 관찰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마치 눈을 지닌 사람이 연못가나 강가에 서서 억수 같은 비가 내려 물의 표면에 커다란 수포들이 생겨나는 즉시 재빨리 부서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Vism.21.27)라고 했다.

 

부서짐을 아는 지혜가 생겨 났을 때 다른 것도 추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물질적 현성을 보고서 정신적 현상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추론의 지혜(anvaya ñāa)’라고 한다. 그래서 아직 보이지 않은 것도 추론에 대한 앎을 통해서 소멸시켜 나가게 한다.”(Vism.21.17)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심해 같고 우주 같아서

 

부처님 가르침의 깊이는 대양의 심해와 같이 깊다. 넓기는 우주보다 더 넓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다. 하나의 경에서 언급되어 있는 구절은 다른 경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주석서에서는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글을 쓸 때 여러 경전과 주석서를 참고한다. 추적해 들어가다 보면 끝없이 전개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항상 무상, , 무아의 가르침으로 귀결된다. 이번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구 번째로 합송했던 쏘나의 경도 그렇다.

 

앙굿따라니까야 법수가 높아질수록 경의 길이도 길어지고 내용도 점차로 심오해지는 것 같다. 후기를 쓰기 위해서 경전을 열어 보지만 단번에 쓸 수가 없다. 마치 고구마 넝쿨처럼 줄줄이 딸려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 저것 참고하여 쓰다 보니 며칠 소요되었다. 몇날 며칠에 걸쳐 쓴 것이다. 쓰다보니 쓰는 맛이 난다. 그런데 글쓰기도 정진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정진해야 할까?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마치 비파의 현을 조율하는 것처럼.

 

 

2022-01-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