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안과 밖이 뒤바뀌는 튜브 뒤집기의 비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 23. 11:49

안과 밖이 뒤바뀌는 튜브 뒤집기의 비유

 

 

일요일 오전이다. 집에 있기 보다 밖으로 나왔다. 늘 가는 아지트, 일터를 말한다. 난방이 되지 않아 춥지만 견딜만 하다. 중앙난방이 되기는 하지만 주말에는 제한적이다.

 

오전 시간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 뭐라도 하나 해야 한다. 밀린 일을 하려 했으나 막혔다. 문의 메일 보내서 결과를 기다려 보아야 한다. 두 시간가량 남았다. 글 하나 나올 수 있는 시간이다.

 

1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두 번째로 독송한 경이 있다. 그것은 앙굿따라니까야 최상의 상태에 대한 경’(A6.83)이다. 교재 제목은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원리는 무엇인가?’로 되어 있다. 한페이지도 안되는 매우 짤막한 경이다. 법수가 여섯이므로 여섯 법수로 이루어져 있다. 핵심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믿음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고, 게으르고, 지혜가 없고, 몸과 목숨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원리를 갖추 수행승은 최상의 상태인 경지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A6.83)

 

 

여섯 개의 법수를 보면 익숙한 것이 있다. 그것은 믿음, 부끄러움, 창피함, 정진, 지혜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 다섯 가지를 무형의 재물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하나가 더 있다. 몸과 마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 법은 아라한이 되는데 있어서 필수조건이다. 그래서 이 여섯 가지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재성 선생은 여섯 가지 법수에 대하여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먼저 믿음에 대한 것을 보면 삼보에 대한 믿음과 인과원리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니까야에도 나와 있는 말이다.

 

불교적 믿음은 어떤 것일까? 유일신종교라면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믿음은 다름아닌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공동체를 믿는 것이다. 니까야에서는 이런 구절이 도처에 보인다. 그런데 어느 경에서는 하나 더 추가하여 업보의 믿음도 믿음이라고 했다.

 

업보의 믿음도 믿음의 범주속에 속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이제까지 불교인들은 삼보에 대한 믿음만을 생각했으나 삼보의 믿음과 함께 업보의 믿음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 그런가? 업보의 믿음은 연기법의 믿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믿음은 정견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M117) 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정견은 사성제와 업보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

 

 

여기서 번뇌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번뇌에 물든 정견이 있고 번뇌에 물들지 않은 정견이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업자성정견을 말하고 후자는 사성제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이는 전자에 대하여 세속적 정견이라고 말하고 후자에 대하여 출세간적 정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업자성정견 (kammassakata-sammādiṭṭhi)은 업이 자신의 주인을 반조하는 것이다. 선한 행위이든 악한 행위이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말한다. 이는 윤회하는 삶속에서 정견에 해당된다. 그래서 세속적 정견이라고 한다.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를 말한다. 이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윤회하는 삶을 끝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출세간적 정견이라고 한다.

 

팔정도의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팔정도 수행은 윤회를 끝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출세간적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윤회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중생들은 공덕짓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선업공덕을 말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과 같은 공덕을 말한다.

 

공덕은 번뇌가 있는 삶의 방식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라고 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아는 업자성정견을 말한다.

 

업과 업보의 가르침은 과거 출현하였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는 인과법으로서 다름 아닌 연기법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했다.

 

전재성 선생은 믿음에 대하여 삼보에 대한 믿음과 인과의 원리에 대한 믿음 이렇게 두 가지 믿음이 있다고 했다. 삼보에 대한 믿음과 함께 업자성정견에 대한 믿음도 믿음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니까야에 근거한다. 슬쩍 지나가듯이 한마디 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길게 풀어 써 본다.

 

여섯 번째 법수는 몸과 목숨의 집착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몸과 목숨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핵심어는 걱정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걱정은 관념에 의해서 일어납니다.”라고 말했다.

 

걱정은 관념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걱정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단지 머리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자아와 동일시하면 낫에 잘린 갈대처럼 시들어 갈 것이다.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번뇌에 해당된다. 이는 버려야 할 것이다. 걱정도 버려야 할 것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과 목숨에 대해서 걱정한다면 거룩한 경지, 즉 아라한의 경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몸과 목숨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은 몸과 목숨을 자신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념이 있는 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고 윤회에서 탈출할 수 없다. 당연히 아라한이 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안과 밖이 뒤바뀌는 튜브  뒤집기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여기 자동차 바퀴의 튜브가 있다. 그런데 튜브에는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이다. 안은 자신에 대한 것이다. 밖은 우주에 대한 것이다. 몸과 목숨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튜브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커다란 인간 아메바와 같다고 했다.

 

곤충은 촉수가 있다. 촉수를 이용하여 생존하는 것이다. 아메바도 촉수가 있어서 생존한다. 인간아메바 역시 촉수가 있어서 대상과 접촉하여 생존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몸과 목숨을 자신의 것으로 볼 것이다. 인간이나 아메바나 살아 가는 방식은 같은 것이다.

 

몸과 목숨을 버려야 한다. 자살하라는 것이 아니다. 인식의 전환을 이루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자동차 튜브를 뒤집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했을 경우 안에 있는 것이 바깥으로 나가고, 바깥에 있는 것이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이다. 내가 우주가 되고 우주가 되는 것이다. 천지가 뒤바뀌는 대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튜브이야기는 지난 6년동안 몇 차례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공감한다.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흔히 깨달으면 땅과 하늘이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한 비유 같다.

 

사람들은 몸과 목숨에 대하여 걱정한다. 자신의 몸을 끔찍히도 사랑해서 몸에 상처하나만 생겨도 어쩔 줄 몰라 한다. 얼굴에 잡티가 하나 생겨도 신경 쓰이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목숨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몸과 목숨에 대해서 걱정한다고 했다. 여기서 걱정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사뻬카(sāpekha)를 번역한 말이다.

 

빠알리어 사뻬카는 ‘hopeful; expecting; longing for’의 뜻이다. 기대의 뜻이 강하다. KPTS에서는 걱정으로 번역했다. 이는 문맥에 따른 것이다. 주석에서는 갈애를 가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을 보면 애착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몸과 생명에 대해 애착이 있다.”라고하여 주석적으로 번역했다.

 

전재성 선생 이야기를 6년동안 듣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해설을 하면 받아 적기에 바쁘다. 받아 적은 노트가 열 권이 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모두 글로 쓴 것은 아니다. 두 시간 동안 말한 것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몇 개만 글로서 표현한다.

 

전재성 선생이 설명한 튜브뒤집기 비유는 여러 번 들어 보았다. 이번에 글로 옮기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마치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깨달음 이야기를 튜브뒤집기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가고 밖에 있던 것이 안에 들어왔을 때 튜브뒤집기가 된다. 깨달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몸과 목숨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할 것이다. 몸과 목숨에 대하여 눈곱만큼이라도 집착이 있다면 뒤집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튜브 안에 있는 것은 자기를 말한다. 튜브 밖에 있는 것은 우주를 말한다. 자기를 죽여야 뒤집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점이 되면 우주가 점안에 다 들어오게 되어 있다고 한다. 튜브가 뒤집한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나는 튜브뒤집기를 할 수 있을까?

 

 

2022-01-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