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육무간업 중에 최악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 27. 12:24

육무간업 중에 최악은?

 

 

오늘 아침 음악을 들으며 경행했다. 이미우이 음악이 일터에 울려 퍼졌다.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다. 음악을 들으며 카페트 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경에서 무간업에 대한 것이 있었는데 보배경에 언급된 육무간업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숫따니빠따를 열어 보았다. 틀림없이 맞았다. 라따나경(보배경)을 외우고 있었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것이다. 확인을 하고 나니 약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부처님 가르침은 전니까야에 걸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니까야에서는 간략하게 설명된 것이 타 니까야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식이다. 이로서 니까야가 부처님의 원음이라는 확신이 더 들게 되었다.

 

20211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네 번째의 경이 있다. 교재에서는 견해를 성취한 자에게 불가능한 인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불가능한 경우의 경(Dutiyaabhabbaṭṭhānasutta)’(A6.93)에 해당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형성된 것은 어떤 것이든 경이라고 되어 있다. 경의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원문을 찾아보니 ‘abhabbaṭṭhāna’라고 되어 있다. 이는 빠일리어 아밥바따(abhabbatā) ‘inability; impossibility’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불가능한 경우의 경이라고 했을 것이다.

 

견해를 성취한 자는

 

견해를 성취한 자는 예류도를 성취한 자에 해당된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여섯 가지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견해를 성취한 사람이 조건지어진 것은 어떠한 것이든 영원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견해를 성취한 사람이 조건지어진 것은 어떠한 것이든 행복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견해를 성취한 사람이 조건지어진 것은 어떠한 것이든 실체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견해를 성취한 사람이 무간업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고, 견해를 성취한 사람이 미신적 의례로 청정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견해를 성취한 사람이 여기의 밖에서 보시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A6.93)

 

 

부처님은 육불능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는 상, , 아라는 견해를 갖는 것과 무간업을 짓는 것, 미신과 이교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것을 말한다. 견해를 성취한 자라면 이와 같은 여섯 가지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영어로는 ‘impossibility’가 될 것이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을까?

 

불가능을 뜻하는 아밥바따(abhabbatā)

 

불가능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아밥바따(abhabbatā)이다. 이 말은 익숙하다. 라따나경(보배경: Sn.2.1))을 외웠기 때문이다. 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Kiñcāpi so kamma karoti pāpaka
K
āyena vācā uda cetasā vā
Abhabbo so tassa pa
icchādāya
Abhabbat
ā diṭṭhapadassa vuttā,

Idampi sag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감추지 못하니,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2)

 

 

게송에서 아밥바따(abhabbatā)라는 말이 나온다.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 즉 예류도를 성취한 자가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감추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여기서 사소한 잘못은 무엇을 말할까? 사악도 떨어질 만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전재성 선생은 사소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무간업 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밥바따(abhabbatā)에 대하여 어떻게 번역했을까? 확인해 보니 있을 수 없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절대 불가능함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예전으로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음을 말한다.

 

자칭타칭 깨달은 사람이 있다. 그가 깨달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에게 얼마나 탐욕이 남아 있는지, 그에게 얼마나 분노가 남아 있는지로 아는 것이다. 깨달았다는 사람이 욕망으로 가득하고 분노로 가득하다면 깨닫지 않은 자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깨달은 자는 탐, , 치가 소멸되어서 무탐, 무진, 무치의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토한 음식을 삼킬 수 없는 것과 같다.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

 

 

이 세상에서 토한 음식을 삼킬 수 있을까?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탐, 무진, 무치의 성자는 토해서 버려진 음식을 다시 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불가능을 뜻하는 아밥바따(abhabbatā)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육불능(六不能)에 대하여

 

견해를 성취한 자에게 육불능이 있다. , , , 무간업, 미신, 사견을 말한다. 이 중에 무간업이 있다. 견해를 성취한 성자는 무간업을 짓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가르침이 숫따니빠따 라따나 경 게송에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Tayassu dhamm
ā jahitā bhavanti,
Sakk
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S
īlabbata vāpi yadatthi kiñci,
Cat
ūhapāyehi ca vippamutto
Cha c
ābhihānāni abhabbo kātu
Idampi sa
g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1)

 

 

이 게송은 빠알리어로 외웠기 때문에 매우 익숙하다. 그리고 매일 일터로 갈 때 차안에서 듣기 때문에 더욱더 익숙하다. 이미우이의 라따나경을 따라부를 때가 있는데 이 게송도 좋아하는 게송 중의 하나이다.

 

게송에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Cha cābhihānāni abhabbo kātu)”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도 불가능을 뜻하는 아밥보 (abhabbo)라는 말이 나온다. 이 빠알리어는 영어로 ‘impossible’의 뜻이다. 왜 그런가? 앞 구절에 답이 있다. 유신견(Sakkāyadiṭṭhi)과 의심(vicikiccha)과 계금취견(Sīlabbata)이 타파된 자에게 육무간업을 짓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육무간업은 어떤 것일까?

 

게송에 따르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네 가지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여섯 가지 죄악을 짓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네 가지 악한 운명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사악처에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여섯 가지 죄악은 육무간업을 말한다.

 

육무간업은 어떤 것일까? 이는 1)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2)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3) 아라한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4)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여래의 피를 흘리게 한 경우, 5) 승가를 분열시키는 경우, 6) 견고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하나는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하나는 육무간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으면 사악처에 떨어질 수 있고 육무간업 지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제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계를 철저하게 지켜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않는 한 악처에 떨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고 육무간업을 짓지 않는다는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하루빨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 같다.

 

한국의 불교인들은 오무간업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육무간업을 말한다. 오무간업에 사견이 하나 더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그는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그는 ‘보통의 일반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M115)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육무간업의 근거가 되는 경은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M115)에 실려 있다. 경에서는 부모 살해, 아라한 살해,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 그리고 승가를 분열하게 하는 것과 함께 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에 대하여 육무간업이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앙굿따라니까야 견해를 성취한 사람이 여기의 밖에서 보시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A6.93)라고 하여 사견이 육무간업에 해당되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또한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에서는 여섯 가지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Stn.231)라고 하여 역시 사견이 육무간업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이처럼 모든 니까야에 있는 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후대 편집되었거나 창작되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육무간업의 과보는?

 

육무간업의 과보는 어떤 것일까? 무간업을 지었기 때문에 무간과보를 받을 것이다. 기간은 어떠할까? 이에 대하여 파옥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을 보면 차별적이다. 책을 보면, 어머니살해, 아버지살해, 아라한살해, 부처님상해의 업은 “한겁이 끝나기 전에 업이 소멸되어 지옥에서 나온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승가분열업은 기간은 어떠할까?

 

데바닷따는 부처님에게 상해를 입히고 승가를 분열시켰다. 승가를 분열시킨 무간업의 과보는 앙굿따라니까야와 율장에 표현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아난다의 경에 따르면 일 겁을 지속하는 죄과를 받는다.(A10.39)라고 했다. 율장 소품에서는 “데바닷따여, 그만 두어라. 참모임의 파괴를 기뻐하지 말라. 데바닷따여, 참모임의 분열은 엄중한 것이다. 데바닷따여, 조화로운 참모임을 파괴하면, 한우주기 동안 지탱하는 죄과를 낳고, 한우주기 동안 지옥에서 삶아진다.(율장소품, Vin.II.198)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견을 가진 자의 무간업은 어떠한 것일까?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등 견고한 사견을 가진 자의 무간업은 매우 무겁다. 앞서 언급된 오무간업 보다 훨씬 더 중하다. 왜 그런가? 이는 기간으로 알 수 있다. 사견에 따른 무간업은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한겁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업의 잠재력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한, 심지어 세상의 시스템이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업과 윤회의 법칙, 346)고 했다.

 

육무간업을 지은 자들은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그곳에서 일겁 이내에 빠져나오는 자도 있고, 일겁을 채우고 빠져나오는 자도 있고, 일겁이 지나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도 있다. 사견을 지닌 자들은 일겁이 지나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견이야말로 최악의 무간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무간지옥은 어떤 곳일까?

 

사이지옥(lokantarikā)

 

니까야에는 무간지옥에 대한 설명이 있다. 경전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니까야 도처에 있는 것이다. 어떤 곳일까? 상윳따니까야 ‘암흑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덮게도 없고 바닥도 없는 캄캄한 칠흑 같은 암흑에 둘러싸여 이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힘과 이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능력이 있는 해와 달의 빛이 비추지 못하는 지옥이 있다.(S56.46)라고 했다.

 

 

니까야에 묘사된 무간지옥을 사이지옥이라고도 말한다. 왜 사이지옥(lokantarikā)인가? 그것은 시스템과 시스템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와 세계 사이에 끼여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빛이 들어 가지 않는다. 일종의 빛의 사각지대와도 같다. 그러나 빛이 비칠 때가 있다.

 

사이지옥에도 빛 들 날 있다. 네 가지 케이스가 이에 해당된다. 보살이 입태했을 때, 보살이 태어났을 때, 부처님이 무상정득각을 이루었을 때, 그리고 최초로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이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아주놀라움의 경’(A4.127)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보살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완전히 깨달았을 때에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측량할 수 없는 광희로운 빛이 출현한다. 무시무시하고 바닥이 없고 암흑으로 덮여있고 칠흑같이 어두운 사이지옥에는 큰 신력과 큰 위력을 지닌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는데 , 그곳에도 측량할 수 없는 광희로운 빛이 출현한다. 그곳에 태어난 뭇삶들은 그 빛으로 서로를 알아보고여기에 태어난 다른 뭇삶들도 있구나!’라고 부르짓는다.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완전히 깨달은 님이 출현할 때에 이와 같은 세 번째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이 출현한다.(A4.127)

 

 

경에 따르면 부처의 출현은 경천동지할 일이다. 그래서 니까야에서는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측량할 수 없는 빛이 우주 구석구석 비추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태어나서 한번도 빛이라고는 보지 못한 사이지옥 중생들도 그제서야 빛을 보게 된다. 상대방을 얼굴을 보고서 여기에 태어난 다른 뭇삶들도 있구나!”라며 부르짓는다는 것이다.

 

육무간업 중에 최악은 사견(邪見)

 

육무간업 중에 최악은 사견이다. 그러나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와 같은 견고한 사견을 가진 자도 임종 직전에 사견을 버리면 무간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죽음 직전까지 견고한 사견을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사견을 버리면 무간업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 오무간업 또는 오역죄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2022-01-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