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섯 가지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올해 첫 금요니까야모임이 1월 14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열렸다. 이날 새로 오신 분이 두 분 있었다. 송인귀선생과 윤성모선생이다. 김우헌선생은 6년만에 나왔다. 홍제동 시절 함께 했었다. 그때 2016년 홍제동 전재성 선생 아파트 거실에서 모임이 있었을 때를 말한다.
이번 모임에서는 무려 다섯 개의 경을 합송했다. 짤막짤막한 경이기 때문이다. 앙굿따라니까야 거룩한 님의 품(Arahattavagga)에 있는 경들이다. 주로 여섯 가지 원리에 대한 것이다. 이를 나열해 보면 지옥의 경(A6.81), 최상의 상태에 대한 경(A6.83), 끊어버리지 못함의 경(A6.89), 불가능한 경우의 경(A6.93)이다.
일찍 도착했다. 일찍 도착해서 자리정리를 해야 한다. 올 사람들을 위하여 차도 준비해야 한다. 준비가 끝나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전재성 선생으로부터 빠알리 발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알파벳 브이(V)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vipassana’에 대하여 위빠사나라고 발음한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뷔빠사나가 맞다고 한다. 이는 아랫입술과 윗이빨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빠알리어 ‘viññāṇa’도 윈냐나가 아니라 뷘냐나가 맞다고 한다. 무엇보다 자음과 모음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빠알리 발음은 자음과 모음이 번갈아 가며 진행된다. 그런데 Vi를 ‘위’로 발음하면 자음과 모음의 법칙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Vipa 가 모음(W)+모음(I)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뷔’로 발음하면 자음+모음이 되어서 맞다고 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는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 자음과 자음이 겹치기 때문에 V를 모음화 하여 W발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보디삿뜨와’라고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음이 두 번 겹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요즘 빠일리 경을 암송하고 있다. 최근에는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외웠다. 빠일리어 원문으로 외운 것이다. 모두 1543자에 달한다. 외우면서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V발음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말 발음에는 V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W로 발음한다. 그결과 이상한 발음구조가 되어 버렸다. 베단타를 웨단타로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죽림정사를 뜻하는 ‘Veluvana’에 대하여 웰루와나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식 표기방식에 따르면 벨루바나가 된다. 자음과 모음이 교대로 되게 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을 보면 V에 대하여 철저하게 W로 발음한다. 아마 이것은 미얀마불교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V를 W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등 구미 권에서는 V와 가깝게 발음한다. 그래서 수행승을 부를 때 ‘bhikkhave’에 대하여 ‘빅카웨’라고 하지 않고‘빅카붸’라고 하는 식이다.
한국에서는 V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 W음이 나는 것으로 발음한다. 그러나 이는 자음+모음의 법칙에 어긋난다. 자음+자음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느 것이 우세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발음은 자음+모음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주어진 두 시간은 길지 않다. 경을 합송하고 해설을 듣고 토론하다 보면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두 시간 모임을 위해서 세 시간 잡고 왔다. 오가는데 네 시간 이상 소요된다. 귀중한 시간에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 경을 합송했다. 경은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대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했다. 그 여섯 가지 원리는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 거짓말을 하는 것, 악한 의도를 가지는 것, 잘못된 견해를 지니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A6.81)
앙굿따라니까야 ‘지옥의 경(Paṭhamanirayasutta)’(A6.81)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음, 망어, 악의, 사견을 가져도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라는 표현을 했다.
전재성 선생은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라는 말을 설명했다. 이에 대하여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살생했다고 하여 모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어느 수행승이 아기를 죽인 사건을 들었다.
율장에 따르면 어느 수행승이 탁발 나갔다. 어느 집에 들어 갔는데 의자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의자에는 갓난 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행승은 이를 모르고 앉았다. 그 결과 아기가 죽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어라고 말씀 하셨을까?
부처님의 의도가 실리지 않은 살생은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율장에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빠띠목카에는 수많은 예외 조항이 있다고 한다.
흔히 예외없는 조항은 없다고 말한다. 율장도 마찬가지이다. 율장에는 수많은 예외 조항이 있기 때문에 오계를 어긴다고 하여 모두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의도가 실렸을 때 죄가 된다. 법구경 1번 게송 인연담 ‘짝꾸빨라 장로 이야기(cakkhupālattheravatthu)’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짝꾸빨라 장로는 용맹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러나 눈을 잃었다. 이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전생의 과보로 설명하고 있다.
어느 날 장로가 경행하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다. 이에 대하여 악의를 가진 수행들이 부처님에게 보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그들이 그 장로가 벌레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는지 물어보았다. 누구도 본 사람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이 죽이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 또한 살아 있는 곤충들을 보지 못했다. 그 밖에 그 수행승은 이미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으므로 의도적으로 살생한 것이 아니니까 그에게 허물이 없다.”(DhpA.I.3-35)
부처님은 짝꾸빨라 장로에게 무죄를 선언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아라한은 살생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정적으로는 의도가 실리지 않은 살생은 죄로 보지 않은 것이다.
짝꾸빨라 장로는 눈이 먼 장님이 되었다. 경행 중에 개미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미를 죽였다고 하여 악의를 품은 수행승들이 모함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면 살생을 할 수가 없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에서 해방된 자이다. 아라한은 남아 있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의도 자체가 없다. 그래서 살생이 불가능한 것이다. 조금도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아라한의 지위를 얻었으므로 의도적으로 살생한 것이 아니니까 그에게 허물이 없다.”(DhpA.I.3-35)라며 무죄를 선언한 것이다.
인연담과 별도로 이야기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신통에 대한 것이다. 아라한이 된자는 신통도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럴 경우 경행을 해도 발바닥이 땅바닥에 닿지 않을 것이다. 짝꾸빨라가 경행을 했을 때 신통으로 걸었다면 개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우기철에 벌레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안거철에는 유행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동중에 벌레를 밟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통이 있는 아라한들은 발을 땅바닥에 대지 않고 걸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했기 때문에 벌레를 죽일 수 없음을 말한다.
짝꾸빨라 장로는 모함을 받은 것 같다. 개미가 죽은 것을 보고서는 장님이 된 자의 소행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장로는 아라한으로서 신통까지 갖추었을 것이다. 몸이 깃털처럼 가볍기 때문에 벌레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벌레를 죽일 의도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악의를 품은 수행승들에게 “그 장로가 벌레들을 죽이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라며 물어본 것이다.
여섯 가지 죄를 짓는다고 하여 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도가 실려야 유죄가 성립된다. 그래서 율장에서는 수많은 예외조항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A6.81)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살생(pāṇātipāti), 도둑질(adinnādāyī), 사음(kāmesumicchācārī), 거짓말(musāvādī), 악한 의도(pāpiccho),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에 대하여 여섯 가지 원리라고 했다. 아라한에게는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원리가 적용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이와 같은 여섯 가지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토한 음식을 삼킬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이다.
일반사람들에게는 여섯 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그래서 “여섯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 (chahi dhammehi samannāgato yathāb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A6.81)라고 했다. 여기서 원리는 담마(dhamma)를 말한다.
담마는 수많은 말로 해석된다. 진리, 가르침, 원리, 법 등으로 번역된다. 심지어 ‘것’으로 번역되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실제로 ‘것’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가르침에 대하여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고,..”(S11.3)라고 시작되는 법수념을 말한다. 이처럼 담마는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런데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서는 일률적으로 법(法)이라고 번역했다.
살생, 도둑질 등 여섯 가지 원리는 지옥으로 이끈다. 이에 대하여 KPTS에서는 “dhammehi samannāgato yathābhataṃ nikkhitto”에 대하여 “원리가 작용되는 대로”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어떻게 번역해 놓았을까? 찾아보니 “마치 누가 데려다 놓은 것처럼”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그래서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데려다 놓은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A6.81)라고 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두 가지 니까야 번역서를 가지고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과 초기불전연구원본을 말한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비교하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두 종류의 번역서는 서로 장단점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두 종류의 번역서를 모두 갖추는 것이다. 그래서 비교해 보면서 읽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2022-01-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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