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적 의심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심란할 때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어느 것이든지 좋다. 경전을 펼치는 순간 심란했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내 평온한 마음이 된다. 지금 당장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를 열어 보면 체험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합송한 경이 있는데
1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세 번째로 합송한 경이 있다. 교재에는 ‘견해를 성취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끊어버리지 못함의 경’(A6.89)을 말한다.
무엇을 끊어 버리지 못함일까? 경에서는 여섯 가지 원리를 끊어버리지 못하면 견해의 성취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괴로운 곳으로 이끄는 탐욕, 괴로운 곳으로 이끄는 분노, 괴로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원리를 끊어버리지 못하면, 견해의 성취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A6.89)
여섯 가지 법수를 보면 견해, 의심, 계금취, 탐, 진, 치에 대한 것이다. 이 중에서 첫번째 개체가 있다는 견해가 핵심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有身見)을 말한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이다.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를 끊어 버리라고 했다. 이를 견해의 성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견해의 성취를 뜻하는 빠알리어 딧티삼빠다(diṭṭhisampada)는 주석에 따르면 ‘흐름의 길에 듦’을 의미한다고 했다. 예류도를 말한다.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분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 장미꽃이 있을 때 장미꽃은 장미꽃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무수한 사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존재한 것임을 말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옛날부터 무수한 사람들이 질문해 왔다. 그런 나는 누구일까? 부처님은 이를 분석적으로 설명했다. 오온으로 해체하여 설명한 것이다. 또한 십이처로 설명했다. 이렇게 분석적으로 보았을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는 무수한 생멸이 있다. 몸 안에서는 신진대사가 일어난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게 되는데, 그 밥이 우리 몸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장기를 만들어 낸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음식은 열번이나 열두번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단계를 거칠 때 마다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변화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내가 신진대사를 콘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성하여 유지하다가 소멸해 간다.
마음은 더욱더 나의 것이 아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생각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다. 대상을 보았을 때도 마음이 생겨난다. 마음은 나의 통제 밖에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고 했다. 또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했다.
몸과 마음은 내것이 아니다. 이는 몸과 마음이 나의 통제권 밖에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까야띳티,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빨간 물감의 비유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여기면 괴로움의 시작이다. 몸이 늙어 가는 것도 괴로움이다. 그러나 내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슬퍼할 것 없다. 근심과 걱정도 내것이고 슬픔도 내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근심, 걱정, 슬픔은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면 근심할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다.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따른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나라는 존재는 눈으로 보이는 존재만을 뜻하지 않는다. 여러가지 사건과 사건이 결합되어서 나라는 존재가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빨간 물감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나는 방안에서 호흡을 하고 있다. 그런데 호흡기에 물감을 타 놓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방안 가든 빨간 물감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건과 사건이 결합하여 나는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이를 연기적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기적 존재는 조건 발생하는 존재임을 말한다. 무수한 조건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그런데 조건 발생하는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하게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이와 같은 연기적 존재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다름아닌 무아이다. 그래서 “나는 연기적 존재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 회의적 의심이라고 했을까?
회의적 의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라고 했다. 여기서 회의적 의심이라고 한 것은 빠알리어 비찌낏차(vicikicch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영어로 ‘doubt; uncertainty’의 뜻이다.
비찌낏차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을 보면 ‘의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서는 ‘회의적 의심’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선불교의 분심과 구별하기 위해서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선종에서 대분심은 분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든다. 여기서 화두를 든다는 것은 작은 의심으로 큰 의심을 타파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독을 독으로서 제독하는 것과 같다. 화두라는 작은 의심으로 큰 의심을 부수어 깨달음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도 있다. 독을 잘못 다르면 위험이 있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의심을 의심으로서 부수는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 마치 걱정을 걱정함으로써 걱정을 없애는 것과 같고, 쾌락을 쾌락으로 없애는 것과 같다. 술을 끊기 위해서 술을 죽을 정도로 마셔서 끊는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의심을 끊으라고 했다. 이는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끊으라는 것이다.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은 비찌낏차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 十二緣起)를 보면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정리해 놓았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의심이다.
둘째,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다.
셋째, 승가에 대한 의심이다.
넷째, 수행에 대한 의심이다.
다섯째, 과거에 대한 의심이다.
여섯째, 미래에 대한 의심이다.
일곱째, 과거와 미래 모두에 대한 의심이다.
여덟째,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
이것이 의심이다. 이를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라고도 하고 회의적 의심이라고 한다.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적이라면 삼보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수행에 대한 의심도 하게 될 것이다.
수행에 대한 의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계를 지키고 관찰하는 수행은 더 높은 영적인 진보에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는 데 과연 그럴까?”하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열반을 예로 들 수 있다.
새내기 수행승 방기싸는 어느 날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친교사가 죽었는데 이에 대하여 “우리의 친교사는 정말로 완전한 열반에 드신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 완전한 열반에 드시지 않은 것일까?”(Sn2.12)라며 의문한 것이다. 열반을 체험해 보지 않았다면 한번쯤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니까야를 의심하는 사람들
한번 의심이 일어나면 좀처럼 가라 앉히기 힘들다. 인터넷에서 어떤 이는 초기경전에 대해서 의심한다. 전승되어 오는 니까야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 방대한 경전을 부처님이 설하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후대 누군가 삽입하는 등 편집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초기경전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초기불교에 대하여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자신이 따르는 전통의 불교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기존 것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많다.
어느 철학과 교수는 자신의 중도체계론을 말하기 위해서 기존 전승되어 온 논장을 모조리 부정한다. 왜 그럴까? 자신의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되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니까야에 대하여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니까야가가 후대 편집되었다는 식으로 부정한다.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발주자의 것을 부정해야 한다. 상대의 것을 부정해야 자신의 것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 선거철에 보는 네거티브전략같은 것이다.
니까야가 편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 니까야가 조작되었다는 사람이 있다. 스님도 있고 학자도 있고 재가불자도 있다. 이는 다름아닌 의심에 해당된다. 이를 가르침에 대한 의심, 즉 회의적 의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디.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있는 한 예류도에 들어 갈 수 없다. 견해의 성취를 이루기 어려움을 말한다. 그런데 가르침에 대한 의심은 결국 연기법에 대한 의심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삼보에 대한 의심으로 귀결된다. 불교처럼 보이지만 무늬만 불교인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견해를 성취한다는 것은
견해를 성취하는 것은 여섯 가지 견해를 끊어 버림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ṃ), 회의적 의심(vicikicchaṃ0,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ṃ), 괴로운 곳으로 이끄는 탐욕(apāyagamanīyaṃ rāgaṃ), 괴로운 곳으로 이끄는 분노(apāyagamanīyaṃ dosaṃ), 괴로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apāyagamanīyaṃ mohaṃ)라고 했다.
여섯 가지 중에서 전반부 세 가지, 즉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을 끊어 버리면 성자의 흐름, 예류도에 들어 간다. 후반부 세 가지, 즉 탐, 진, 치는 단계적으로 소멸된다. 그래서 예류도의 단계를 견도라고 한다.
탐욕과 성냄은 사다함 단계에서 옅어지고, 아나함 단계에서 끊어진다. 그래서 사다함과 아나함 단계를 수행도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음은 아라한 단계에서 끊어진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 이를 무학도라고 한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섯 가지를 모두 끊었을 때 거룩한 경지, 아라한이 된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끊어짐에서 시발점은 유신견을 타파하는 것이다. 개체가 있다는 견해,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갖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해의 성취를 흐름에 듦의 길, 예류도라고 했을 것이다.
2022-01-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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