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평가자가 되지 말라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16. 17:35

평가자가 되지 말라

 

 

코로나가 극성이다. 오랜만에 대면 모임 가졌으나 다시 줌모임으로 전환한 곳이 많다. 금요니까야모임은 대면모임을 지속하기로 했다. 물론 마스크를 쓰는 등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지킨다.

 

12월 첫번째 대면모임이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거리가 멀고 바빠서 그런지 참석자는 많지 않다. 강제성은 없다. 여건이 되면 참석하는 것이고 여건이 되지 않으면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김경예 선생이 처음 대면모임에 나왔다. 줌에서만 보다가 처음 오프에서 보니 느낌이 다르다. 화면으로만 대하는 것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보다도 더 크다. 화면에서 분위기와 현장에서 분위기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의심하는 재가의 여신도

 

이번 모임에서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첫번째 경은 사람의 다양성과 그 다양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가?’라는 타이틀의 경이다. 앙굿따라니까야 미가쌀라의 경’(A6.44)이 그것이다.

 

경의 길이는 꽤 길다. 모두 여덟 페이지에 달한다. 법수가 늘어남에 따라 경의 길이도 길어지는 것 같다. 또한 내용도 난해하다. 미가쌀라의 경도 그렇다.

 

경은 평가에 대한 것이다. 함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다. 특히 범부가 성자를 평가할 수 없다.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도 그랬다. 미가쌀라는 자신의 집에 탁발나온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존자 아난다여, 세존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청정한 삶을 산 사람과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산 사람이 모두 미래 동일한 운명을 받는 것입니까?”(A6.44)

 

 

미가쌀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다. 청정한 삶을 산 자는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산 자보다 탁월한 운명을 받아야 함을 말한다. 이는 자신의 아버지와 삼촌을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

 

미가쌀라의 아버지 뿌라나는 청정한 삶을 살았다. 이는 계율을 잘 지키고 살았음을 말한다. 그러나 삼촌 이씨닷따는 그다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았다. 주석에 따르면 아버지는 예류자(수다원)였고, 삼촌은 일래자(사다함)였다. 그런데 청정한 삶을 산 자보다도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산 자가 오히려 과위가 한단계 높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죽었을 때 모두 일래자로 죽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섯 가지 다양성이 있는데

 

아난다는 탁발에서 들은 이야기를 부처님에게 전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 어리석고, 슬기롭지 못하고, 아낙의 지혜를 지닌 어리석은 여자는 누구인가?”라며 말했다.

 

미가쌀라는 왜 어리석은 여인인가? 이는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사람의 다양성에 대하여 어떠한 앎을 지니고 있는가?(ke ca purisapuggalaparopariyañāe)”라며 묻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람의 다양성이란 무엇일까? 이는 사람마다 다른 특성이 있음을 말한다. 예리한 사람도 있고 둔감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람의 다양성을 아는 지혜를 가진 자는 부처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범부의 여인이 성자의 지위에 있는 자를 평가할 수 없다. 이는 다양성의 지혜(paropariyañāa)’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섯 가지 사람의 다양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온화(O), 행복(O), 원만(O), 배움(X), 성취(X), 바른 견해(X), 해탈(X)

2) 온화(O), 행복(O), 원만(O), 배움(O), 성취(O), 바른 견해(O), 해탈(O)

3) 분노(O), 자만(O), 탐욕(O), 배움(X), 성취(X), 바른 견해(X), 해탈(X)

4) 분노(O), 자만(O), 탐욕(O), 배움(O), 성취(O), 바른 견해(O), 해탈(O)

5) 분노(O), 자만(O), 언어(O), 배움(X), 성취(X), 바른 견해(X), 해탈(X)

6) 분노(O), 자만(O), 언어(O), 배움(O), 성취(O), 바른 견해(O), 해탈(O)

 

 

경에서는 여섯 가지 경우의 수가 소개되어 있다. 이는 법수가 여섯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름의 경이 열 번째 법수에도 있다. 앙굿따라니까야미가쌀라의 경(A10.75)’을 말한다. 법수가 열이므로 열 가지 경우의 수가 표현되어 있다.

 

번뇌가 있어도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는 것은

 

여섯 가지 경우의 수를 보면 바른견해와 해탈로 알 수 있다. 선법과 불선법은 문제되지 않는다. 3번항을 보면 분노, 자만, 탐욕이 있는 자라도 바른 견해를 가지면 해탈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아난다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분노와 자만을 갖고 자주 탐욕의 상태를 일으키더라도, 그에게 들은 바가 있고, 많이 배워 이룬 것이 있고, 바른 견해로 잘 관통하는 것이 있고, 일시적인 해탈의 성취가 있다면, 아난다여, 그 사람은 저 앞 사람에 비해 보다 훌륭하고 보다 탁월하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진리의 흐름이 이 사람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탁월한 곳에 이르지 저열한 곳에 이르지 않으므로, 탁월한 곳에 가는 자이지 저열한 곳에 가는 자가 아니다.”(A6.44)

 

 

분노와 자만과 탐욕은 불선법이다. 이와 같은 불선법이 남아 있는 자도 잘 배우고 성취한 것이 있고 무엇보다 바른 견해로 일시적 해탈을 이루었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했다. 불선법이 남아 있다고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범부는 성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범부는 일시적인 해탈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그가 비록 분노, 탐욕, 자만이 있어도 배움이 있고 정견이 있고, 더구나 일시적으로라도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면 범부의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성자의 마음 상태를 범부는 알 수 없다.

 

예류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자에게도 번뇌가 있다. 예류자의 경우 탐욕과 성냄과 자만 등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강한 것은 아니다. 일래자의 경우 탐욕과 성냄은 예류자 보다는 약화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번뇌가 악처에 떨어질 정도는 아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남아 있는 번뇌는 무척 적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상윳따니까야 손톱 끝의 경’(S56.51)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라며 물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성자의 흐름에 든 자의 번뇌에 대하여 손톱 끝에 있는 티끌만큼 아주 적고 아주 작은 것이라고 했다. 이를 수미산과 비교하였다. 그래서 올바른 견해를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꿰뚫음에 도달한 고귀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S56.51)라고 했다.

 

분노와 자만과 탐욕과 같은 불선법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기 이전 까지는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많지 않다. 그리고 강하지도 않다. 그래서 일래자와 불환자의 단계를 수행도라고 한다.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시키는 단계를 말한다.

 

선정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미쳐 버릴 것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의 아버지와 삼촌은 사쌍팔배의 성자의 단계였다. 아버지 뿌라나는 예류자였고, 삼촌 이씨닷따는 일래자 단계였다. 아버지는 한평생 아내에 만족하여 청정한 삶을 살았다. 아내 이외 여자와 관계를 가진 적이 없음을 말한다.

 

삼촌 이씨닷따는 아내가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저의 삼촌 이씨닷따는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았고 아내에게 만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삼촌이 한과위가 높은 일래자였다는 것이다.

 

미가쌀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삼촌은 동일한 운명을 가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에게 들은 바가 있고, 많이 배워 이룬 것이 있고, 바른 견해로 잘 관통하는 것이 있고, 일시적인 해탈의 성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운명은 부처님만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라고 했다.

 

부처님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선정의 경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범부는 선정의 경지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범부가 선정의 경지에 대하여 알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선정자들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는 삼촌의 경지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 이는 선정의 경지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버지의 계행과 비교하여 평가를 하고 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우리 속담에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각자 인식하는 것이 다름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범부의 눈에는 범부만 보이고, 깨달은 자의 눈에는 깨달은 자만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다.

 

미가쌀라는 깨닫지 못한 범부의 여인에 지나지 않는다. 범부의 눈으로 어떻게 그 사람이 성자인지 알 수 있을까? 이는 부처님이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에 대하여 이분은 참사람이다.’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길과 경지를 알 때는 그것은 무한적 대상을 갖는다. 그래서 그 경우 범부는 흐름에 든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한번 돌아오는 님(一來者), 돌아오지 않는 님(不還者), 거룩한 님(阿羅漢)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 이와 같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Vism.13.110)

 

 

예류자는 일래자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다. 이는 깨달음의 경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면 모든 존재의 마음을 다 알 것이다. 이는 선정의 깊이와도 관계가 있다. 그런데 부처님도 모든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했다. 이는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누군가 부처의 경계를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러워할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언어폭력이 되는가?

 

범부는 범부의 마음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범부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반대로 깨달은 자는 범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가 자신의 삼촌에 대하여 평가한 것은 경솔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A6.44)라고 했다.

 

부처님은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두번이나 말했다.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말하면 다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무수한 삶의 인과와 결부되어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삶은 이번 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전 생도 있다. 무수한 생의 인과가 거듭되어서 여기에 이렇게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람의 한두가지 인과만 보고 판단하려 든다면 실수 할 수 있다. 범부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한가지 인과만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양한 업이 작용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한두가지 인과만 가지고 판단했을 때 오류가 날 수 있다. 그 사람의 한면만 보고 그럴 것이라고 판단했을 때 잘못 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럴 때는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이렇게 판단중지하는 것을 현대철학에서는 에포케라고 했다. 판단중지했을 때 의식이 자유롭게 흘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판단중지하면 섣불리 평가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는 언어에 따른 오류이기 쉽다. 왜 그런가? 언어는 기본적으로 억압구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가능성이 있음에도 특정한 표현으로 한정했을 때를 말한다. 그래서 사건자체를 억압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폭력이다. 언어폭력을 말한다.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는 어쩌면 언어폭력을 행사했는지 모른다. 마치 따옴표 처리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과 같다.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취했을 때 언어폭력이 된다.

 

진리의 흐름이 이끌어 가기 때문에

 

미가쌀라는 삼촌에 대하여 아버지와 같은 운명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둘 다 일래자로 죽었기 때문이다. 미가쌀라가 생각하기로 삼촌은 범부에 들지도 못할 사람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삼촌의 마음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범부는 성자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설령 그가 파계했다고 하더라도 성자의 지위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또다른 미가쌀라의 경’(A10.75)에서 계율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사람이 파계를 했지만 파계가 남김없이 소멸된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 뿐만 아니라, 그에게 들은 바가 있고, 노력하여 이룬 것이 있고, 바른 견해로 잘 관통하는 것이 있고, 일시적인 해탈의 성취가 있다면, 아난다여, 그 사람은 저 앞 사람에 비해 보다 훌륭하고 보다 탁월하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진리의 흐름이 이 사람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탁월한 곳에 이르지 저열한 곳에 이르지 않으므로, 탁월한 곳에 가는 자이지 저열한 곳에 가는 자가 아니다.” (A10.75)

 

 

파계를 한 것과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과거에 파계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알 수 없다. 참회하며 계를 잘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파계를 했지만 파계가 남김없이 소멸된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계를 잘 지켜서 청정한 삶을 산다면 진리의 흐름에 들어가기 쉬울 것이다. 그가 계를 지키지 않아 파계자처럼 보인다고 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성자의 마음은 성자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진리의 흐름이 이 사람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Ima hānanda, puggala dhammasoto nibbahati)”(A6.44)라고 했다.

 

진리의 흐름이 그 사람을 이끌어 간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을 보면 진리의 흐름이란 통찰의 지혜가 현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고귀한 자의 지위에 든 것이다.”(Mrp.III.375)라고 설명되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 각주에서는 위빳사나의 지혜를 얻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진리의 흐름은 성자의 흐름RHK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성자는 성자가 되고 싶어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범부를 진리에 흐름에 들게 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들은 바가 있고, 노력하여 이룬 것이 있고, 바른 견해로 잘 관통하는 것이 있고, 일시적인 해탈의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각자 업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성도

 

계를 잘 지켰다고 해서 청정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진리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는다. 진리의 흐름에 들어갈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의 흐름에 들어갈 충분조건은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과 바른견해와 일시적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뿌라나가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씨닷따가 그러한 계행을 성취했더라도, 뿌라나는 이씨닷따의 삶의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삶의 길을 갔을 것이다. 아난다여, 이씨닷따가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뿌라나가 그러한 계행을 성취했더라도, 이씨닷따는 뿌라나의 삶의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삶의 길을 갔을 것이다. 아난다여, 이 두 사람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고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A6.44)

 

 

미가쌀라의 아버지 뿌라나와 미가쌀라의 삼촌 이씨닷따는 다른 길을 갔다. 이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한생에서 조건만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전생의 무수한 업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감각이 민감한 자로 태어나고 또 어떤 이는 둔감한 자로 태어난다. 지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범부의 잣대로, 범부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뿌라나는 계행이 탁월했고, 이씨닷따는 지혜가 탁월했다. 뿌라나의 계행은 이씨닷따의 토대위에 있었고, 이씨닷따의 지혜는 뿌라나의 계행의 토대위에 있었다.”(Mrp.III.376)라고 설명해 놓았다.

 

사람마다 일장일단이 있다. 이 세상에 똑 같은 사람은 없다. 지혜가 강한 자에게 계행이 약할 수 있다. 반대로 계행은 강하지만 지혜가 약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고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두 사람은 [덕의] 구성요소가 결핍되어 있었다.”라고 번역했다. 각자 업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양성이 있는 것이다.

 

평가자가 되지 말라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 수 있을까? 만약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평가를 했다면 오류이기 쉽다. 그 사람 마음에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한면만 보고 전체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부만 보고 전체를 본 것처럼 말한다. 그 사람 출신지만 보고서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그렇다. 잘못된 정보일수도 있고 오래된 정보일 수도 있다.

 

중학교 때 영어시간에 배운 구절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것은 "I am not what I was.”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라는 말로 번역된다. 아마 중학교 2학년때이었을 것이다. 이 영어 구절을 듣고 충격 받았다. 마음에 절절히 와 닿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니다. 과거의 행위를 한 자와 그 행위를 경험한 자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과거 그 사람의 한면만 보고서 판단하려 한다. 마치 학창시절 친구의 모습이 그 시절 그 모습, 그 이미지대로 있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은 없다. 과거에 보았던 것이나 들었던 것은 옛날 것이다. 지금과는 같지 않다. 그가 계행이 엉망이었지만 지금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한두가지 인과만 보고서 판단하려 할 때 잘못 판단할 수 있다.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mā puggalesu pamāikā ahuvattha)”(A6.44)라고 했다. 함부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 그 사람도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다.

 

 

2021-12-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