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순간까지 호흡을 볼 수 있다면
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 죽음을 계속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한자어로는 사수념(死隨念)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김’으로 번역했다. 영어로는 ‘recollection of death’이다. 죽음명상이라고 한다.
11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죽음명상에 대한 경의 합송이 있었다. 이는 ‘죽음에 대한 새김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된 경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1(Paṭhamamaraṇassatisutta)’(A6.19)이 이에 해당된다.
나에게 오늘 하루만 주어졌다면
죽음명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죽음명상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모두 여섯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첫번째 방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A6.19)
하루 밤낮은 하루만 사는 것을 말한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하루 낮만, 한끼 탁발음식 먹는 동안만, 네 다섯 모금을 씹어 삼치는 동안만, 한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그리고 숨을 내쉬고 들어 마시는 동안만이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많은 것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 수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내일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년도 못사는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살아간다. 이런 때 부처님은 오늘 하루만 산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물었다.
나에게 오늘 하루만 주어졌다면 이 하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맛있는 것을 먹는 등 마음껏 즐기다가 하루를 보내야 할까? 축생이라면 그렇게 할지 모른다. 도살장에 들어 가는 돼지가 그 순간에도 발정이 난 것과 같은 것이다.
유튜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진지해진다고. 오늘 하루 시간이 주어졌을 때 진실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10% 올랐다고 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천문학적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까?
죽음을 앞둔 자는 진리 앞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A6.19)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아침에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아라한의 인생관
공자가 한 말 중에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아침에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이다. 진리를 이룬다면 하루를 사는 것이나 백년을 사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는 아라한의 인생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래서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4)
아라한의 삶은 월급생활자와 같은 것이다. 월급생활자가 월급 날자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완전한 열반의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아라한은 자아개념이 부수어진 무아의 성자이다. 무아의 성자에게 죽음은 시설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말은 언어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죽음도 없고 삶도 없다.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라고 했을 것이다.
게송에서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 (Kālañ ca paṭikaṅkhāmi)”라는 구절에 대하여 어떤 번역에서는 “나는 죽을 때만을 기다린다.”라고 했다. 여기서 때는 깔라(kalā)를 말한다. 영어로 ‘time’이다. 빠띠깔라(pāṭikaṅkha)는 ‘to be desire’의 뜻이다. 그래서 때를 기다린다는 말은 죽음을 기다린다는 말과 같다.
아라한이 월급을 기다리는 것처럼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여 죽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은 삶도 죽음도 개념에 지나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아라한의 인생관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갈까? 이어지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5)
이전 게송에서 단 한줄이 바뀌었을 뿐이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이라는 말이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라는 말로 바뀐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라한은 항상 사띠와 삼빠자나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죽는 순간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죽음명상에서는 단 한 호흡기라도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라. (manasikareyyaṃ)”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는 순간에도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라. (sampajāno patissato)”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했을 때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호흡을 볼 수 있다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완전한 열반을 위하여 담마를 배우고 담마를 실천한다. 최종적으로 아라한이 되었을 때 죽음은 의미가 없다. 번뇌가 다한 무아의 성자에게는 오늘 죽으나 백년 후에 죽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심지어 한호흡기에 죽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을 처음 접한 것은 2008년도의 일이다. 그때 당시 논현동에 있는 한국명상원에 다녔다. 묘원선생이 지도했다. 그때 이런 말을 들었다.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드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한꺼번에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다고 해서 사마시시(samasisi)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사마시시를 이룰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호흡을 들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 호흡을 지켜볼 수 있다면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이라는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이루어짐을 말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호흡을 볼 수 있을까? 대부분 죽는 줄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떤 세상에 떨어질지 모른다. 눈을 깨 보면 천상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도 호흡을 지켜본다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전과정을 지켜보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수 없다.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가
부처님 제자 중에 고디까 존자가 있었다. 고디까 존자는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했다. 고디까 존자는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그러나 퇴전 되었다. 무려 여섯 번이나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했다.
고디까 존자는 일곱번째 일시적인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그때 고디까 존자는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라며 생각했다. 또다시 퇴전하느니 일시적으로나마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결하고자 한 것이다.
고디까 존자는 칼로 자결했다.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디까 존자가 자결한 이시길리 산으로 올라갔다. 고디까 존자는 이시길리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고디까 존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갈애를 뿌리째 뽑아서 열반에 들었네.”(S4.23)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결한 고디까 존자가 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마라 빠삐만의 행위와 관련하여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전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S4.23)
부처님은 일체지자이다. 절대자처럼 전능하지는 않지만 전선하고 전지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는 자, 모든 것을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고디까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고디까의 의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말한다. 십이연기에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일어난다.”라는 고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악마가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자 했어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자결에 대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면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태어남이 없으니 죽음도 없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면 불생불사가 된다.
고디까는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가 일곱번째 이르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이룬 상태에서 자결했다. 이런 자살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마음이 해탈된 상태에서 자결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은 듯하다.
초기경전을 보면 비구가 질병에 걸려서 자결했을 때도 마음이 해탈된 상태였다면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박깔리의 자결로 알 수 있다. 박깔리가 중병으로 자결하고자 했을 때 부처님은 “박깔리여 두려워 말라, 그대의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S22.87)라며 전하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는 또 하나 제자의 자결이야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찬나의 경’(S35.87)에서 찬나의 자결이 그것이다. 찬나 역시 중병에 걸려서 자결하고자 했다. 이에 사리뿟따 존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찬나에게 법문을 해 주었다.
찬나는 사리뿟따의 법문을 듣고 일시적인 마음을 해탈을 이루었다. 찬나는 자리를 떠나자 칼로 자결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그는 자결했다. 그는 숨통을 끊었다. 그러나 그 순간 두려움이 덮쳤고 운명을 알렸다. 그는 자신이 범부상태인 것을 인식하고 재빨리 통찰하여 모든 형성된 것을 극복하고 거룩한 경지에 들어 이승과 갈애를 멸한 자(samasīsīn)로서 열반에 들었다.”(Srp.II.3730라고 설명되어 있다.
찬나는 범부인 상태에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결했다. 그런데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했다. 한번에 두 가지를 성취한 것이다. 이를 수명의 사마시시(jivitasamasīsī)라고 한다.
상윳따니까야를 보면 고디까의 자결(S4.23)을 비롯하여, 박깔리의 자결(S22.87)과 찬나의 자결(S35.87)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은 자결 이야기는 대승경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니까야가 위대한 이유
니까야에는 부처님 제자들의 자결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언젠가 전재성 선생은 2012년 동국대 정각원 법회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니까야가 정말 위대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솔직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니 부처님 제자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누가 부처님을 따르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다 덮어 놓았을 것입니다. 기록에 안 남겼을 거라구요! 그런데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조작된 경전이 아닙니다.”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이 글은 2014년 작성된 것이다. 인터넷에서 전재성 선생의 동국대 정걱원법회 법문을 듣고서 ‘숨기고 싶은 것 까지 기록된 내용, 니까야가 조작된 경전이 아닌 이유’(2014-01-06)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린 바 있다.
전재성 선생은 니까야가 위대한 이유에 대하여 제자들의 자결에 대하여까지 전승되어 온 것을 예로 들었다. 대부분 종교 경전의 경우 불리한 것은 빼버림에도 니까에서는 불리하게 여기는 내용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니까야가 편집되지 않았고 조작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했다.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이 성취되는 사마시시
고디까 존자는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결했다. 아마도 가장 마음이 청정했을 때였을 것이다. 자결하는 순간 자신의 호흡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마지막 죽음 의식이 일어났을 때 마지막 한호흡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마지막 호흡을 보면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사마시시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마시시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무명에 대한 관찰의 경’에서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부처님은 한호흡기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많은 것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 호흡만 잘 관찰해도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이른바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이 성취되는 사마시시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아침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한호흡기에도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하물며 하루 밤낮 동안은 어떨까?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일년이면 더욱더 많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백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치 천년, 만년 살 것처럼 방일하며 살아간다.
도를 이룬 사람에게는 하루를 하나 백년을 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0라고 했다. 오늘 아침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이다.
“우리도 번뇌를 부수기 위해서 방일하지 말고
치열하게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자.”(A6.19)
2021-12-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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