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태어남을 왜 재생이라고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9. 07:49

태어남을 왜 재생이라고 하는가?


고요한 새벽이다. 잠은 잘 잤다. 새벽에 무엇을 해야 할까? 경전 외우기만한 것이 없다. 십이연기분석경(S12.2)에서 자띠(태어남)을 외워야 한다.

"
자띠 산자띠 옥깐띠 닙바띠 아비닙바띠 칸다낭 빠뚜바뵤 아야따나낭 빠띨라보"
자띠와 관련된 핵심게송이다. 전송과 후송은 있으나 반복구문이므로 생략했다.

키워드는 빠뚜바뵤와 빠띨라보이다. 잘 안 외워지는 것이다. 빠뚜바뵤(p
ātubhāvo) 'Appearance'의 뜻이고, 빠띨라보(pailābho) 'Obtaining'의 뜻이다. 오온이 나타나고 감각처소를 얻는다는 뜻이다.

태어남을 뜻하는 자띠에 대한 게송에 대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
출생하고 탄생하고 강생하고 전생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들이 나타나고 감역을 얻는다."(S12.2)

이것이 태어남이다. 여기서 강생과 전생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닙바띠와 아비닙바띠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각각 영어로 'rebirth' 're-birth in another existence'로 풀이된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불교인이라면 십이연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무명으로 부터 시작해서 노사에 이르기까지 순환고리를 말한다. 반야심경에도 나온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무자로 모두 부정했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십이연기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십이연기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중에서 핵심이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율장대품을 보면 명백하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다. 아니 연기법을 발견했다.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자연의 법칙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율장대품 제1장 제1절을 보면 부처님이 연기법을 깨달은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율장대품에서 왜 연기법을 가장 앞에 두었을까? 상가의 성립은 부처님의 깨달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상가는 성립되지 않았을것이다. 또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빠알리게송을 외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단어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띠분석에서 "1)출생하고(sañj
āti), 2)탄생하고(okkanti), 3)강생하고(nibbatti), 4)전생하고(abhinibbatti), 5)모든 존재의 다발들이 나타나고(khandhāna pātubhāvo), 6)감역을 얻는다. (āyatanāna pailābho)"(S12.2)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말 번역이 아무리 훌륭해도 원어만 못하다. 자띠게송에서 보는 여섯 가지 태어남의 설명을 보면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분석적임을 말한다. 그래서 분석경이라는 의미로 위방가숫따(S12.2)라고 했을 것이다.

자띠게송에서 놀란 것은 아비닙바띠라는 말이다. 탄생에 대한 여러 설명에서 아비닙바띠는 'Re-birth in another existence'로 번역된다. 직역하면 "또다른 새로운 존재로 재생된다."라는 뜻이다. 키워드는 재생이다. 거듭태어남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하는 중생임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번역에서는 "전생한다."라고 번역했다. 생이 굴러간다는 뜻이다.

어떤 불교학자는 십이연기에 대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해석했다. 십이연기는 생활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삶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삼세양중인과를 강하게 비판했다. 어느 정도인가? 부처님은 생물학적 윤회를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수는 권위가 있다. 박사타이틀이 이를 말해 준다. 박사논문이 권위를 증명해 준다. 더구나 대학에서 수십년동안 강의를 했다면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교수는 정년퇴임했다. 요즘 유튜브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 교수는 자신의 박사논문 중도체계론으로 초기경전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논서를 강하게 비판한다. 비판정도가 아니라 부정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교수에 따르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은 버려야할 것이다. 그는 왜 전승되어어온 오랜 전통의 논서를 부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세운 이론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기존논서와 자신이 박사학위 논문에서 주장한 중도론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 교수 유튜브를 보면 논서를 강하게 부정한다. 자신의 이론을 세우기 위해서는 부정할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삼세양중인과이다. 십이연기는 생물학적 윤회를 뜻하는 삼세양중인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생물학적 윤회를 설명하고자 십이연기를 설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초기경전을 중도론적으로 해석하는 교수에게서 자만과 오만, 편견을 본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의지해서 대중을 설득하고자 한다. 그 결과 전승되어 온 논서를 모조리 부정한다. 니까야(경장)는 인정하지만 아비담마(논장)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과연 그는 십이연기 빠알리 원문을 제대로 보기나 한 것일까?

십이연기에서 자띠게송을 보면 태어남은 단순한 태어남이 아니다. 조건발생에 따른 태어남이다.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발생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비닙바띠라고 한 것이다. 새로운 존재로 재생함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오온과 육처가 생겨남을 들 수 있다. 그래서 태어남에 대하여 "모든 존재의 다발들이 나타나고 감역을 얻는다. (khandh
āna pātubhāvo āyatanāna pailābho)"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십이연기에서 생물학적 윤회를 말하지 않았다. 업에 의한 윤회를 말씀하셨다. 이는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된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하여 원인과 결과를 설명한 것이다. 모두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교수는 삼세양중인과를 생물학적 윤회라고 폄하했다. 자신의 이론을 세우기 위해 기존 논서를 부정한 것이다.

흔히 빠알리삼장이라고 말한다. 울장과 경장과 논장을 말한다. 순서는 율장이 가장 앞선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경, , 론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순서가 율, , 론이다. 빠알리 삼장에 논장이 들어가 있다. 흔히 아비담마라고 한다. 그런데 그 교수는 자신의 이론과 상충되는 아비담마 논장을 부정한다.

논장을 부정하면 어떻게 될까? 삼장이 아니라 이장이 될 것이다. 그 교수말대로라면 논장은 빠져야 한다. 그 대신 자신이 주장하는 중도체계를 넣고자 할 것이다.

빠알리삼장은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다. 빠알리삼장은 제3차 결집 때 완성되었다. 아비담마 논장은 3차결집 때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자신이 세운 이론과 상충된다고 해서 강하게 비판하는 교수가 있다.

그 교수는 십이연기에 대하여 현실적 삶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교수는 십이연기가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어 있는 청정도론을 엉터리라고 말한다. 마치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학자로서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가 말하는 불교는 종교로서 불교가 아니라 철학으로서 불교가 될 것이다.

불교는 철학이 아니다. 불교는 종교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불교를 종교로 보기 보다는 철학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증명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보아서 삶으로 설명한다. 십이연기도 살아 있는 삶의 유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의 연속이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의 조건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조건발생하는 오온으로서 나를 말한다. 이런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산다. 이것도 삼세양중인과가 될 것이다. 이를 순간윤회라 해야 할 것이다.

순간윤회를 확장하면 일생윤회가 된다. 어제는 전생이고 내일은 후생과 같은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를 추론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좀처럼 윤회를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정하기까지 한다. 마치 그것이 학자의 정체성인 것처럼 보는 것 같다.

어느 불교학자와 이야기하다 들은 것이 있다. 그 학자는 윤회를 부정했다. 그때 무척 충격 받았다. 불교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 같다. 과학적 유물론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새벽 십이연기 자띠게송을 외웠다. 잘 외워지지 않는 단어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외우면 외워진다. 어떤 긴 길이의 경도 외우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자띠게송을 외우다가 태어남이 닙바띠(rebirth)이고 아비닙바띠(re-birth in another existence)라고 안 것은 큰 수확이다. 교수의 말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더 믿는다.


2021-12-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