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걱정때문에 잠 못 이루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14. 08:22

걱정때문에 잠 못 이루고



나에게 번뇌가 일어났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정말 좋겠네." 이 말은 티벳속담이라고 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미래의 일은 가봐야 알 수 있다.

새벽이다. 2시대도 새벽이라 할 수 있을까?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자는 둥 마는 둥 잠의 질이 좋지 않다. 그러다 보니 꿈만 꾼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 안가는 꿈도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십이연기분석경을 외웠다. 현재 우빠다나에까지 이르렀다. 위방가경에서는 거꾸로 분석되어 있다. 자라마라나(老死)부터 시작하여 자띠(), 바와(), 우빠다나() 순이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역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현재 집착단계에 이르렀다. 집착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들고 있다.

"
까무빠다낭, 딧뚜빠다낭, 실라바뚜빠다낭, 앗따와두빠다낭(k
āmūpadāna, diṭṭhūpādāna, sīlabbatūpādāna, attavādūpādāna)"(S12.2)

감각적 쾌락의 욕망, 견해, 계율과 금계, 자아이론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집착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집착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집착,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개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S12.2)라고 했다.

집착은 들러붙어서 고착된 상태를 말한다. 뗄레야 뗄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엎질러진 물이다 중생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오온에 집착된 존재, 오취온적 존재라고 말한다.

오온에 대해서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는 괴로움에 대하여 '오취온고'라고 했다. 생노병사의 사고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가 있지만 이 모든 괴로움은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집착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딴하 빳짜야 우빠다낭"이라고 한다. 갈애가 있어서 집착이 일어남을 말한다. 그렇다면 갈애와 집착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아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
어둠 속에서 도둑이 손을 뻗치는 것처럼, 아직 얻지 못한 경계를 갈구하는 것이 갈애이고, 그가 물건을 훔친 것처럼, 이미 도달한 경계를 취하는 것이 집착이다.”(Vism.17.242)

갈애와 집착은 불선법이다. 그래서 어두운 것으로 묘사했다. 도둑질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갈애와 집착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수에 그친 겻인지 완수한 것인지에 대한 차이이다. 그래서 갈애는 얻지 못한 경계를 갈구하는 것이라고 했고, 집착은 이미 도달한 상태라고 했다.

나에게 왜 번뇌가 일어났을까? 나는 왜 걱정하는 것일까?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 걱정만 날 뿐이다. 불선법을 불선법으로 몰아낼 수 없다.

불선법은 선법으로 제압할 수 있다. 악하고 불건전한 아꾸살라는 착하고 건전한 꾸살라로 몰아 낼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불선법인지 알아차리면 된다. 나에게 번뇌가 일어났다고 알아차리는 순간 번뇌는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하지 못한다. 지금 탐욕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동시에 성냄도 일어날 수 없다. 울었다가 웃었다를 동시에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번뇌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것이 걱정인 줄 안다면 걱정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걱정의 마음은 아니다. 이는 연기법에 따른다.

연기에는 순관과 역관이 있다. 연기의 순관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것이고, 연기의 역관은 괴로움의 소멸과정에 대한 것이다. 십이연기분석경(S12.2)에서는 괴로움의 소멸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노사에서부터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십이연기분석경 우빠다나(집착)까지 외웠다. 네 가지 집착중에서 앗따와두빠다낭(attav
ādūpādāna)이 있다. 이를 '개체이론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 개체를 뜻하는 앗따(atta)와 이론을 뜻하는 와다(vāda)가 결합된 말이다.

개체이론에 대한 집착은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이라고도 번역된다. 이는 유신견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여 갈애와 자만과 자아견해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자아견해가 생겨나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갈애가 일어난다. 갈애가 더욱더 강화되면 집착이 된다. 집착은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 도둑질 한 상태와 같은 것으로서 업이 된다. 업은 반드시 과보를 산출한다. 어떤 과보인가? 업의 존재로서 태어남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결론은 괴로움이다.

십이연기에서 노사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와야메땃사 께왈랏사 둑카칸닷사 사무다요 호띠"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는 뜻이다. 여기서 '괴로움의 다발(dukkhakkhandha)'은 무슨 뜻일까? 이는 다름아닌 오취온이다.

중생은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다. 중생은 태어날 때부터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오온에 집착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태어남도 없을 것이다.

내가 괴로운 것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집착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자아론에 대한 집착을 떨쳐 내는 것이다.

네 가지 집착 중의 하나는 앗따와두파다낭 즉, 개체이론에 대한 집착이다. 이는 유신견이고 동시에 오취온이라고 볼 수 있다.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모든 괴로움의 시작이다.

부처님은 괴로움만 말하지 않았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도 제시했다. 그것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가르침이다. 사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만 설한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그리고 소멸방법까지 알려준 것이다.

"
그대는 왜 뭇삶이라고 집착하는가?

악마여, 그것은 그대의 사견일 뿐.
단순한 행위(
)의 집적인데

여기서 뭇삶을 찾지 못하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S5.10)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나라는 존재는 없다. 중생도 없다. 언어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뭇삶(중생)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까?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을 뿐이다. 현상을 자신의 것으로 알아 집착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연기가 회전되면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멈춘다. 느낌에서 갈애로, 갈애에서 집착으로 연기가 회전되지 않는 것이다.

게송에서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S5.10)라고 했다. 괴로움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을 보면 이런 상태에 대하여 "성자의 경우는 오온(
五蘊)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만 존재한다."라고 했다.

나에게 번뇌가 일어났다. 십이연기분석경을 암송했다. 그래도 속수무책이다.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럴 때는 담마(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과거 써놓은 글을 참고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번뇌는 여전하다.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 2시대부터 쓴 글이 아침 6 12분이되서 끝났다.


2021-12-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