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경 외우기에 문자풀을 걸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23. 12:45

경 외우기에 문자풀을 걸치고자

 

 

오늘 새벽 2시에 일어났다. 너무 일찍 일어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잠 자려고 할 때인지 모른다. 잠을 더 청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얕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 이런 꿈 저런 꿈 꾸다 보면 정신이 혼란스러워진다. 이럴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마저 외우기로 했다. 십이연기의 열두고리 게송은 다 외웠다. 거기에다 연기송도 추가해서 외웠다. 이제 마무리작업만 남았다. 그것은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에 대한 것이다.

 

순관과 역관

 

십이연기분석경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은 순관과 역관이다. 이를 유전문과 환멸문이라고 말한다. 유전문과 환멸문은 무명에서부터 시작된다. 환멸문이라고 하여 노사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환멸문을 보면 무명이 멸하면 형성이 멸하고식으로 진행되어서 노사에 이른다.

 

유전문의 시작은 이띠 코 빅카웨 아윗자빳짜야 상카라(Iti kho bhikkhave avijjāpaccayā sakhārā)”부터 시작된다. 이는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는 뜻이다. 그리고 에와메땃사 둑카칸닷사 사무다요 호티(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로 끝난다. 이는 이 모든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라는 뜻이다.

 

환멸문의 시작은 아윗자 뜨웨와 아세사위라가니로다 상카라니로도(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khāranirodho)”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라는 뜻이다. 여기서 아세사라는 말은 ‘entire; all’의 뜻으로 남김없이라고 번역되었다. 마치 천의 색깔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이 바래지듯이 무명이 소멸되었을 때 형성도 소멸될 것이라는 말이다.

 

환멸문의 끝은 에왕 땃사 께와랏사 둑캇칸닷사 니로도 호띠띠(Eva 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로 끝난다. 이 말은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라고 해석된다. 여기서 마지막에 나오는 (ti)자는 “~라고.”의 뜻이다. 전달할 때 쓰는 말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할 때 자를 붙인다. 자신이 한 말이 아님을 뜻하기도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할 때 마지막 문장에 자를 붙이는 것을 빠알리원문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공통되는 것이 있고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유전문과 환멸문에서 차이나는 것은 서로 대조되는 단어이다. 유전문에서는 사무다요 호띠라고 했고, 환멸문에서는 니로도 호띠띠라고 했다. 이런 차이점에 주의하면 다 외운 것이나 다름없다. 반복구문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긴 길이의 경도

 

유전문과 환멸문을 다 외웠으니 이제 전체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야 한다. 새로운 게송을 외울 때마다 이전에 외웠던 것을 확인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아무리 긴 길이의 경도 외워진다.

 

이번에 외운 십이연기분석경은 글자수가 1,543자에 달한다. 1,300여자에 달하는 천수경보다 글자수가 더 많다. 대략 시간이 나온다. 10여분 걸리는 것이다.

 

최초로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다. “에왕메 수땅부터 시작하여 니로도 호띠띠까지 암송하는데 19분 걸렸다. 새벽 326분부터 345분까지 19분 동안 안보고 외운 것이다.

 

첫번째 암송할 때는 일어서서 외웠다. 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외운 것이다. 두번째 암송할 때는 앉아서 외웠다. 가장 편한 자세로 눈을 감고 외운 것이다. 새벽 347분부터 43분까지 16분 걸렸다. 세번째는 한숨 자고 나서 외웠다. 14분 걸렸다. 점점 짧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외워 놓으면 잊어버리지 않는다. 어떤 긴 길이의 경도 외울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실제로 해보니 머리가 좋다거나 기억력이 좋은 것과 관계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반복숙달에 따른 것이다. 긴 길의 경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공략하는 것이다. 이를 벽돌쌓기 외우기라고 해야 할까?

 

벽돌은 아래부터 위로 차곡차곡 쌓아 간다. 경 외우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늘 10번 게송을 외웠으면 먼저 외운 1번부터 9번까지 외운 게송들을 확인하고 들어 간다. 이렇게 외우다 보면 아무리 긴 길이의 경도 외울 수 있다. 이번에 외운 십이연기분석경 1,543자도 그랬다.

 

마치 득도한 듯한 기분

 

긴 길이의 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외우고 나면 상쾌하다. 마치 득도한 듯한 기분이다. 그렇다고 도를 깨달은 적은 없다. 득도가 아마도 이런 기분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모두 다 외웠으면 그 다음 부터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외워야 한다. 그러나 절대 안심이다. 한번 외운 것은 달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은 아무리 모아도 어느 순간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외워 놓은 경이나 게송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물론 금방 외웠을 때를 말한다.

 

일터에 와서 십이연기분석을 또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다. 가능하면 천천히 암송했다. 나지막하게 소리내어서 암송했다. 빠알리 원문을 말하지만 우리말로 뜻을 새기면서 암송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17분 걸렸다. 득도한 듯한 기분이었고 해탈한 듯한 느낌이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율장대품을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율장대품 제1장 제1절이라고 볼 수 있는 보리수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대체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는 그리고 세존께서는 밤의 초야에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Vin.I.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던 것이다.

 

율장대품에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었다. 그래서 초야, 중야, 후야, 이렇게 세 번에 걸쳐서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연기법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

 

 

연기법을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는 말 자체가 조건법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빠띳짜(paicca)조건을 뜻하고, 사뭅빠다(samuppāda)함께 일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조건발생이라고 한다. 이는 문장 말미에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연기법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깨달은 것이 아니다. 세상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도 연기법을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니다나상윳따(S12)에서 과거칠불의 행적에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과거칠불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연기법을 깨달아서 부처가 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과정은 동일하다. 91겁 전에 출현한 비빳씬부처님(비바시불)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보살 비빳씬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가?”(S12.4)

 

 

연기법을 깨닫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들은 한결같이 이와 같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 하여 순관을 설하고, 또한 이와 같이 무명이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라 하여 연기의 역관을 설한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해탈의 지복을 누린 것처럼

 

과거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았던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다 외웠다. 이런 것은 불교인이라면 기본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외우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아직까지 외웠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십이연기분석경(S12.2)에 도전했다. 십이지 연기의 각 고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암송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출간된 예경지송을 보면 지송경전품에 연기의 분석경을 송출하고자 하오니’(321)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나서 해탈의 기쁨을 누렸다. 율장대품에서는 그때 세존께서는 칠일동안 홀로 가부좌를 하고 해탈의 지복을 누리며 앉아 있었다.”(Vin.I.1)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후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해탈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도 역시 칠일동안 해탈의 지복을 누렸다. 어떤 자료에서는 일곱번 자리를 옯겨 49일동안 해탈의 지복을 누렸다고 전한다.

 

십이연기분석경을 다 외우고 자리를 옮겨서 외웠다. 또 자리를 옮겨서 외웠다. 부처님이 자리를 옮겨 해탈의 지복을 누린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해 보고자 한 것이다.

 

포토메모리(photo memory)

 

십이연기분석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다 외웠다. 마치 사진 찍은 것처럼 선명하다. 이는 입체적이고 전체적으로 외웠기 때문이다. 이를 어떤 이는 포토메모리(photo memory)라고 말한다.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한 기억임을 뜻한다.

 

누구나 포토메모리가 가능하다고 본다. 경을 외우다 보면 원문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자주 암송하다 보면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햇갈리는 것도 기억할 수 있다.

 

경에서 어느 게송은 까따모(Katamo)로 시작한다. 또 어느 게송은 까따마 (Katamā)로 시작한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까따모로 시작하는 것은 paiccasamuppādo, phasso, bhavo가 있다. 공통적으로 끝에서 오(o)로 끝난다. 남성명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외 것은 모두 까따마로 끝난다.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까따메(Katame)로 시작하는 게송도 있다. 십이지연기에서 상카라 게송에서만 볼 수 있다. 단 하나 예외를 발견한 것이다. 왜 그럴까? 중성이어서 그럴까? 빠알리어 문법을 공부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기회가 된다면 빠알리어 문법을 배워 보고 싶다.

 

십이연기분석경을 반복해서 외웠다. 마치 생활의 달인처럼 숙달된 것이다. 반복숙달하여 외우다 보니 빠알리 원문이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다. 이를 포토메모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든든한 노자돈

 

경을 외웠다고 해서 득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자신과 싸워서 승리했다는 것에 만족한다. 긴 길이의 경을 마치 사진보듯이 떠 올려 의미를 하나하나 새겨 다 암송했을 때 기쁨은 느껴 보지 않은 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한달 동안 애써 외운 것을 암송할 것이다. 한번 외워 놓은 것은 달아나지 않는다. 돈이나 재물은 시간 지나면 모두 사라진다.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없다. 그러나 한번 외워 놓은 경이나 게송은 누가 가져 가지 않는다.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는 든든한 노자돈이다.

 

살다보면 언젠가 죽음에 이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 저승길에 갈 때 무엇을 가져 가야 할까? 평생 모은 돈이나 재물, 재산은 하나도 가져 갈 수 없다. 가져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행위()밖에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 그대는 떠남의 문턱에 서 있으나, 그대에게는 노잣돈조차도 없구나.(Dhp.235)라는 가르침이 있다.

 

경이나 게송 외우기는 노자돈이 될 수 있을까? 충분히 노자돈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가져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은 가져 갈 수 없어도 돈 버는 과정에서 지은 업도 가져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믿음이 노자돈이고

행운이 보물창고이며

욕망이 사람을 괴롭히고

욕망이 세상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니

줄에 묶인 새와 같이

뭇삶들은 자신의 욕망에 묶여 있네.”(S1.79)

 

 

 

다음에 외워야 할 경은?

 

경을 외울 때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생소한 단어에 대하여 뜻을 새기며 외웠을 때 탐욕, 성냄 등과 같은 불선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경을 다 외웠을 때는 그야말로 해탈의 지복을 누릴 수 있다. 마치 큰 깨달음음 얻은 것처럼 기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것도 해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암송하면 기쁨이 생겨난다. 그 순간만큼은 해탈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해탈의 지복을 한달가량 느끼고자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다음은 어떤 경을 외울까? 오늘 일터로 향하면서 불현듯 정진의 경(padhānasutta)’(Sn.3.2)이 떠올랐다. 숫따니빠따에 있는 것이다. 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차라리 나는 문자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tn.440)

 

 

참으로 호연지기 넘치는 장부다운 게송이다. 부처님이 악마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그래서 문자풀을 걸치겠다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둘레나 깃발이나 무기에 문자풀을 묶었다.”(Prj.II.390)라고 설명되어 있다.

 

경 외우기에 문자풀을 걸치고자

 

경 외우기에 문자풀을 걸치고자 한다. 부처님처럼 자신과 한판 싸워 보고자 한다. 그런데 정진의 경은 무척 길다. 무려 게송이 25개나 된다. 모두 6페이지에 달한다. 이제까지 외운 빠알리 경중에 가장 긴 것 같다.

 

지금까지 수많은 빠알리경을 외웠다. 초전법륜경(S56.11)이 가장 길었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라따나숫따(보배경)로 모두 17게송에 달한다. 이 밖에도 멧따숫따, 망갈라숫따 등 많은 빠알리경과 게송을 외웠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길이가 길어도 벽돌쌓기 식으로 차근차근 외다 보면 언젠가 다 외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숫따니빠따 빠다나숫따(정진의 경)는 내가 좋아하는 경 중의 하나이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다짐을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악마와 싸워서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빠나다경 외울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2021-12-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