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송 제대로 이해하기
십이연기분석경 외우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어제는 윈냐낭(의식)과 상카라(형성)와 아윗자(무명)를 한꺼번에 외웠다. 어떻게 세 개 게송을 외우는 것이 가능한가?
연기법 구조를 알고 있다. 각 연기 고리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것은 연기법에 대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2009년 한국명상원에서 빠띳짜사뭅빠다를 배운 것이 크다. 마하시 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를 1년동안 배웠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글을 쓸 때 마다 십이연기를 열어 보았다.
십이연기 순서는 알고 있다. 신심 있는 불자라면 무명에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 고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십이연기는 반야심경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과 마지막만 나온다. 그것도 없을 무자로 부정되어 있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불교인들은 십이연기를 부정하는 것부터 먼저 배운다. 그러다 보니 십이연기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다. 열두 가지 고리를 순서대로 외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각 연기의 고리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아마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주제별로 모아 놓은 경전이 있다. 상윳따니까야를 말한다. 연기에 대한 것은 12번째 상윳따에 있다. 니다나상윳따라 하여 연기를 주제로 모아 놓은 경의 무더기를 말한다. 그 중에 하나가 십이연기분석경이다. 이를 위방가숫따(S12.2)라고 한다. 분석경 또는 분별경이라는 뜻이다.
위방가경에서는 십이연기의 각 고리에 대하여 게송 형식으로 설명해 놓았다. 핵심만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상카라(형성)에 대한 것을 보면 신, 구, 의 삼업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까야상카라, 와찌상카라, 찟따상카라고 하여 세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을 의미한다.
아윗자(무명)는 어떤 것일까?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고성제에 대해서는 "둑케안냐낭(dukkhe aññāṇaṃ)"이라 하여, "괴로움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한 것이다. 도성제에 대해서는 "둑카 니로도 빠띠빠다야 안냐낭"이라 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길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했다.
불교인들에게 "무명이란 무엇입니까?"라며 물었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의 구조를 보면 괴로움의 소멸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해법을 제시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팔고를 설했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만약 부처님이 괴로움만 말했다면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괴로움만 설했다면 염세주의자라 몰렸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뿐만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방법까지 설했다. 이와 같은 사성제를 아는 것은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는 가장 간단한 2지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 이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앗사지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가 설합니다.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Vin.I.40)
이를 연기법송이라고 한다. 앗사지 존자가 사리뿟따에게 말한 것이다.
출가하기 전의 사리뿟따는 앗사지가 경행하는 모습을 보고서 감동받았다. 그래서 스승은 누구인지 가르침은 어떤 것인지 물어보았다. 이에 앗사지가 짤막하게 답변한 것이다.
사리뿟따는 이 게송을 듣고서 회의론자로서 삶을 그만 두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친구 목갈라나에게도 알렸다.
사리뿟따는 게송을 듣고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앗사지 존자가 말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고통은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일어나므로(緣起)
그 조건과 원인을 제거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緣滅)”
연기와 연멸에 대한 것이다. 연기법은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가장 기본적인 2지연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연기에는 십이연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십지연기도 있고 팔지연기도 있다. 부처님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연기를 분별해서 설했다. 이 생에서 삶에 대한 것은 삼사화합부터 시작되는 팔지연기로 설했다. 삼세의 인과에 대해서는 십이지연기로 설했다.
모든 연기의 기본은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에 대한 것이다. 앗사지 존자가 읊은 연기법송이 대표적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연기송에 근거한다.
"이띠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와 같은 연기송은 외워야 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십이연기 정형구가 시작되기 전에 언급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에 대한 빠알리원문과 우리말 번역, 그리고 한역과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약유차즉유피 (若有此卽有彼)
약생차즉생피 (若生此卽生彼)
약무차즉무피 (若無此卽無彼)
약멸차즉멸피 (若無此卽滅彼)"
"when this is present, this comes to be,
when this arises, this arises.
When this is not present, this does not come to be,
when this does not arise, this does not arise."
이것이 연기법의 핵심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팔만사천법문은 이 연기송을 펼쳐 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조는 간단하다. 생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송 번역을 보면 이것과 저것이 나온다. 이는 한역 번역에 따른 것이다. 한역을 보면 차(此)와 피(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알리어는 다르다. 둘 다 이것(imasmiṃ)과 이것(idaṃ)으로 되어 있다.
한역경전은 한계가 있다. 뜻글자로 이루어진 한자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가르침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영역이 더 잘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과 저것에 대한 것도 그렇다.
부처님은 이것과 저것으로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것과 이것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가 아니라,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영역에서는 'this’ ‘this’ 라 되어 있다. 이런 번역이 정확한 것이다.
이것과 저것과 이것과 이것은 다른 것이다. 한역대로 이것과 저것이라고 했을 때 그 역도 성립할 것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는 말은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라는 말도 성립된다. 이는 다름아닌 상호의존성이다. 화엄교학에서 법계연기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것은 아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이것과 저것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띠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imasmiṃ sati idaṃ hoti)"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앞의 이것과 뒤의 이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어떤 모임이든지 참석하면 후기를 남긴다. 2018년 5월 정평법회 때 박경준 선생이 법문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때 박경준 선생은 연기법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했다. 특히 이것과 이것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박경준 선생에 따르면 이것과 이것은 다른 것이다. 앞의 이것(imasmiṃ)은 동사가 사띠(sati)이고, 뒤의 이것(idaṃ)은 동사가 호띠(hoti)이다. 여기서 동사의 쓰임새는 다르다. 사띠(sati)는 '이다'에 대한 것이고, 호띠(hoti)는 '일것이다'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영역에서 각각 be와 become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when this is present, this comes to be"라고 하는 것이다.
십이연기분석경을 거의 다 외워간다. 자라마라낭부터 시작하여 역순으로 아윗자까지 다 외웠기 때문에 다 외운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에다가 연기송을 하나 추가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예경지송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서 추가한 것이다.
연기송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흔히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알고 있으나 이는 한문투 번역이다. 원래는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가 맞는 것이다. 빠알리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역경전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뜻글자가 소리글자를 잘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것과 저것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의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가르침을 우주공간으로 확대한 것은 지나친 것이다. 이것과 저것을 상호의존하는 것으로 보아 법계연기로 설명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것이다.
이것과 저것으로 본다면 단멸론으로 빠질 수 있다. 몸과 마음을 상호의존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몸이 죽으면 정신도 죽을 것이다. 조건발생 설명없이 상호의존만 말했을 때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이것이 생겨난다."라는 조건발생적 연기를 동시에 설한 것이다.
십이연기 가르침은 심오하다. 아난다는 연기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자 “저에는 명백히 드러납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난다를 나무라며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D15.2)라고 했다.
연기법은 심오하다. 어느 정도로 심오할까? 이는 부처님이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면, 이와 같은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 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심오한 십이연기분석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우고 있다. 오늘 외워야 할 것은 연기송에 대한 것이다. 본래 십이연기분석경(S12.2)에는 없으나 추가시킨 것이다.
연기송은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암송해야 할 기본게송이다. 그런데 이것과 저것이 아니라 이것과 이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야 연기와 연멸을 잘 표현할 수 있다. "한역 차(此)와 피(彼)는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2021-12-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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