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물에 빠진 일곱 종류 사람이 있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6. 13:51

물에 빠진 일곱 종류 사람이 있는데

 

 

차분한 일요일 아침이다. 아침 일찍 일터에 나와서 이렇게 자판을 두드려 본다. 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경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복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지난 128일 금요모임에서 합송한 것은 일곱 종류의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물에 빠진 자와 같은 사람의 경(Udakūpamāsutta)’(A7.15)에 해당된다.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경을 보면 일곱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1) 세상에 어떤 사람은 한번 빠져서 가라앉는다.

2)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3)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서있는다.

4)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관찰하고 비추어본다.

5)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앞으로 나아간다.

6)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얕은 바닥에 발판을 마련한다.

7)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저 언덕에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간다.

 

 

이와 같은 일곱 종류의 사람 중에서 나는 어느 위치에 있을까? 먼저 첫번째 단계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악하고 불건전한 성품을 결정적으로 갖추고 있다.”라고 했다. 세상이 말하는 악인이다. 여기서 악하고 불건전한 성품(akusala dhamma)’은 초기경전에서 십악행을 뜻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짓는 열 가지 악행이 있다.

 

경에서는 성품을 결정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결정적이라는 말은 ‘ekantakāak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확실히 검음의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서는 이를 전적으로 검고라고 번역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꾸살라담마는 검은 법임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십악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번째 단계의 사람은 물에 빠지면 가라 앉아 버린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의 바다에 빠져서 휩쓸려 버림을 말한다. 검고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한 그것을 땔감으로 하여 불이 꺼지지 않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이다.

 

지혜가 없이 착하게 살면

 

두번째 단계의 사람은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라고 했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가기 위해 물에 들어 갔는데 한번은 올라 갔다가 이내 가라 앉고 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의 믿음이 유지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퇴전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유지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퇴전하고, 창피함을 아는 것이 유지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퇴전하고, 정진을 아는 것이 유지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퇴전하고,

지혜가 아는 것이 유지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퇴전한다.”(A7.15)

 

 

여기서 키워드는 믿음(saddhā), 부끄러움(hirī), 창피함(ottappa), 정진(vīriya), 지혜(paññā)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이 다섯 가지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는 선법인 것이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가 유지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퇴전한다고 했다.

 

여기서 퇴전한다는 말은 ‘hāyati’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diminishes; dwindles; wastes away’의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없어져 버린다.”라고 번역했다. 퇴전한다는 말은 뒤로 구른다는 말이다. 후퇴하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단계에 머물 것이다.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혜가 없이 착하게 살면 악업이 되기 쉽다. 왜 그런가? 본능대로 감각대로 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 탐, , 치로 살아 가는데 이것이 악업이 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십악에서 정신적으로 짓는 압억으로 탐욕과 성냄과 사견을 집어넣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견(邪見)’이다.

 

천수경 십악참회를 보면 가장 마지막에 치암중죄금일참회가 있다. 대개 어리석음을 참회한다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치에 대해서는 사견을 갖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숙명론, 우연론과 같은 사견을 말한다.

 

사견을 가지고 있는 한 그가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도 악업이 된다. 업과 업의 과보에 어긋난 빗나간 견해 (micchādiṭṭhi), 사견을 갖는 한 오래 살면 살수록 악업이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세번째 단계의 사람은 올라왔다가 서있는다.”라고 했다. 가라 앉는 단계 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이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번역에서는 퇴전하지 않고라고 번역했다. 불퇴전을 말한다. 그래서 퇴전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서있다.(neva hāyati no vaḍḍhati hitā hoti)”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없어지지도 증장하지도 않고 그냥 머물러 있다.”라고 번역했다.

 

세번째 단계의 사람은 수행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기 위해서 수행하는 자들로서 성자의 흐름 초입 단계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윤회의 바다에 빠져 버리지 않고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깨달음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도 인정한 것이다. 부처님은 바다의 비유를 들었다. 바다는 점차적으로 깊어지지 갑자기 깊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Ud.5.5, A8.19, Vin.II.237)라고 했다. 한마디로 돈오돈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면 돈오점수는 있다는 말과 같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서 돈오는 궁극적 앎에 대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기 위한 수행의 길에 들어섰지만 궁극적 앎을 보지 못했다면 정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고자 물에 들어 갔는데 건너 가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멈추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라왔다가 서있는다.”라고 한 것이다.

 

열반을 체험한 사람

 

네번째 단계의 사람은 올라왔다가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라고 했다. 드디어 궁극적 앎을 본 사람이다. 한마디로 열반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 (vipassati viloketi)”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관찰한다는 것은 ‘vipassati’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to see clearly; to have intuition, to obtain spiritual insight’의 뜻이다. 통찰지를 얻는 것을 말한다. 어떤 통찰지를 말할까? KPTS 번역에 실려 있는 각주를 보면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라는 뜻의 “vipassati viloketi”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목표를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 흐름에 듦은 열반에 대한 첫 번째 별견(瞥見)으로 여겨진다.”(Lba.IV.82)라며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해 놓았다.

 

여기서 별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토론 중에 어느 도반이 인터넷 검색을 해서 알려 주었다. 별견은 언뜻 본다라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별견은 열반을 본다는 뜻입니다.”라고 했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든 자, 즉 예류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반을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반조해야 한다. 그래서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 (vipassati viloketi)”라고 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관찰하고 굽어본다.”라고 번역했다.

 

정법의 조건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있고 팔정도가 있고 팔정도 수행으로 열반과 사향사과가 있으면 정법시대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 삼장이 전승되어 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정법시대이다. 또한 팔정도 수행이 있기 때문에 정법시대이다. 마지막으로 팔정도 수행으로 도와 과를 이룬 성자가 출현한다면 정법시대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반과 사향사과이다. 이를 아홉 가지 출세간법이라고 한다.

 

아홉가지 출세간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반이다. 열반 체험을 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될 수가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반을 체험해야 하는데, 이는 궁극적 경지를 맛보는 것과 같다. 이를 경에서는 뷔빠사띠 (vipassati)로 표현했다. 영어로는 ‘to obtain spiritual insight’의 뜻이고 한자어로는 별견(瞥見)이라고 했다. 이를 돈오(頓悟)라고 해도 될 것이다.

 

수행단계에서 궁극적 체험을 해야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단계 마다 궁극적 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반조 때문이다. 경에서는 이를 비추어 본다라는 뜻으로‘viloketi’라고 했다. 궁극적 체험을 하고 나서 비추어 보아야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알 수 있다. 이후에 남은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을 하게 된다.

 

궁극적 체험과 반조

 

예류자 단계에서도 궁극적 체험과 반조가 일어난다. 예류자 단계에서 궁극적 체험과 반조에 대해서는 청정도론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열반체험을 하고 반조가 일어나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는실로 나는 이 길로 왔다.”라고 길을 성찰하고, 그 다음에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라고 경지를 성찰하고, 그 다음에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끊어졌다.”라고 제거된 오염을 성찰하고, 그 다음에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상위의 세 가지 길을 통해서 끊어야 할 오염을 성찰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진리를 대상으로서 꿰뚫었다.”라고 불사의 열반을 성찰한다. 이와 같이 고귀한 제자인 흐름에 든 님에게는 다섯 가지 성철이 있다.”(Vism.22.20)

 

 

예류자가 열반을 체험하고 나면 다섯 가지 성찰이 있게 된다. 1) ()을 성찰하고, 2)경지()를 성찰하고, 3)이미 끊어진 오염을 성찰하고, 4) 남아 있는 오염을 성찰하고, 5)열반을 성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끊어야 할 오염을 성찰한다는 것은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다. 이는 세 가지 길, 즉 일래자(사다함), 불환자(아나함), 아라한의 길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다함과 사다함의 길을 수행도(修行道)’의 단계라고 하고,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아라한이 되면 무학도(無學道)’의 단계가 된다.

 

예류자, 즉 수다원의 단계를 도를 보았다고 해서 견도(見道)’라고 한다. 이는 궁극적인 진리를 체험한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체험이다. 이를 별견(瞥見) 또는 돈오(頓悟)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 진리를 언뜻 보았을 뿐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그러나 그런 번뇌는 악처로 떨어질 정도로 큰 것은 아니다.

 

수다원이 되면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이 생겨난다.”(Vism.22.5)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려고 하는 자는 상카루뻭카냐냐(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단계에서 멈춘다고 한다. 범부로서 올라 갈 수 있는 위빠사나 최상의 지혜를 말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1단계에 해당된다.

 

보살의 길을 가느냐 성자의 길을 가느냐는 11단계에 달려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혈통전환이 이루어져서 범부에서 성자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한번 열반 체험을 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을 체험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 생 이내에 윤회를 끝낼 것이라는 가르침이 도처에 있다. 숫따니빠따 라따나경(보배경)에서는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크게 방일하더라도, 여덟 번째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Stn230)라고 했다.

 

수행도(修行道)의 단계

 

다섯번째 단계의 사람은 올라왔다가 앞으로 나아간다.”라고 했다. 이는 일래자, 즉 사다함의 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는 유신견, 의심, 계금취라는 세 가지 결박을 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탐욕과 성냄이 옅어진 단계를 말한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간다.”라고 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수행단계를 말한다.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단계이다.

 

여섯번째 단계의 사람은 올라왔다가 얕은 바닥에 발판을 마련한다.”라고 했다. 이는 불환자, 즉 아나함의 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는 탐욕과 성냄도 사라져서 다섯 가지 낮은 단계가 모두 부수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무명 등 다섯 가지 미세한 번뇌는 남아 있다. 그래서 발판을 마련한다.”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안심단계라고 했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는 수행도의 단계이다. 견도의 단계에서 열반을 체험하여 반조한 결과 남아 있는 번뇌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 번뇌는 어느 정도일까? 악처에 떨어질 정도가 아니다. 이는 라따나경에서는 아무리 크게 방일하더라도” (Stn.230)라는 표현이 있고, 또한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어도”(Stn.232)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남아 있는 번뇌가 매우 작고 사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성자의 흐름에 든 자의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고귀한 제자가 참사람으로서 올바른 견해를 갖추고 진리를 꿰뚫으면, 그에게는 이미 부서져 소멸해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은 것은 적어서 많이 잡아 일곱 번 더 윤회하더라도 끝나 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수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비교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S55.49)

 

 

여기서 괴로움을 번뇌라고 보아도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의 번뇌는 매우 적음을 말한다. 이를 수미산과 자갈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그래서 남아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수미산의 산꼭대기에 놓인 콩알만한 일곱 개의 자갈이라고 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길어야 일곱생만 남았음을 말한다. 또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해서는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S56.51)라며 매우 작음을 말했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

 

마지막으로 일곱번째 단계의 사람은 올라왔다가 저 언덕에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간다.”라고 했다. 이는 아라한의 단계를 말한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무학도의 단계를 말한다.

 

아라한은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가버린 자를 말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과 열반을 실현한 자이다. 죽으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서 윤회가 끝나게 된다.

 

아라한은 살아 있어도 괴로움은 없다. 왜 그럴까? 아라한에게는 자아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자아가 소멸된 자에게 번뇌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괴로움도 있을 수 없다. 무명 등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을 완전히 부수어 버린 무아의 성자 아라한은 불사(不死: amata)가 된다.

 

니까야의 매력은 동일한 내용의 가르침이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물에 빠진 자와 같은 사람의 경’(A7.15)에서 보는 저 언덕에 서 있는 자가 상윳따니까야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S35.238)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 갔다면,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서 거룩한 이로서 땅 위에 우뚝 섰을 것이다.”(S35.238)

 

 

아라한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간 자를 말한다. 그래서 뗏목이 나온다. 가르침의 뗏목이다. 만일 뗏목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거센 물살을 건너려고 하다가 익사하고 말 것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는 반야심경에서도 발견된다.

 

반야심경을 보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gate bodhi svāhā)”라는 주문이 있다. 반야심경의 클라이막스에 해당된다. 이 주문은 일반적으로 “가신 분이여, 가신분이여, 피안에 가신 분이여,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여, 깨달음이여, 행운이 있으라!”라고 번역된다.

 

 

반야심경 주문에서 빠라가떼(pāragate)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피안에 이른 분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니까야에서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S35.238) 또는 저 언덕으로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선 님”(A7.15)과 동일한 표현이다. 이 말은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를 번역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저 언덕에 도달하여 맨 땅위에 서 있는 바라문이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본다면 반야심경은 아라한찬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못하면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할 때 단계적으로 처리한다. 오늘 이만큼 했으면 내일은 저만큼 하는 등 매일매일 조금씩 해가다 보면 어느새 상당히 진척되었음을 알게 된다.

 

힘이 들면 쉬어 가면 된다. 막히면 누구에겐가 물어보거나 도움을 청하면 된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은 단계적으로 처리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급격한 깨달음은 없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단 한번의 깨달음으로 모든 번뇌가 소멸되지 않음을 말한다. 설령 궁극적인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번뇌는 단계적으로 소멸된다. 이와 같은 단계적 깨달음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앙굿따라니까야 물에 빠진 자와 같은 사람의 경’(A7.15)이라고 볼 수 있다.

 

일곱단계 깨달음이 있다. 이는 일곱종류의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라면 세번째 단계인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서있는다.”에 해당될 것이다. 여기서 머물면 안될 것이다. 더 나아가면 세 가지 결박을 부수고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 제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계율을 잘 지켰어도 성자가 되지 못하면 육도 중에 어떤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이는 악처에 떨어지는 것을 배제할 수 없음을 말한다. ‘

 

열반은 희망이자 구원의 메시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를 면할 수 있다. 설령 방일하고 사소한 잘못을 했어도 악처에 떨어질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에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만 안심인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으면 곧바로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다. 설령 그가 다음생에 외도 지역에 태어나 외도 사상에 물들었다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 자신이 수다원이었음을 자각하게 되고 윤회를 끊는 길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이 일어난다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보살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수행을 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끝나 버린다. 그래서 범부로서 최상의 경지인 위빠사나 지혜 11단계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상카루뻭카냐나) 단계 머문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일곱 종류의 사람을 설명했다. 최종 목적은 저 언덕으로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선 님(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A7.1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1단계에서 멈추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다.

 

11단계에서 멈추면 어느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여 세세생생 윤회하지만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는 한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지옥이나 축생과 같은 악처에서 떨어졌을 때 중생구제가 가능한 것일까?

 

부처님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부처님이 일곱종류의 사람을 말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뗏목으로 삼아 모두 열반에 들라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아무리 못잡아도 일곱생 이내에는 불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죽음이 없으니 태어남도 없는 것이다. 열반처럼 희망적인 메시지가 어디 있을까? 열반은 희망이자 구원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2022-02-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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