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아름다운 꿈을 꾸려거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9. 08:59

아름다운 꿈을 꾸려 거든


새벽 세 시에 깼다.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 어제 잘 산 것이다. 잘 절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알아차리려고 노력했다. 의도를 알아차리고자 했다. 모든 행위에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하는 일은 없다. 만약 자신이 하는 행위를 모른다면 사고의 연속일 것이다. 자꾸 잊어버리는 것도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편으로 행위에 있어서 찰나멸을 생각했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된다는 원리를 알고 있다. 생멸을 찰나멸로 대체하여 보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는 것은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찰나멸로 생각했을 때 어떤 이점이 있을까?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혐오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 마음 역시 멸하고 만다. 그러나 여운을 남긴다.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지각이 불쾌한 느낌과 결합되었을 때 욕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분노로 인해서 나만 시들어 갈 뿐이다. 이럴 때는 찰나멸 플러스를 생각해야 한다. 심념처를 말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배운대로 본대로 행하는 것이다.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이다.

"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

사념처에서 심념처에 대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마음보는 수행이다.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원한맺힌 자에게 적개심이 일어날 때 이는 마음이 매인 것이다. 불쾌한 느낌과 좋지 않은 지각이 결합되었을 때 망상이 된다. 이런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래서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D22.19)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야 할까?

부처님은 그 마음을 다시한번 알라고 했다. 성냄에 매인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성냄에 매인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더 이상 혐오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대신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아는 마음만 남아 있다. 부처님은 그 마음마저 알아차리라고 했다. 그래서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라고 한 것이다.

심념처는 무엇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두번 알아차리는 것이다. 첫번째 알아차림에서는 성내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이전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알아차린 마음을 또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알아차림으로 그치지 않고 알아차린 마음을 또 알아차리는 것이다. 부처님은 왜 두번 알아차리라고 했을까?

원한맺힌 자에 대해서 혐오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리면 나에게 좋은 일이다. 분노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게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생각은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마음마저 없애는 것이다. 나라는 자만의 마음마저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라며 두번 알아차리라고 했을 것이다.

새벽 세 시에 깼을 때 아무 생각이 없었다. 멍때리기 하기 좋을 시간이다. 멍하니 있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마치 백지가 된 듯한 때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빠나나경 시동을 걸었으니 이제 두번째 게송을 외워야 한다.

두번째 게송은 마라 나무찌가 부처님에게 말을 거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고행으로 몸이 피폐해진 것을 보고서 측은해 한다. 마치 죽을 사람처럼 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Namuc
ī karua vāca,
bh
āsamāno upāgami;
Kiso tvamasi dubbaṇṇo,
santike mara
a tava.

"
악마 나무치는 위로하여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
악마]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Stn.428)

네 구절로 된 짤막한 게송이다. 이 정도 게송이면 금방 외운다. 그러나 외고 나서 잊어버린다. 그래서 자꾸 꺼집어 내야 한다. 먼저 한구절 외고 그 다음 구절 욀 때는 먼저 왼 구절을 확인한다. 네 개의 구절을 모두 암송했을 때 다 왼 것이다.

게송을 외우고 나니 기쁨으로 충만했다. 새벽에 멍때리기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일종의 성취감 같은 것이다. 무엇보다 부처님 말씀이다.

담마는 담마를 지키는 자를 보호한다는 말이 있다. 가르침을 접하는 것도 좋지만 새기면 더 좋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제자들이 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 그 가르침을 읽고 이해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겨 두고자 하는 것이다.

새벽에 한시간가량 게송을 외웠다. 어제 외운 것을 확인했으니 25게송 중에 두개의 게송을 외운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긴 길이의 게송도 외울 수 있다. 그것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로마나이즈화된 알파벳이 박히는 것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수면부족이 될 수 있다. 게송을 외우고 난 다음 다시 잠을 청했다. 정신이 맑아서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러나 호흡을 지켜보면서 가만 있으면 잠이 든다.

잠들면서 악몽은 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 그런가? 경을 암송하고 자면 그 기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날 음주를 하고 잠자리에 든 것과 매우 대조된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면 꿈자리도 사납다. 분노로 가득 찬 자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무의식의 그림자를 깨울지 모른다. 탐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경을 암송하고 잠자리에 든다면 다른 것 같다. 확실히 보호받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
가르침이 잘 닦여지면, 공덕이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Thag.303)

첫번째 구절을 보면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한다."라고 했다. 이는 "법을 지키면 법이 보호한다."라는 말과 같다. 교통신호를 지켰을 때 보호되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하물며 부처님 가르침을 지켰을 때 어떠할까?

새벽에 게송을 외우고 잠 들었다. 새벽에 꿈을 많이 꾸는데 아무 생각없이 잠자리에 들면 악몽이기 쉽다. 그러나 경을 외우고 난 다음 잠자리에 들면 악몽은 없는 것 같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자애를 닦는 공덕에 대해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섬기고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만들고 확립하고 구현시켜 훌륭하게 성취하면, 열한 가지 공덕이 기대된다.”(A11.15)고 했다. 열 한가지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
수행승들이여,
(1)
편안히 잠자고,
(2)
행복하게 깨어나고,
(3)
악몽을 꾸지않고,
(4)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5)
비인들에게조차 사랑을 받고,
(6)
신들이 보호해주고,
(7)
불이나 독이나 무기가 해를 끼치지 못하고,
(8)
빠르게 삼매에 들고,
(9)
안색이 맑고,
(10)
혼미하지 않게 삶을 마치고,
(11)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세계에 이르게 된다.”(A11.1)

 

열 한가지는 자애수행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르침 모두에 해당된다. 경을 외우는 것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안심하고 잠 들었다. 세번째 항을 보면 "3) 악몽을 꾸지않고"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꿈을 꾸려거든 경을 암송해야 한다. 물론 행선도 있고 좌선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잠들기 전에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잠들기 전까지 사띠를 놓치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는 경을 외우고 암송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오늘 새벽 입증된 것이다.

잠 들기 전에 경을 암송하고자 한다. 경을 암송하고 잠자리에 들면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다. 경을 암송하고 자면 아름다운 꿈을 꿀 것 같다. 왜 그럴까? 담마는 담마를 지키는 자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꿈을 꾸려 거든 경을 암송해야 한다.


2022-02-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