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서 가치를 찾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4. 08:19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서 가치를 찾고자


빠다나경(Sn.3.2) 열 게송을 외웠다. 우리말이 아니다 보니 잘 외워지지 않는다. 우리 속담에 "열 번 찍어서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라고 했다. 자주 외우다 보면 외워진다. 아무리 긴 길이의 경이라도 한번 외우기로 마음먹으면 외워진다.

아직도 외워야 할 것이 많다. 빠다나경 25게송 중에서 이제 10게송 외웠을 뿐이다. 빠알리어 음과 우리말 뜻을 새기며 외우다 보니 천천히 외울 수밖에 없다. 오늘 새벽 1번부터 10번게송까지 확인하는데 30분 걸렸다.

경을 외울 때는 이전 게송을 확인하고 들어가야 한다. 확인없이 새로운 게송을 외우게 되면 앞 게송 외운 것은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게송을 외울 때마다 시간은 점차 늘어지게 되어 있다.

마지막 게송 외울 때 모두 다 외우게 될 것이다. 이전 게송을 확인하고 난 다음 새로운 게송 외우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긴 길이의 경도 외울 수 있다. 금강경 5,249자도 이런 방식으로 외운 바 있다.

경 외우기는 어제 오늘이 아니다
2004
년부터 외웠으니 꽤 오래 되었다. 그때 당시 금강경을 외운 것이 최초이다. 이후 2011년부터는 빠알리경을 외웠다.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외우고 있다. 그 시발점은 재작년 팔정도분석경(S45.8)을 외우고나서 부터이다.

경 외우기를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확실히 내것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단순히 경을 읽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내것이 아니다. 책을 열어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내것이 아니다. 머리 속에서 기억해 놓아야 내것이 된다. 그래서 마음에 새기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경외우기기는 무익한 것인지 모른다. 애써 힘들게 외우는 것에 대해서 쓸데없는 짓으로 보일지 모른다. 시간이 금인 세상에서 어쩌면 의미 없고 무가치하게 보일지 모른다. 쉽게 살 수 있음에도 사서 고생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늘 즐길거리를 찾는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즐길거리를 찾다 보니 마음은 늘 외적 대상에 가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쾌블쾌와 호불호가 일어난다. 이럴 때 마음을 내부로 돌리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호흡관찰 등 명상을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호흡관찰 하는 것만 명상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집중하면 어느 것이든지 명상이 된다. 경외우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을 외울 때는 강력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경을 외울 수 없다. 가장 좋은 시간대는 새벽이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듯 마음이 정화되었을 때 경을 외우면 잘 외워진다. 특히 이전에 외운 게송을 떠올리게 하는데 효과적 시간이다.

번뇌가 일어날 때 경을 외워야 한다. 걱정이나 근심이 생겼을 때 경을 외워야 한다. 새로운 게송을 외우고자 애쓸 때 근심과 걱정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삶이 무료하고 권태롭다면 인생이 길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늘 즐길거리를 찾는다. 마음이 늘 외부 대상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
수행승이여, 그대는 나이가 젊고 청년으로서 머리가 칠흑같고 젊음의 축복으로 가득차서 멋지고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이와 같은 그대가 감각적인 쾌락을 누리지 않고 출가할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대는 감각적인 쾌락을 먼저 누리고 나중에 출가하여 수행자의 삶을 사십시오."(자타카 167)

자타카 167번 싸밋디의 전생이야기에 실려 있는 천녀의 말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악마가 나이든 바라문으로 변신하여 말 한 것으로 나온다. 한마디로 "인생을 즐겨라!"라는 것이다. 특히 젊었을 때 즐기라는 것이다.

젊음과 즐김은 동의어처럼 쓰이는 것 같다. 광고에서도 젊음은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젊은이여,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지나가면 후회한다."라고 말한다. 정말 이 말은 맞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세상 사람들이 탐, , 치로 살 때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거슬러 가기 때문에 역류도라고 한다.

역류도로서 부처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서 잘 볼 수 있다. 새내기 수행승은 매혹적인 천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
천녀여, '나는 몇살에 죽을 것이다.'라고 나의 죽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 그 시간은 나에게 은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젊었을 때 수행자의 삶을 살아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것이다."(자타카 167)

싸밋디 장로는 새내기 수행승 일 때 천녀에게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매우 충격적이다. 젊은 시절에는 죽음은 멀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나와 관계없는 것으로도 생각했다. 나이 들어 수명대로 살다가 죽는 줄 알았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당연히 누구도 나의 죽음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나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젊은 새내기 수행승 싸밋디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게송으로 말한다.

"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S1.20)"

천녀나 악마가 말하는 시절과 부처님의 제자가 말하는 시절은 다르다. 천녀나 악마가 말하는 시절은 젊은 시절의 시간이고, 제자가 말하는 시절은 죽음의 시간이다. 그런데 죽음의 시간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제 죽음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죽음은 나이가 젊다고 해서 피해 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사신은 누구에게나 어느 시기에나 예고 없이 찾아 온다. 이렇게 본다면 청년출가는 타당한 것이다.

누군가 젊은 시절에는 즐기며 살다가 수행은 노년에 해도 늦지 않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누군가 기대수명을 보장해 준다면 노년에 수행자로 살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기대수명은 기대수명일 뿐이다. 누구도 나의 안전과 수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S4.9)라고 했을 것이다.

남들 보기에 의미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 경외우기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남보기에 의미 없어 보이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발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발을 들 때는 의도가 있어야 든다. 발을 옮길 때는 아는 마음이 있다. 행선은 정신과 물질, 원인과 결과를 알게 해 준다. 이런 행선의 의미를 모르는 자가 볼 때는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일을 하고 있다. 감각적 즐거움에 도움이 안되는 것들이다. 그것도 애써 하고 있다. 이번에 책 5권을 만든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번에 2013년 담마와 관련된 4권의 책과 불교음악과 관련된 1권을 합하여 5권 만들었다. 이제 책이 모두 50권이 되었다. 출판하고자 만든 것이 아니라 소장용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것도 무의미한 행위로 비칠 것이다.

 


남들 보기에 돈도 되지 않는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서 가치를 찾고자 한다. 어쩌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고 자신만의 즐길거리인지 모른다.

2022-03-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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