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게송 외우기 하는 것은
흔히 사구게 하면 한자사구게가 연상된다. 금강경 사구게가 대표적이다. 네 글자로 된 사행의 시를 말한다.
사구게라 하여 한자사구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빠알리어에도 사구게가 있다. 빠알리 경전을 열어 보면 수많은 시가 있는데 사구 형식으로 되어 있다. 법구경이 대표적이다.
사구게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무상게일 것이다. 천도재 할 때 반드시 독송된다. 이는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는 짧은 게송이다.
무상게는 부처님 가르침을 잘 압축해 놓은 것이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어느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생멸이 그쳤을 때 그것이 최상의 행복임을 말한다.
무상게에서는 생멸이 두 번 나온다. 앞 생멸은 제행무상에 대한 것이고 뒷 생멸은 오온무상에 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온의 생멸이다. 오온에서 생겨나는 갖가지 현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생멸을 잘 관찰했을 때 열반이라는 최상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한자는 뜻으로 되어 있다. 글자 하나가 이미지이고 상징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해석이 있게 된다. 그러나 소리 글자로 되어 있는 빠알리어는 그 뜻이 분명하다. 그래서 앞 생멸은 'uppādavaya'이고, 뒷 생멸은 'Uppajjitvā nirujjhanti'가 되어 단어의 쓰임새가 다르다.
한자게송은 네 자씩 되어 있어서 암송하기 좋다. 그러나 글자가 이미지 내지 상징으로 된 것이어서 논리적 설명에는 한계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설법 위주이기 때문에 논리적 가르침이 많다. 그 결과 방대한 8만4천 법문이 되었다.
부처님의 논리적 가르침을 한문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이유로 중국에서 선종이 발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짤막한 게송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한문경전을 읽을 수 없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금니 사경 경전을 보면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일 뿐이지 감히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암호문 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이런 난감함은 금강경을 외울 때도 그랬다.
한문으로 된 금강경을 외운 바 있다. 2004년도의 일이다. 해설 없이 외운다는 것은 뜻도 모르고 주문을 외우는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외우고 나면 그 뜻이 드러난다. 외우는 과정에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빠알리 게송외우기도 마찬가지로 본다.
빠알리 게송을 외우고 있다. 오늘 새벽 외운 것은 빠다나경(Sn.3.2)에 실려 있는 11번째 게송이다.
"Tassa mevaṃ viharato,
pattassuttamavedanaṃ;
Kāmesu nāpekkhate cittaṃ,
passa sattassa suddhataṃ"(Stn.437)
빠알리 게송은 생소하다. 한문게송을 접하는 것처럼 난해하다. 마치 암호문을 보는 것 같다. 이런 경우 생소한 단어는 빠알리 사전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해석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게송에 대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와 같이 지내며
최상의 느낌을 누리니,
내 마음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기대가 없다.
보라, 존재의 청정함을!"(Stn.437)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위한 고행 중에 하신 말씀이다. 악마와 싸워 이긴 것에 대한 게송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악마는 오온으로서의 악마를 말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욕망, 혐오, 갈애, 권태 등 갖가지 심리현상을 악마의 군대로 본 것이다.
게송은 매우 짤막한 사행의 시로 되어 있다. 한구절은 단어가 두 개 내지 세 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 길이라면 외우는데 30분가량 걸릴 것이다. 그러나 다 외웠다고 해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새겨 두려면 하루에 최소한 세 번 이상 확인해야 한다. 매일 확인하면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글자가 선명하게 된다.
게송 외우기를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먼저 번뇌에서 해방됨을 들 수 있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같은 선거철에 특히 그렇다. 그러나 게송외우기를 하면 그 순간만큼은 번뇌에서 벗어난다.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게송을 외운다. 게송을 외우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처님 말씀이다. 부처님 말씀을 새길 때 뿌듯한 느낌이다. 게송에서 "passa sattassa suddhataṃ(보라, 존재의 청정함을!)"라고 했을 때 마치 부처님이 현전하는 것 같다.
요즘은 빠알리 게송을 외우고 있다. 불교입문 초창기 때는 한문 게송을 외웠었다. 한문게송도 외우면 맛이 난다. 그러나 빠알리게송만 못한 것 같다. 왜 그럴까? 빠알리게송은 부처님 원음이기 때문이다.
빠알리게송을 외우면 부처님 육성을 접한 것 같다. 부처님도 이 언어로 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제자들이 이 게송을 암송했을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게송을 외우면 힘을 받는 것 같다.
오늘도 내일도 빠알리게송을 외울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경을 외우는 것이다. 마치 안되는 것을 하게 하는 것 같다. 글쓰기보다 더 짜릿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했을 때 그 기분은 느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치매예방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집착일까?
2022-03-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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