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괴로움의 끝을 보지 않고서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9. 08:28

괴로움의 끝을 보지 않고서는

무언가 몰두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현재 나에게는 게송외우기가 최상이다. 게송외우기를 하면 잡생각이 나지 않는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 새벽에는 빠나나경 11개 게송을 두 차례에 걸쳐 암송했다. 한번 암송하는데 20분 가량 걸린다. 빠알리 게송의 뜻과 의미를 새기면서 천천히 암송하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에 암송하다 보니 11게송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박힌다. 처음에는 희미했으나 날이 갈수록 또렸해지는 것 같다.

빠알리게송을 암송하고 나면 상쾌하다. 해낸 것에 대한 성취감이 크다. 충만감은 부수적으로 따라 온다. 애써 외운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빠다나경은 모두 25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아득하고 먼 길을 가는 것 같다. 그 길은 탄탄대로 꽃길이 아니라 가보지 않은 길이고 울퉁불퉁 험난한 길과 같다.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우거진 숲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S22.84)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길과 오른쪽길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부처님은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S22.84)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을까? 이는 이념스펙트럼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오른쪽 길로 가라고 한 것은 바른길로 가라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팔정도의 길이다. 또 다른 말로 중도라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은 두 갈래 길에서 바른길로 가라고 했다. 팔정도의 길로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길은 험난하다. 도중에 우거진 숲도 만나고 늪지대도 만나고 절벽도 만난다. 마침내 모든 난관을 통과하면 드넓은 푸른 초원이 나타난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부처님이 말하기를 "커다란 우거진 숲이란 무명을 말하는 것이다. 커다란 깊은 늪지대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험준한 절벽이란 분노와 절망을 말하는 것이다. 풍요로운 평원이란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S22.84)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경외우기를 하다 보면 아득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언제 다 외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꾸준히 뚜벅뚜벅 가다 보면 점차 목적지에 다가간다. 반을 넘기면 가속화 되는 것 같다. 마침내 다 외우게 되었을 때 열반의 초원에 이르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자전거를 타고 국토를 종단한다. 더 나아가 세계를 달린다. 대륙에서 대륙으로 라이딩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오토바이로 대륙을 횡단하기도 한다.

걸어서 세계 끝까지 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세계의 끝에 이를지 모른다. 그런 세계는 지구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주시대에 우주끝까지 가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S2.26)”라고 했다.

걸어서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없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로도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없다. 우주선으로도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물리적 공간에서 세계의 끝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또다른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

경을 보면 두 개의 세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면적 세계와 내면적 세계를 말한다. 전자는 눈에 보이는 세계, 즉 기세간이라 하여 짝까발라로까(Cakkavālaloka)라고 한다. 후자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조건세계로서 상카라로까(Sakhāraloka)라고 한다.

선인은 외면 세계의 끝에 이르고자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물리적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광속으로 달리는 우주선을 타도 우주 끝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시선을 안으로 돌리면 내면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괴로운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되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한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지금 괴롭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백팔배를 하고나면 조금 나아질지 모른다. 막연하게 걸을 걸을 수도 있다. 걷다 보면 새로운 기분이 되어 잍시적으로나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백팔배가 아니라 삼천배를 해도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걸어서 국토종단이나 대륙종단을 해도 괴로움을 뿌리 뽑지 못할 것이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속도를 내도 번뇌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

부처님은 "걸어서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남도 없다네." (S2.26)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리적 공간에서 여행을 통해서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여행으로 괴로움을 끝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괴로움을 끝장내려면 세계의 끝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을 끝장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 끝까지 달려서는 끝장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을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 이 작은 몸과 마음에서 괴로움을 끝장내야 한다. 그것은 팔정도를 닦아서 가능한 것이다.

괴로움의 끝은 여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몸과 마음을 관찰함으로서 괴로움의 끝을 볼 수 있다. 팔정도의 길로 가면 괴로움의 끝에 이를 수 있다.

왼쪽과 오른쪽 길, 두 갈래 길이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팔정도의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팔사도의 길이다. 늘 오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나 순탄치만은 않다. 길을 가다 보면 우거진 숲도 만나고 늪지대도 만나고 절벽도 만나게 된다. 이 모든 난관을 뚫었을 때 마침내 풍요로운 평온에 이르게 된다. 열반의 평원이다. 괴로움의 끝이다.

경을 암송하면 일시적으로 번뇌에서 해방된다. 성취감에 따른 충만은 덤으로 따라 온다. 남들은 백팔배나 달리기, 라이딩 하는 것으로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나는 게송외우기로 벗어나고자 한다.

본래 인간은 괴로운 존재이다. 괴로움 덩어리인 이 몸과 마음에서 괴로움의 끝을 보아야 한다. 괴로움의 끝을 보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장낼 수 없다. 육척도 안되는 몸에서 괴로움의 끝장을 보고자 한다.

2022-03-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