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돈이 안되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20. 08:58

돈도 안되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일


고요한 새벽이다. 왕복 10차선의 관악대로도 새벽에는 조용하다. 모두 잠들어 있을 때 홀로 깨어 있다. 이럴 때 무엇을 해야 할까? 게송 외우기만한 것이 없다.

빠다나경 외우기가 절정을 치닫고 있다. 왜 절정인가? 그것은 삶과 죽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외쳤다.

"
에사 문장 빠리하레
디랏뚜 마마 지비땅
상가메 마땅 세이요
양 쩨 지베 빠라지또"

 


불과 32자 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게송이다. 빠다나경(Sn.3.2) 25게송 중에서 16번째 게송이다. 내용은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tn.442)라고 번역되어 있다.

부처님은 죽음을 각오한 정진을 했다. 요즘말로 "죽기살기로" 수행한 것이다. 그래서 악마와 싸워진다면 비굴하게 사는 것으로 보았다. 이럴 때 80년 서울의 봄 때 데모가가 떠 오른다. 그때 "무릎 꿇고 살기 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라는 노래를 불렀었다. 일명 '훌라송'이었다.

목숨을 걸었을 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악마와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악마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물러서지 않았다.

악마의 군대, 마군 또는 마구니는 어떤 것일까? 놀랍게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마음의 오염원이다. 이는 까마(욕망), 아라띠(혐오), 쿱삐빠사(기갈), 딴하(갈애), 티나밋다(권태와 수면), 비라(공포), 비찌낏짜(의심), 막꼬탐보(위선과 고집)을 말한다.

악마의 군대에는 팔군이 있다. 이밖에도 경에서는 실로꼬(명예)와 삭까로(환대) 그리고 삼우깜세(자기칭찬)와 아바자나띠(타인비하)도 악마의 군대 범주에 넣었다.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요소에 대해서 악마의 군대로 본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과 싸웠다. 악마의 군대라고 하여 외부의 적과 싸운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과 싸운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라고 했다.

부처님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겨서 승리자가 됐다. 그 절정이 빠다나경 16번 게송일 것이다. 악마에게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 것이다. 아니 싸워서 죽기 원한 것이다. 그래서 악마에게 굴복한 삶에 대해서 "디랏뚜 마마 지비땅(dhiratthu mama j
īvita)"이라 하여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Stn.442)라고 했다.

이제까지 삶을 돌아본다. 육십평생 나는 얼마나 떳떳했는가? 위선과 고집, 혐오, 갈애 등 온갖 부정적 오염원에 지배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삶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삶은 부끄러운 삶이다. 악마의 군대에 지배된 삶이다. 악마로 삶을 산 것이다.

빠다나경을 외우고 있다. 정진의 경이라고 번역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에 성도과정에서 악마의 군대와 싸운 것에 대한 경이다. 모두 25개 게송으로 이루어진 긴 길이의 경이다. 이제 16번째 게송을 외웠다. 악마의 군대에 굴복하여 비굴하게 사는니 차라리 싸워서 죽는 것이 낫다는 게송이다. 수행자라면 이런 패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게송을 외운다고 하여 오염원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외우는 것은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다. 게송을 외우는 순간만큼은 번뇌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외우기는 훌륭한 수행이 된다.

게송외우기는 사마타수행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게송을 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집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전에 외운 게송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게송을 외울 때마다 시간이 늘어난다. 그 시간만큼 집중되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돈도 되지 않고 재미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고생을 사서 하는 고행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돈도 안되고 재미도 없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매일 한다.

사람들은 재미를 찾는다. 눈으로 귀로 늘 즐거움의 대상을 찾는다. 입으로는 맛있는 것을 찾는다. 인터넷 뉴스를 보거나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를 추구하다 보면 거기에 빠져 버린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악마의 영역에 들어 갔다고 말한다. 악마에게 지배당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늘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세상 사람들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재미를 추구할 때 악마의 영역에 들어 가는 것으로 본다. 악마에게 혼을 빼앗기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늘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늘 현상의 생멸을 보라는 것이다.

수행자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할 때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등 거꾸로 간다. 경을 외우고 암송하는 것도 해당된다. 수행자는 세상사람들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수행은 세상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자들이 수행자들이다. 그런데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이 사실 알고 보면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타카를 보면 하나의 정형구가 있다. 그것은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하나도 가져 가지 못했다. 재산은 그대로 남아 있다."라는 취지의 글을 말한다. 한평생 돈 모으는 삶에 올인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가져 가지 못한 것이다.

재산은 물질적 재산도 있지만 마음의 재산도 있다. 마음의 재산은 어떤 것인가? 경에서는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이 있다.”(A7.6)라고 했다. 이와 같은 칠성재는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매일 게송을 외우고 있다. 남이 보기에 돈도 안되고 무의미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이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수행하는 것이 그렇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 게송을 외운다.


2022-03-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