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튕기는 순간 무상을 지각할 수 있다면
잠이 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경우에는 게송 외우기만한 것이 없다. 도중에 깼을 때나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을 때 최상이다.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번뇌가 많은 경우도 있지만 심리적인 이유도 있다. 오지 않는 잠에 대해 억지로 자려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럴 경우 차라리 일어나는 것이 낫다. 일어나서 경행하는 것이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도중에 깼을 때는 잠자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게송을 외운다. 네 구절로 되어 있는 사구게를 말한다.
사구게 외우기는 어렵지 않다. 한구절은 세 단어에서 다섯 단어로 되어 있고 글자 수는 길어야 열 개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새벽 외운 게송의 첫 구절을 보면 "빠갈헷떼나 나 디산띠(Pagāḷhettha na dissanti)"로서 세 단어에 아홉 글자이다. 이는 "보지 못하고 가라 앉아 버린다."(Stn.443)라는 뜻이다.
사구게는 누구나 외울 수 있다. 머리가 좋은 것과 관련 없다. 노력하기 나름이다. 그럼에도 한구절도 외우지 못한 사람이 있다. 쭐라빤따까가 대표적이다.
쭐라빤따까는 기억력에 문제가 있었다. 함께 출가한 형이 사구게를 알려 주었지만 몇달이 되어도 외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형 마하빤따까는 동생에게 집으로 가라고 했다.
쭐라빤따까는 외는 것에 한계가 있어서 쫓겨날 처지에 있었다. 이를 가엽게 본 부처님이 하나의 문제를 내 주었다. 한단어만 외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것은 "라조하라낭(rajoharaṇaṃ)"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티끌제거"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쭐라빤따까에게 흰 천을 하나 주었다. 힌 천으로 그릇을 닦을 때 "라조하라낭, 라조하라낭,..."하라고 했다. 우리말로 "티끌제거, 티끌제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흰 천은 티끌이 제거 되기는 커녕 점점 더 더러워 지는 것이었다. 마치 접시 닦는 행주처럼 되었다.
쭐라빤따까는 지능이 낮은 수행승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한역 경전에서는 ‘주리반특(周利槃特)’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아라한이 되었다. 어떻게 아라한이 되었을까? 흰 천으로 "티끌제거, 티끌제거,..."라며 외다가 아라한이 된 것이다. 한단어만 반복적으로 외우며 그릇을 닦다가 깨달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테라가타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나의 계발은 더디었으니,
예전에 나는 멸시당했다.
형은 나를 쫓아내면서,
‘너는 이제 집으로 가라.’고 했다.”(Thag.557)
“형에 의해 쫓겨난 나는
승원의 문지방에서,
교법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우울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Thag.558)
“세존께서 그곳에 오시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나의 팔을 잡고 나를
승원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Thag.559)
“스승께서는 나를 애민히 여겨
‘한 쪽으로 물러나 잘 가호하여
이 청정한 것에 마음을 정립시켜라.’라고
발을 닦는 천조각을 건네주었다.” (Thag.560)
“스승의 말씀을 듣고서는
가르침을 기뻐하며 지냈고,
최상의 의취를 얻고자
실로 나는 삼매를 닦았다.” (Thag.561)
“전생의 삶을 나는 알았고,
하늘눈은 청정해졌다.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562)
“빤따까는 천명으로
자신을 나투면서,
때를 알려줄 때까지
즐거운 암바바나 숲에 앉아 있었다.” (Thag.563)
“그러자 스승께서는 내게
때를 알리는 사자를 보내셨으니,
때가 알려지자,
허공을 통해 나는 다가갔다.” (Thag.564)
“스승의 양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내가 앉는 것을 아시고,
스승께서는 공양을 허용하셨다.” (Thag.565)
“일체세계의 보시를 받는 님,
헌공의 수용자이신 님,
인간의 복전이신 님께서는
그 공양을 받이들이셨다.” (Thag.566)
쭐라빤따까는 가장 간단한 단어 "라조하라낭"을 반복적으로 외우면서 정신활동을 기울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궁극적인 앎이 생겨났다. 이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이 천조각은 원래 청정했다. 이 업으로 획득된 몸 때문에 오염되어 달리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하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마음도 그렇다.”(Thag.II.236)라고 했다. 쭐라빤따까는 그릇을 닦으면서 무상을 본 것이다.
쭐라빤따까는 흰 천조각을 들고 “티끌제거, 티끌제거,…”라고 염하자 무상에 대한 지각이 생겨났다. 이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괴멸에 대한 쇠퇴를 확립하여 그 가운데 선정을 거듭나게 해서, 선정에 입각해서 통찰을 확립하여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Thag.II.236)라고 했다.
쭐라빤따까는 단어 하나 외움으로 인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사실상 그릇을 닦다가 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삼장을 다 외워도 무상에 대한 지각이 없으면 깨닫기 힘들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괴멸에 대한 쇠퇴 확립"이라고 했다.
어느 스님이 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렸다. 봄에 눈 온 것에 대해서 카메라에 담고자 했으나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산중에서 하루하루 무상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취지의 글이다. 이에 대하여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라는 댓글을 남겼다. 그러자 "관념이 아니면 좋겠지요."라며 답글을 주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은 짧다. 아마 0.5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손가락을 튕기는 찰나에 십만억의 느낌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Srp.II.321)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손가락 튕기는 순간에서 무한의 생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했을 것이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 무상을 볼 수 있다. 손가락 튕길 때 "딱"하고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에서 무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잠시 지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환술, 아지랑이, 꿈, 선화륜, 신기루, 파초 등으로 견실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Vism.20.104)라고 했다.
바보 수행승의 대명사 쭐라빤따까는 흰 천으로 그릇을 닦다가 아라한이 되었다. 그는 "라조하라낭"이라는 단어 하나를 반복적으로 외면서 흰 천이 오염되어 가는 것을 보고 무상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팔만사천경을 암송한다고 하여 깨닫는 것은 아니다. 주문을 평생동안 암송한다고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무상에 대한 지각에서 온다. 이는 경에서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손가락 튕기는 그 짧은 순간 어떻게 무상을 지각해야 할까? 이는 인연담에서와 같이 "괴멸에 대한 쇠퇴의 확립"일 것이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 "딱"소리에서 무상을 지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본다. 소리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지만 한번 생겨난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괴멸이다.
생겨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찰나멸이다. 생겨나자 마자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괴멸을 보라고 했을 것이다. 순간순간 괴멸을 보는 것이다. 무상에 대한 지각도 아마 괴멸에 대한 지각일 것이다.
행선을 하다 보면 발을 떼는 소리가 "짝"하고 난다. 맨발로 장판 위를 걸었을 때 난다. 송판 위라면 더 잘 날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행선이 잘 될 때 발바닥이 짝짝 달라붙는 것 같다고 했다. 마치 손가락 튕기는 순간에 괴멸의 무상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 게송외우기를 한다. 다행히도 사구게를 외울 정도의 기억력은 있다. 네 구절 외는데 30분가량 걸린다. 그러나 되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 이상 점검해야 내것이 된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또 하나의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행선이다. 가능하면 6단계 행선을 하고자 한다. 일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무상에 대한 지각일 것이다.
발을 방바닥에서 떼는 순간 "짝"하고 소리가 난다. 손바닥을 부딪쳐 나는 소리와도 같고 손가락을 튕겨서 나는 소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소리가 생겨나는 데는 이유가 있지만 사라지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즉시 사라진다. 생겨나자 마자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괴멸이다.
소리에서 괴멸을 본다면 무상에 대한 지각으로도 볼 수 있다. 소리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있다면 계속 소리가 날 것이다. 그러나 시각은 사람을 속이는 것 같다. 눈으로 보는 것은 계속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A9.20)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른다. 무상에 대한 지각은 시각보다 청각에서 더 보기 쉬운 것 같다.
잠이 오지 않아 스마트폰에 글을 치다 보니 날이 밝았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억지로 잘 필요 없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그럴 경우 게송을 외우거나 일어나서 행선을 하는 것이 좋다. 둘 다 모두 공덕이 된다.
게송외우기와 행선하기는 교학과 수행에 대한 것이다. 또한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발바닥을 뗄 때 "짝"하는 소리에서 괴멸을 보는 것이다. 아니 행위 하나하니에서 무너짐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A9.20)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2022-03-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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