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 경 외우기에 딱 좋은 나이인데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있다. 왜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을까? 거친 말을 하기 때문일까? 초기경전에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 이는 우다나에 있는데“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Ud6.4)라고 표현되어 있다.
입에 칼을 무는 것은 논쟁할 때이다. 서로 견해가 다를 때 마치 입에 칼을 문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이다. 이교도들이 논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사견은 선천적으로 장님인 자가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다. 어느 한 부위를 만지고서는 “이것이 코끼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를 두고 외도들은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적으로 본다면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라도 경전을 보지 않으면
책을 읽지 않는다.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초기경전을 접하고 나서부터는 책을 멀리 하고 있다. 종종 자신이 쓴 책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 읽어 보지는 않는다. 이런 점은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경전을 가까이하다 보니 책이 시시해진 것이다.
나에게는 하루라도 경전을 보지 않으면 가시가 돋는 것 같다. 이는 감각적인 삶에 빠진다는 말과 같다. 눈이나 귀 등 감각적 접촉을 통해서 즐거움을 찾는 것을 말한다. 유튜브에 빠지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요즘은 유튜브가 최대의 적이 된 것 같다. 예전에는 TV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하릴 없이 채널만 돌리며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허무 개그를 보는 것처럼 남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서일까 요즘은 유튜브가 TV를 대체한 것 같다.
마음을 잡아야 한다. 유튜브를 끊어야 한다. 유튜브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다 보니 유튜브에 중독된 것 같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무엇보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마음을 다잡는데 있어서
마음을 잡는데 있어서 암송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글쓰기도 도움이 되지만 암송하는 것만 못하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암송이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긴 길의 경을 암송하고 나면 마음이 매우 상쾌해진다.
암송은 이미 외운 경을 읊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할 수도 있고 소리 내어 할 수도 있다. 기억한 것을 꺼집어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암송했을 때 그 기분은 긴 길이의 글을 써서 완성했을 때 보다 성취감이 더 높다. 그래서 암송하고 나면 “사두!사두!사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마음을 잡는 것을 너머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엄하게 단속하고 통제해야 한다. 왜 그런가? 마음은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 되기 때문이다.
법구경에 마음의 품이 있다. 마음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마음은 늘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고, 마음은 기본적으로 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고 했고, 또한 “마음은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했다.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마음은 제어하지 않으면 늘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나에게는 경을 암송하는 것이 최상이다. 특히 새로운 경을 외우는 것이다.
빠다나경(Sn3.2)을 외우고자
십이연기분석경을 작년 말에 외웠다. 외운지 한달이 넘었다. 그동안 외운 경을 매일 암송했다. 속으로도 암송하고 소리내서도 암송했다. 마치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면서 적멸의 즐거움을 누리듯이 나도 한번 외운 경을 암송함으로써 암송의 즐거움을 한달동안 맛보았다.
이제 새로운 경을 외울 때가 되었다. 이번 2월달 부터는 빠다나경을 외우고자 한다. 숫따니빠따 마하박가의 두 번째 경인 ‘정진의 경’(Sn3.2)이 그것이다.
빠다나경을 외우기로 마음먹은 것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빠일리 경과 게송을 외웠지만 주로 예불문과 근본가르침에 대한 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외울 경은 ‘정진’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이 정진하여 악마와 싸워 이기는 것에 대한 경이다.
부처님은 악마와 싸워서 이겼다. 여기서 악마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경에서는 오온으로서 악마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자신이 악마임을 말한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한 악마의 지배하에 있음을 말한다.
오온이 왜 악마인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번에 외우고자 하는 빠다나경을 보면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고 불라고,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리운다.”(Stn.436)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악마라고 하여 무서운 형상을 한 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번뇌가 악마인 것이다. 그 번뇌는 다름 아닌 오온이다. 욕망, 혐오, 기갈, 갈애라 불리는 악마는 오온에 있어서 행온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오온에 대하여 “칼을 뽑아든 살인자”(A6.103)라고 했다.
오온에 대하여 왜 칼을 뽑아든 살인자라고 했다. 마치 살인자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오온이 악마가 되어 나를 해치려 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오온을 살인자로 보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에서 부처님이“수행승들이여, 다섯 명의 살인자인 원수는 존재의 집착다발, 즉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을 말한다.”(S35.238)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경을 외운다. 나에게 있어서 경 외우기는 글쓰기 보다 더 강렬한 것이고 행선이나 좌선 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경 외우기는 정진이라는 사실이다. 정진을 하기 위해서 ‘정진의 경(빠나다경, Sn3.2)’을 외우고자 한다.
경 외우기를 정진으로 삼고
빠다나경은 모두 25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에 한게송씩 외우면 25일 걸릴 것이다. 그러나 더 걸린다. 아마 배로 잡아야 할 것 같다. 넉넉잡고 두 달 예상한다.
경을 외우기가 쉽지 않다. 이전 게송 외운 것을 확인하지 않고 새 게송 외우기에 들어가면 모두 다 외워지지 않는다. 새 게송 외우기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이전 게송 외운 것을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마지막 게송 외울 때는 모두 다 외우게 된다.
경을 다 외우고 나면 마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포토메모리(Photo Memory)’라고 했다.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을 말한다.
경 외우기를 정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빠다나경을 보면 부처님의 정진에 대하여 매우 가혹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이러한 정진에서 나오는 바람은 흐르는 강물조차 마르게 할 것이다. 이처럼 용맹을 기울이는 나에게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Stn.433)라고 했다.
부처님은 성도직전에 붙퇴전의 정진을 했다. 피가 마르고 담즙도 점액도 마르는 용맹정진을 한 것이다. 그래서 여덟 마라의 군대(魔軍)을 물리쳤다. 그것은 욕망의 군대, 혐오의 군대, 기갈의 군대, 갈애의 군대, 권태와 수면의 군대, 공포의 군대, 의혹의 군대, 위선과 고집의 군대를 말한다.
부처님은 여덟 마군과 싸우기 위해서 불퇴전의 결의를 다졌다. 빠다나경에서는 문자풀을 걸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머리둘레나 깃발이나 무기에 흰 천을 묶는 것과 같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진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다섯 가지 정진의 의미가 있는데
정진과 관련된 빠알리어가 많다. 최근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인 빤냐완따 스님의 글을 밴드에서 보았다. 거기에는 정진과 관련된 다섯 가지 빠알리어가 있었다. 다섯 가지는 어떤 것일까? 차례로 나열하면 봐야마(vāyama), 뷔리야(viriya), 압빠마다(appamāda), 빠다나(padhāna), 아따빠(ātapa)이다.
봐야마(vāyama)는 강도가 가장 약한 정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는 영어로 ‘striving, effort’로 해석되는데 ‘노력’의 의미가 강하다. 팔정도분석경(S45.8)에서는 삼마봐야마라 하여 ‘바른 노력’ 또는 ‘정정진’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뷔리야(viriya)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vigour; energy; effort; strength’의 뜻이다. ‘힘’과 관련 있다. 그래서 뷔리야는 오근과 오력, 칠각지에서 사용된다. 오근에서는 ‘정진의 능력’이라 하여 “뷔리야 인드리야”(S48.9)라고 했고, 오력에서는 ‘정진의 힘’이라고 하여 “뷔리야 발라”(S48.43)라고 했다. 또 칠각지에서는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라고 하여 “뷔리야 삼봇장가”(S46.3)라고 했다.
압빠마다(appamāda)도 정진의 의미가 있다. 압빠마다가 왜 정진의 의미일까? 이는 압빠마다라는 말이 사띠와 거의 동의로서 ‘늘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한자어로는 ‘불방일’의 뜻이다. 영어로는 ‘vigilance; earnestness’로 설명된다. 이렇게 본다면 압빠마다는 “수행의 대상을 놓치지 않음, 잊지 않음, 항상 깨어 있음”의 뜻이 된다. 법구경에서는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다.”(Dhp.21)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깨어 있지 않은 자, 사띠가 없는 자는 죽음 목숨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고 했을 것이다.
빠다나(padhāna)가 정진인 것은 부처님의 성도과정과 관련이 있다. 살인자와 같은 오온, 악마와 같은 오온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가 마르는 등 용맹정진을 필요로 한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빠다나경에서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Stn.440)라고 표현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센 정진의 의미로 본다. 이는 빠다나가 ‘[adj.] chief; foremost. (nt.) exertion; effort; striving’의 뜻인 것으로도 확인된다. 빠다나를 ‘용맹정진’으로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따빠(ātapa)이다. 빤냐완따 스님은 아따빠에 대하여 십이연기분석경(S45.8)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삼마사띠와 관련하여 “ātāpī sampajāno satimā”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고”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따빠는 ‘힘써 노력함’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영어로는 ‘sunshine; heat of the sun’의 뜻이고, 한자어로는 ‘陽光, 熱, 熱心’의 뜻이다.
정진이 왜 중요할까?
정진에 대하여 다섯 가지 빠알리어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다섯 개 중에서 봐야모, 뷔리야, 빠다나는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이는 팔정도분석경에서 정진과 관련된 사정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세가지를 통합한 말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일까? 상윳따니까야 삼마빠다나상윳따(S49)가 그것이다. 이를 ‘올바른 노력의 모음’이라고 한다.
삼마빠다나(sammappadhāna)는 정근을 뜻한다. 팔정도분석경에서 삼마와야모와 같은 것이다. 이는 억제, 버림, 노력, 수호로 표현된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것(akusala)은 억제하고 버려야 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kusala)은 노력하고 수호해야 한다.
정진이 왜 중요할까? 사람들은 사띠, 사띠라고 말하지만 37조도품을 보면, 37개중에서 정진(viriya)에 대한 것이 9개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사띠(sati)로서 8개이다. 지혜(pañña)는 5개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정진이 최상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의 말씀으로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D16)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는 “불방일정진!”이라는 뜻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 경 외우기에 딱 좋은 나이인데
오늘부터 빠다나경을 외우기로 했다. 모두 25개의 게송을 외우는데 두 달가량 걸릴 것이다. 이제까지 외워 왔던 것처럼 하면 된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외다 보면 다 외워진다. 나중에는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아무리 긴 길이의 경이라도 외울 수 있다.
경을 외우기로 한 것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흐트러진 마음을 잡고 삶을 좀더 진지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적극적인 삶, 능동적인 삶이다. 이런 삶에 글을 쓰거나 행선이나 좌선 등 수행하는 것도 좋지만 나에게는 경을 외우는 것만 못한 것 같다.
흔히 나이 탓을 한다. 나이가 먹어서 공부를 못하고 나이가 먹어서 수행을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게 된다. 식사대사(食事大事), 즉 밥 먹는 것이 하루일과 중에 가장 큰 행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죽은 목숨이다.
법구경에서는 방일자에 대하여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깨어 있지 않는 자를 말한다. 감각을 즐기며 밥 먹는 것을 낙으로 산다면 이미 죽은 자와 같다. 숨만 쉬고 있는 ‘좀비’와 같다. 나이 먹었다고 이런 삶을 살 수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어른이 되려면 번뇌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탐, 진, 치에 찌들어 산다면 어린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목숨이 다 하는 그 순간까지 정진해야 한다. 부처님처럼 피가 마르도록 용맹정진 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경 외우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내 나이가 어때서? 경 외우기에 딱 좋은 나이인데.
2022-02-0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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