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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권 담마의 거울 2013 I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9. 14:53

46권 담마의 거울 2013 I

 

 

에스엔에스를 보면 과거 글에 대한 것이 보인다. 페이스북에서는 일년 전의 오늘에 쓴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를 소환하여 보여준다. 심지어 이년전 것이나 삼년전 것, 멀리는 십년전 것도 보여준다.

 

과거를 소환하지 않는다. 이미 지난 일이다. 다시 불러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옛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는 즐거운 것도 있고 쓰라린 것도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거의 대부분 빛나고 화려한 것들을 소환한다. 아프고 쓰린 것은 올리지도 않기 때문에 소환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빛나고 영광된 순간은 기억하려 하지만 힘들고 괴로운 것은 일부로 멀리 하는 것 같다.

 

책의 서문을 쓸 때 과거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정리된 책을 만들 때 목차와 함께 서문을 쓰는데, 이때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번에 책으로 만든 ‘46 담마의 거울 2013 I’도 그 중의 하나이다.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인간의 타락과 계급발생의 원리

2. 사띠(sati)의 가장 올바른 표현

3. 기억이 실종된 마음챙김

4. 장애에 대한 법륜스님의 유물론적 견해

5. 갈애는 절망에 이르는 길

6. 일념즉시무량공간, 일미진중함무량시간

7. 삼마사띠(正念)가 정온(定蘊)에 속해 있는 이유

8. 반야심경 만트라는 아라한 찬가

9. 왜 내 몸만 바라 보지요?

10. 자애경 번역 비교분석

11.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12. 오온과 오취온, 무더기인가 존재의 다발인가

13.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다

14. 에까야나, 유일한 길인가 하나의 길인가

15. 재가수행자와 열반의 보편성

16. 사념처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지름길

17. 금강경의 ‘실지실견(悉知悉見)’ 악용사례

18.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

19. 곡차와 심념처(心念處)

20.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21.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

22. 미래의 노후수행공동체

23. 수행자는 굶지 않는다

24. 승리는 원한을 낳고

25.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

26. 적정의 맛

27.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28. 그 많던 비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29. 현법열반론은 단멸론

46권 담마의 거울 2013 I.pdf
2.89MB

 

모두 29개의 글이 실려 있다. 편집을 해보니 349페이지에 달한다. 기간은 201311일부터 33일까지 담마의 기록에 대한 것이다.

 

2013년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담마에 대한 글로 보아서는 알 수 없다. 괴로운 시기였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럼에도 담마에 대한 열정은 버릴 수 없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담마에 대한 글이다.

 

믿을 것은 담마밖에 없었고 의지할 것은 담마밖에 없었다. 초기경전을 열면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현실의 슬픔, 분노, 괴로움, 고통, 비탄, 절망이 일시적으로 차단되었다. 그래서 더욱더 글에 집착했는지 모른다.

 

목차를 보니 2013년에 생각했던 것과 지금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목차 8번의 반야심경 만트라는 아라한 찬가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가 아라한인데 반야심경에서는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라고 했다. 바로 이 주문이 아라한 찬가와 같다는 것이다.

 

피안으로 건너가 버리면 다시는 차안에 오지 않는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윤회가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사상을 강조한다. 보살이 되어서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지옥계가 다하도록, 허공계가 다하도록 제도하겠다고 우주적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아라한 찬가와 관련하여 2013년 글을 쓸 때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S35.238)을 인용했다. 거기에서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S35.238)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올해 2월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물에 빠진 자와 같은 사람의 경’(A7.15)에 대한 후기를 쓸 때도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다. 이렇게 본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하는 것은 변함없는 것 같다.

 

담마는 변함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대로 있다.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되어 온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 문자에서 문자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현재 시점의 어떤 사람이 담마에 대해서 환희하며 글을 쓰게 되었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초기경전을 이용한 글쓰기를 하다 보니 대승경전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했다. 출가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일개 블로그에 불과했지만 인터넷을 이용하여 마음껏 비판했다. 그래서 나온 글이 목차 18번의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이다.

 

글에서 금강경을 비판했다. 한국불교 종단에서 대부분 소의경전으로 채택하고 있는 경이다. 왜 비판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금강경에 실려 있는 문구 상당수가 니까야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뗏목의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비유의 경’(M22)에서 발견된다. 그것도 금강경에 있는 내용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금강경에서는 법상응사하황비법(法尙應捨 何況非法)”이라고 했다. 이는 “옳은 법()도 오히려 반드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른 법[非法]이겠는가?”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주석을 보지 않으면 오해할 수 있다. 버려야 할 것은 선한 진리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라는 것이지, 선한 진리 그 자체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니까야를 보면 한문경전의 한계를 본다. 한자로서는 논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 부처님은 오온에서의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셨다. 이 말은 우주적으로 확대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금강경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은 일체유위법에 대한 것이다. 오온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우주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보는 게송은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S22.95)라고 되어 있다. 오온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금강경은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논사가 찬술한 것이다. 부처님의 원음이 아닌 것이다. 니까야에서 여러 문구를 인용했지만 대승보살사상에 맞게 편집된 것이다. 더구나 금강경을 보면 수지독송의 공덕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편집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금강경에 대한 비판 글을 쓴 것은 어느 스님의 글을 보고서 쓴 것이다. 글을 보니 H스님이라고 되어 있다. H스님의 금강경과 니까야 비교라는 글을 참고하여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이라고 제목을 단 것이다. H스님은 누구일까? 글을 검색을 해 보아도 찾을 수 없다. 아마 허정스님일 것이다.

 

불교에 입문했을 때 금강경을 외웠다.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를 때, 불교에 대하여 지식이 없을 때 금강경이 최고인줄 알았다. 그러나 니까야를 보고 나서 부터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경전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에서 빠알리니까야로 ‘환지본처(還至本處)’할 때가 되었다.” (2013-02-12)라고 지르듯이 쓴 것이다.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한다. 2013년에도 그랬다. 지금 그때 글을 소환하여 책을 만들고 있다. 책에는 서문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서문 하나 쓰는 것도 온 힘을 다 쏟아 붓는다. 그러다 보니 또 길어졌다.

 

2022-02-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