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잿더미가 된 삼막사 요사체-종무소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20. 19:29

잿더미가 된 삼막사 요사체-종무소를 보고


일요일 무엇을 해야 할까?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산행처럼 좋은 것이 없다. 산행하면 일주일 동안 못한 운동을 한꺼번에 할 수 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고 했다. 걷기야말로 최상의 운동이다.

어디로 가야 할까? 멀리 갈 것 없다. 관악산에 가면 된다. 아파트 앞에서 관악대로만 건너면 관악산 둘레길로 연결된다. 국기봉으로 해서 연주암을 목표로 했으나 삼막사로 급선회했다.

삼막사가 불타 버렸다. 며칠전 에스엔에스에서 알았다. 요사체가 불타버린 것이다. 스님 한분도 사망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파트 바로 앞에 삼막사로 가는 버스가 있다. 경인교대가 종점인 마을버스 6-2번을 타면 된다. 15분 걸린다. 경인교대 정문에서 삼막사까지는 3km가량 걸린다.

도로로 천천히 걸어 갔다. 걸어 갈 때 시심마(
是甚麽)를 했다. 흔히 "이뭐꼬"라고 한다. 이를 산행에 활용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는가? "이거시머시다냐?"라며 올라가는 것이다. 전라도 말로 시심마에 해당된다. 한발한발 "이거시머시다냐"라며 내딛으면 일곱 걸음이 된다.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이거시머시다냐"라며 걸으면 힘이 들지 않는다. 걸음에 집중되기 때문에 "언제 저기까지 갈까?"라는 생각이 일시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한걸음한걸음 "이거시머시다냐"라며 올라 갔다. 올라가면서 보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특히 건축불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은 건축불사한다고 하여 보시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건축물이 불에 타버렸다고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 갈까? 허망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목조구조물은 오래 가지 못한다. 화재에 대단히 취약하다. 화재로 불타 버렸을 때 보시자의 마음도 불타 버린 것처럼 될 것이다. 불에 타지 않는 불사는 없는 것일까?

불사에는 여러 종류의 불사가 있다. 건축불사도 있고 종불사도 있고 불상불사도 있다. 그러나 물질적 불사는 천년만년 가는 것은 아니다. 불이 나면 언제 타버릴지 알 수 없다. 불에 타지 않는 불사가 요청된다. 인재불사도 있고 경전불사도 있다.

불에 타지 않는 불사 중에 경전불사가 있다. 경전을 사 보는 것도 불사에 해당되고 경전번역자를 후원하는 것도 경전불사에 해당된다.

경전불사를 장려하고 있다. 최근 어느 법우님에게 자타카 경전불사 동참을 요청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 중흥에 있어서 경전불사처럼 시급을 요청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법우님은 평소 수행자들에게 공양하기를 좋아한다. 스님들에게 공양청 해서 공양하기를 즐겨 하는 것이다. 평소 보시를 즐겨 하는 법우에게 자타카 번역불사 보시에 동참해 볼 것을 요청했다. 이에 법우님은 오십만을 계좌이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 후원하겠다고 했다.

자타카 번역불사에 동참하고 있다. 교정자로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부족한 것 같았다. 후원에 동참하라고 요청한 마당에 가만 있을 수 없다. 삼막사 가는 길 도중에 계좌이체 했다.

인터넷시대와 스마트폰 시대의 위력을 실감한다. 걸어가면서 이체 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낸 김에 흔쾌히 번역불사대열에 동참한 것이다. 자타카 번역불사 명목으로 오십만원을 후원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조금이면 조금을 보시하라.

중간 정도면 중간 정도를 보시하라.

많으면 많이 보시하라.

보시할 것이 없으면 보시하지 말라.”(Jat.535)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돈이 있을 때 불사도 하고 후원도 하고 보시도 해야 한다. 입출금 통장이 늘 마이너스 상태이지만 그래도 업체로 터 수금되면 여유가 있다. 돈이 없으면 곤란하지만 조금이라도 있으면 보시하는 것이 좋다. 돈은 시간 지나면 사라지고 말지만 보시해 놓으면 영원히 남는다.

남는 것은 보시공덕 밖에 없다. 돈은 시간 지나면 사라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지만 한번 보시해 놓으면 공덕으로 남아 있다. 그런 보시공덕은 누가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 지나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다음에 저승 갈 때 든든한 노자돈이 된다.

삼막사에 도착했다. 한발한발 "이거시머시다냐"하면서 3키로 걸었는데 1시간 10분 걸렸다. 도중에 계좌이체한 시간도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걸렸다.

삼막사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화재 현장을 보기 위해서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았다. 내려다보니 현장은 처참했다. 종무소와 요사체가 있던 전각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불에 탄 나무 기둥이 수북이 쌓여 있다. 철저히 타버려서 가루만 남은 것 같다. 건축불사의 허망함을 보는 것 같다.

 


삼막사와 인연이 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200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불교와 인연을 맺고 싶어서 무작정 삼막사를 찾아 갔었다. 스님을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종무소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불교를 배울 수 있습니까?"라며 물어보았다. 종무소 사람은 "우리 절은 기도 도량입니다. 불교공부를 하려면 도심에 있는 포교당에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때가 아마 2002년이나 2003년이었던것 같다.

삼막사와 인연을 맺으려 했으나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삼막사에 대한 글은 여러 편 썼다. 국수를 무료로 공양한 이야기에서부터 삼막사 곳곳에 있는 유적과 유물에 대해서 썼다. 블로그에 국내성지순례 카테고리가 있는데 가장 많이 쓴 것 같다. 그런 삼막사의 종무소가 불타버리다니!

불에 탄 삼막사 요사체-종무소 흔적을 보고서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나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전각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을 때 무상함뿐만 아니라 불사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요사체-종무소는 곧 복원될 것이다. 복원불사를 하면 옛모습 대로 다시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목조 건축물은 언제 불타버릴지 알 수 없다. 설령 석재건축물이라고 해도 불이 나면 처참하게 주저 앉고 만다. 불에 타지 않는 불멸의 불사가 요청된다.

불교 중흥을 위해서 건축불사를 해야 한다. 건축불사가 어느 정도 되었다면 인재불사와 경전불사도 해야 한다. 불에 타지 않는 불사를 말한다. 현실적으로 경전불사 만한 것이 없다.

경전불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경전을 사 보는 것이다. 한역경전도 좋고 빠알리경전도 좋다. 건축불사에 드는 비용의 일부를 경전 사는 데 쓴다면 훌륭한 경전불사가 된다.

금강경에서는 재보시보다 법보시를 강조하고 있다. 법구경에서는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긴다.(Sabbad
āna dhammadāna jināti)"(Dhp.354)라고 했다. 왜 그럴까?

가르침이 훌륭하다면 자신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알려 주어야 한다. 짤막한 게송 하나라도 알려 주는 공덕에 대하여 주석에서는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달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듣지 않은 자들은 한숟갈의 죽이나 한 주걱의 밥을 보시할 줄 모른다.”(DhpA.IV.74)라고 했다.

가르침을 타인에게 알려 주었을 때 보시 공덕을 짓게 할 수 있다. 또한 싸리뿟따가 앗싸지에게 들은 사행시 하나로 흐름에 든 경지에 들었듯이, 사행시 하나를 인연으로 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가르침을 타인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가르침의 보시(
法施)는 일체의 보시를 이긴다.”라고 했을 것이다.

 


삼막사에서 폐허를 보았다. 천년만년 갈 것 같았던 전각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서 물질적 보시보다 법보시가 훨씬 더 수승함을 느끼게 된다.

경전을 사 보는 것도 불사이고 경전번역자에게 후원하는 것도 불사이다. 절대 불타지 않을 불멸의 불사이다. 건축불사도 좋지만 이제 경전불사도 해야 한다.


2022-03-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