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식물

반려식물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기운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4. 09:02

반려식물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기운을

 

 

오늘 아침 식물 물주기를 했다. 지난 325일에 주었으니 10일만이다. 그 동안 물주기에 대해서 소홀 했었다. 물은 생각날 때 주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보름에 한번 주는 꼴이 되었다.

 

 

처음 사무실에서 식물을 키울 때는 일주일에 한번 물을 주었다. 그런 기조는 거의 십년 유지되었다. 그 결과 비교적 식물이 잘 자랐다. 특히 행운목이 그렇다. 열대식물은 물과 친숙한 것임을 알았다.

 

 

현재 살아남은 식물은 승리자들이다. 그 동안 수많은 식물을 길렀는데 대게 잎이 작은 식물이 잘 죽었다. 반면 행운목처럼 잎이 넓은 식물은 잘 견디었다. 홍콩대엽야자나 인도고무나무도 잘 죽지 않는 식물이다.

 

 

식물 중에서 난() 키우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물을 언제 주어야 할지, 물을 어떻게 주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이다. 예전에는 1주일에 한번 주었으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생각날 때마다 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말라 죽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물키우기 15년 되었다. 수많은 식물을 키우면서 나름대로 감이 생겼다. 주로 물관리가 문제가 된다. 앞으로 1주일에 한번 주기로 했다.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에 주는 것이다. 오늘 아침부터 시작이다. 다만 다육식물은 염좌는 예외이다. 다육은 사막식물이기 때문에 물과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은 물주는 날로 정했다. 앞으로 해는 점점 길어지고 날씨는 따뜻해질 것이다. 이에 따라 식물도 충분한 물을 필요로 한다. 식물은 물만 제때 주어도 잘 자란다.

 

어느 페이스북 친구의 포스팅에서 동물기르기를 보았다. 개와 고양이를 기르는 것이다. 아마 떠 맡은 것도 있을 것이다. 집없는 고양이를 돌보는 차원에서 가르는 것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새끼가 생긴다는 것이다.

 

어느 동물이든지 새끼는 귀엽다. 특히 강아지가 그렇다, 갓난 강아지를 보면 눈이 빠질 정도로 바라본다. 그러나 새끼들은 그대로 있지 않다. 날자가 지남에 따라 커지는데 새끼 때의 모습을 잊어버린다. 그럴 경우 처치 곤란한 축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강아지를 보았을 때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났을까?”에 대한 것이다. 축생은 축생으로 태어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축생에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있어야 사유할 수 있는데 축생으로 태어났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전생담 자타카에서는 다르다.

 

자타카를 보면 보살은 축생으로도 태어났다. 코끼리, 자고새, 백조, 승냥이 등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자타카에서 개나 고양이, 돼지, 소로 태어난 경우는 없다. 인간이 기르는 가축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자타카에서 축생으로 태어난 보살은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사람의 언어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사람들을 교화하는 장면도 있다. 물론 신화적으로 또는 방편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른다.

 

흔히 육도윤회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천신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축생이나 아귀로도 태어날 수도 있다.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따라 업이 작용하는 대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어서 축생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축생과 너무 가까이하면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이런 것도 편견일 것이다. 축생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불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아지를 볼 때 어쩌다 축생으로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나도 언젠가 축생이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이 있다. 그 중에 삼십명의 경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바할 바가 아니다.”(S15.13)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 밖에도 물소, , 염소, 사슴, , 돼지로 태어나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에 있는 물보다 비할 수 없이 많다고 했다.

 

축생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불쌍해서 그렀다. 언젠가 나도 축생이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기억 나지 않을 뿐이다.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났을 때 축생의 일생은 비참한 것이다. 그럼에도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에서인가 교미가 이루어져 임신을 했을 때 그야말로 새끼들이 우글거리게 된다. 그 새끼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축생은 살아 있는 생명이다. 어떤 연유로 새끼가 생겨서 마치 새끼폭탄 맞듯이 새끼로 가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아는 사람에게 주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분양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처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살생업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기르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개를 반려견으로 생각하여 가족 이상으로 대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축생은 육도윤회하는 것중의 하나이다. 또한 임신하면 새끼들이 가득해서 관리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동물을 반려로 삼지 않는다.

 

 

요즘에는 반려식물이라는 말이 있다. 시장 꽃집에서도 반려식물이라는 글자를 써 놓았다. 나에게 반려동물은 없지만 반려식물은 있다. 물만 주어도 잘 자란다. 동물처럼 정신기능이 있는 유정체가 아니라서 부담이 없다. 식물도 충분히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오늘 아침 식물들에게 물을 흠뻑 주었다. 앞으로 매주 월요일은 물주는 날로 정했다. 정성을 들인 만큼 노력한 만큼 잘 자랄 것이다. 반려식물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

 

 

2022-04-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