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목숨을 건 나의 인정투쟁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28. 09:13

목숨을 건 나의 인정투쟁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 어디로 갈까? 유사이래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간다. 나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을까? 거울을 본다고 해서 나를 보는 것일까? 나의 마음은 어떨까? 내 마음 나도 모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마음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알 수 있다. 타인의 평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타인이 긍정적 평가를 하면 좋은 이미지이고, 타인이 부정적 평가를 하면 부정적 이미지의 사람이 될 것이다.

 

불로그와 에스엔에스(SNS)에 글을 올리고 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의미와 형식을 갖춘 글을 올리고자 한다. 그래서 제목을 붙이고 반드시 서명을 한다. 글에 대한 무한책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런 글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헤겔의 정신 변증법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보면 대강 어떠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패턴이 반복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된다. 대개 긍정적인 이미지 아니면 부정적 이미지가 되기 쉽다.

 

최근 유튜브 ‘5분 뚝딱 철학 채널에서 인정투쟁에 대한 포스팅을 보았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른 것이다. 흔히 알고 있는 --에 대한 것이다. 이를 정신의 변증법 운동으로 설명한 것이다.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 운동은 어떤 것일까? 이는 자신에 대하여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된다. 즉자-존재, 대자-존재, 즉자-대자-존재를 말한다. 마치 정--합의 논리로 설명되는 것 같다.

 

최초의 정신은 즉자-존재이다. 정신이 내부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을 타자화 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이를 대자-존재라고 한다. --합에서 반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타자화 시킨 대자-존재는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본래 자신으로 귀환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 상태인 즉자-존재가 아니다. 이미 자신을 타자화 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귀환했을 때는 즉자-대자-존재가 되는 것이다. --합에서 합이 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자신을 타자화 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마 글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글을 에스엔에스에 띄었을 때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긍정적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어떤 이는 부정적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침묵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글의 반응을 보고서 자신의 누구인지 파악할 수도 있다.

 

타자는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

 

자신이 자신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없으면 자신을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타자, 즉 다른 사람은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된다.

 

운전할 때 성격 나온다고 말한다. 평서 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돌변한다고 말한다.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자-존재는 어떤 대상을 타자화하여 자신 앞에 세우고 대자-존재가 된다. 다른 사람의 형태를 봄으로써 자신의 형태를 보는 것과 같다. 영화에서 범죄 장면을 보고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꼈다면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과 같다.

 

혐오하는 사람에게서도 자신의 내면을 볼 수도 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혐오가 그 사람에게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투사(投射)라고 한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나에게 그런 혐오가 있는 줄 모를 것이다.

 

나홀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나를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는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와의 관계이다. 이제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 그런 자신은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타인과 관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즉자-대자-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블로그출신의 글쓰기는

 

나홀로 살고 있다. 집에 가면 가정이 있지만 일터에 오면 나홀로가 된다. 홀로 일하고 혼밥을 한다. 이렇게 나홀로 있다 보면 이런 나가 나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무참히 깨질 때가 있다. 타인과 접촉했을 때 그렇다.

 

모임에 나가면 타인과 접촉할 수밖에 없다. 모임에서 나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긍정적 아니면 부정적일 것이다. 또 한가지는 인터넷공간이다. 그 중에서도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에스엔에스이다. 에스엔에스에서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글이 길다. 긴 글을 누가 읽을까? 그럼에도 긴 글을 쓰는 것은 의미 전달 때문이다. 마치 구호를 외치는 듯한 짧은 글로는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 사진으로 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감각적이고 무책임한 것이다. 그러나 긴 글은 외면 받는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람들은 바쁘다. 긴 글을 읽어 볼 시간이 없다.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을 좋아한다. 골치 아픈 현실에서 감각적인 것 만한 것이 없다. 사진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블로그에서 잔뼈가 굵은, 블로그에서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는 입장에서 감각적인 것을 올릴 수 없다.

 

글을 쓸 때는 대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읽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쓸 수 없다. 만일 욕설이 난무하는 폭력적인 내용의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될까? 폭력적 이미지로 굳어 질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세 번 연속으로 올리면 이미지가 형성된다.

 

본래 블로그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써 오다 보니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런 행태는 실시간으로 감각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다. 그래서 긴 글이 외면당하는지 모른다.

 

블로그출신의 글쓰기는 감각적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전문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래서 짤막한 구호나 소소한 일상사나 감각적인 사진을 올리는 것을 지양한다. 그 대신 콘텐츠로 승부하고자 한다. 어제 보다는 더 나은 글을 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목숨을 건 인정투쟁

 

어쩌면 에스엔에스에서의 글쓰기는 인정투쟁인지 모른다. 인정욕구가 아니다. 왜 인정투쟁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긴 글을 보고서 글이 길다고 불평한다. 내 글이 보이면 패스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어떤 사람은 모욕을 주기도 한다. 왜 모욕을 주는 것일까? 모욕을 줌으로 인하여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이는 애써 무시한다.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항상 어떤 다른 자기의식에 대한 자기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인정받기를 욕망합니다.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은 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봅니다.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을 본다는 말입니다. 예컨데, 타자가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면 자기 스스로 긍적적 존재가 되고, 타자가 자기를 멸시하면 자기 스스로 멸시하는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은 타자의 인정 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이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이제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들이 타자로부터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서 투쟁을 벌입니다. 목숨을 걸고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투쟁을 하는 겁니다. 목숨을 건 인정투쟁, 이것이 바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자기의식의 핵심개념입니다.”

 

 

김필영 선생의 유튜브 5분 뚝딱 철학에서 김필영 선생이 말한 것을 녹취한 것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에 관한 설명이다. 이를 목숨을 건 인정투쟁이라고 했다.

 

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매일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어떤 이는 공감하여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대부분 패스하거나 침묵한다. 나는 모두에게 글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욕심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글이라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이럴 때는 인정욕구가 아닌 인정투쟁을 해야 한다.

 

인정투쟁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헤겔철학을 좀더 발전시킨 호네트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일반적인 다수의 타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좋은 학벌을 갖추고자 노력한다. 승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도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에스엔에스에서는 좋아요숫자나 구독자 숫자로 위안을 삼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정욕구와 인정투쟁은 다른 것이다. 인정욕구는 우리가 일반화된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인정에 대한 요구가 거부될 때 어떻게 될까? 그때 부터는 인정투쟁에 들어간다.

 

인정투쟁이라고 하여 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인정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나를 싫어 하는 사람은 모욕을 줄지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조차 인정을 받고자 투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가볍게 무시전략으로

 

과도한 인정욕구는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인정욕구는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인정욕구를 버릴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현명한 인정욕구가 될까? 그래서 타인의 인정과 타인의 평가를 무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타인으로부터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인정욕구는 본능에 가깝다. 타인의 미움과 배제와 혐오를 받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5149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우호적 세력을 51프로만 확보하면 된다는 것이다.

 

친구가 생기면 적이 생길 수밖에 없다. 회사라는 경쟁사회에서 두드러진다. 우리가 모두에게서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만 인정받으면 된다. 그것이 한사람이 되어도 좋다. 심지어 동시대사람일 필요도 없다. 니체는 동시대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니체는 후대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읽지 않고서는 철학을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이럴 때는 인정의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나에게 모욕을 주는 타자가 인정욕구의 대상이 아닐 때 가볍게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서 인정받고자

 

매일매일 블로그와 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리고 있다. 이것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모욕을 주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인정욕구에서 배제된다. 가볍게 무시하면 그뿐이다.

 

나는 글을 통해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이는 2006년 이후 지금까지 16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쓴 것이 이를 증명한다. 불교계에서만큼은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들은 불교계 파워블로거라고 소개한다. 이것이 어쩌면 목숨을 건 나의 인정투쟁인지 모른다.

 

 

2022-04-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