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욕망에는 허물이 없다는데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다. 잠시라도 사띠하지 않으면 마음은 대상에 가 있다.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기 쉽다.
수행자라면 매순간 사띠해야 한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수행 중의 사띠와 일상에서 사띠가 있다. 전자는 사띠의 대상에 마음을 묶어 두는 것을 말한다. 몸관찰 하는 것이라면 호흡이라는 기둥에 마음을 묶어 둔다. 밧줄 길이만큼 범위가 한정될 것이다. 후자는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경험을 기억하거나 경전문구를 새기는 것이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사띠가 생활화되어야 한다. 늘 가르침을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새겨야 할 것이다. 좋은 문구가 있으면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떠올려야 한다. 그러면 스톱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 주옥같은 가르침을 접한다. 새겨 두고 싶은 구절이 많다. 형광메모리칠을 해둔다. 다음에 읽을 때는 그 부분만 보면 된다. 그런 문구 중의 하나가 있다.
"존자여, 자 무관심하라. 여기 지금의 즐거운 삶에 헌신하라. 존자여, 참으로 침묵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M49)
이 말은 누가 했을까? 마라가 한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늘 반대편에 있는 악마 빠삐만이 말한 것이다.
악마는 "여기 지금의 즐거운 삶에 헌신하라."라고 말 했다. 참 좋은 말이다.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즐기라는 말과 같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마의 속삭임이다.
요즘 '지금 여기'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자는 말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다. 마음이 과거에 가 있으면 후회가 있고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근심이 있다. 후회와 근심, 슬픔 등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두라고 한다. 여기 까지는 좋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을 즐기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악마의 속삭임이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은 사견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는 말이다. 악마의 말이다. 악마는 "여기 지금의 즐거운 삶에 헌신하라."(M49)라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한 빠알리원문을 보면 “딧타담마수카비하라마누윳또(diṭṭhadhammasukhavihāramanuyutto)”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말이 딧타담마(diṭṭhadhamma)이다.
빠알리어 딧타담마를 한자로 번역하면 현법(現法)이 된다. 법이 바로 앞에 있음을 말한다. 이를 영어로는 "here and now"라고 말한다. 우리말로는 "지금 여기"가 된다. 그래서 딧타담마는 "지금 여기" 또는 "현법"으로 번역된다.
부처님도 지금 여기를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즐기는 삶,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말씀하지 않았다. 여기서 즐김과 행복은 동의어이다. 이는 빠알리어 수카(sukha)가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삶을 살라고 말씀 셨을까? 맛지마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1)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똑같이 지금 여기를 말하지만 악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금 이 순간을 관찰하라고 했다. 이는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tattha tattha vipassati)”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최근 명상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다. 줌으로 명상가들이 대담한 것을 에스엔에스에 공유해 놓아서 본 것이다. 어느 유학파 스님의 방에는 영어로 "Here and Now"가 써 있었다. 만일 그 스님이 신도들에게 "지금 여기서 행복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악마의 속삭임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십시오."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 같다. 오래전부터 광고문구로도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춘은 즐기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젊음은 즐겨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공익광고에도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는 문구가 나올 정도에 이르렀다.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종종 TV에서 행복에 대해서 특강하는 강사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말한다. 심지어 스님 중에도 그런 말을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악마의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지금 이 순간은 즐기는 시간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은 관찰의 대상이다. 누군가 "하다 않되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수행자라면 지금 이 순간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 된다.
배가 난파되어 죽음이 순간이 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믿는 신을 찾아 울부짓어야 할까? 부처님 제자라면 좌선하며 명상해야 한다. 죽음의 순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도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가 될 것이다. 현상에 대하여 즐거울 때도 관찰하고 괴로울 때도 관찰하는 것이다.
누군가 "지금 이 순간을 즐기십시오."라거나,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악마의 속삭임이다. 왜 그런가? 자아에 기반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이기 때문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현법열반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도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감각적 쾌락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쾌락은 지금 이 생에서 향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생의 지복을 기다리며 즐거움을 누릴 귀중한 현재의 순간을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으로서, 디가 니까야, <계온품(戒蘊品)〉의「범망경(梵網經 Brahmājala Sutta)」(D1)에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62가지 사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세속 사람들이 열중하는 문제이지 수행자와 비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비구에게 있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난했던 세속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비구가 세속의 번잡스러움이나 이성(異性)의 유혹에 교란 받지 않고 출세간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매우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필요한 것까지도 희생해가면서 수행자들에게 제일 좋은 음식과 가사를 바칩니다. 비구가 사람들의 보시로 생활하면서 재가자와 똑같이 세속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매우 부적절 합니다.
더구나 비구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세상을 버립니다. 만약 비구가 재가자처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고귀한 이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자는 즐거운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현법열반론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62가지 사견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D1)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생이 행복을 추구하는 한 현법열반이 됨을 말한다.
현법열반론은 가짜열반을 말한다.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선정의 즐거움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간다. 시각이나 청각 등 오욕락으로 살아간다. 오욕락을 열반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이는 현법열반론에 해당된다.
영화 '달마야 놀자'가 있다.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주지가 조폭들과 술 마시는 장면이다. 주지는 술대결하면서 "이것이 열반주입니다."라며 술을 따라 주었다.
술을 마시면 취한다. 몇 잔 들어가면 알딸딸 해지는 것이 기분 좋은 상태가 된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이를 열반의 상태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다. 그러나 가짜 열반이다. 자아개념이 있는 한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선정상태도 가짜열반에 해당된다. 현법열반인 것이다. 선정의 행복이 거친 감각적 즐거움에 비해 미세한 즐거움이긴 하지만 자아개념이 있는 한 가짜행복이기 쉽다.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
"장자여, 여기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듭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첫 번째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그는 그것에 입각해서 번뇌의 부숨을 성취합니다."(A11.16)
초선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놀랍게도 선정은 조작된 것이라고 했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임을 말한다. 만일 누군가 선정을 즐기기 위해서 앉아 있다면 이는 현법열반론이 된다. 선정의 상태를 열반으로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것이든지 즐기고자 하는 갈애가 있다면 현법열반론이 된다. 유사열반 또는 가짜열반을 말한다. 열반은 지각되지도 않고 느낄수도 없음에도 거친 행복이든 미세한 행복이든 즐기고자 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현법열반론자가 된다.
현법열반론은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즐거워도 내가 즐거운 것이고, 행복해도 내가 행복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아에 기반한 감각적 즐거움이나 선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이 무너질 때 괴로움이 따른다.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제자라면 궁극적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어떤 행복일까? 이는 법구경에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어떤 상태일까? 탐, 진, 치가 소멸되었다면 최상의 행복이 될 것이다. 또한 지각과 느낌이 소멸되었다면 최상의 행복이 될 것이다.
행복은 느낌과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상수멸의 상태라면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럼에도 가르침의 장군 사리뿟따는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며 말하고 돌아다녔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행복에 대한 대단히 역설적인 말이다.
느낌이 있는 행복과 느낌이 없는 행복이 있다. 느낌이 있는 행복은 현법열반이기 쉽다. 자아에 기반한 가짜열반을 말한다. 거친 감각적 즐거움과 미세한 선정의 즐거움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느낌이 없는 행복이다.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행복,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의 행복이다. 무아의 성자가 누리는 빠라마수카, 즉 최상의 행복 또는 궁극적 행복이다.
수행처에서는 늘 사띠하라고 말한다. 늘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사띠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좋은 문구가 있으면 새겨 두고자 한다. 그래서 일상에서 써먹고자 한다. 그런 문구 중의 하나가 또 있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에는 허물이 없다. (natthi kāmesu doso)"(M45)라는 말이다. 이 말 역시 사견이다. 악마의 속삭임이다.
어떤 이는 본성대로 살고자 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이,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욕망이 일어나면 욕망을 채우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된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는 허물이 없다."(M45)라는 사견을 갖게 된다.
사람이 감각적 욕망으로 살면 어떻게 될까? 마치 식욕과 성욕과 같은 근본적인 욕망으로 사는 축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빠지고 만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빠져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나쁜 곳, 악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거기서 괴롭고, 고통스럽고,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M45)
이러한 정형구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누군가 "감각적 욕망에는 허물이 없다."라는 사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값비싼 대가를 치룰 것이다.
2022-05-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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