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내면의 목욕과 내면의 제사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11. 06:41

내면의 목욕과 내면의 제사



피곤한 심신, 더럽혀진 심신을 어떻게 하면 깨끗이 할 수 있을까? 음주를 하는 등 오계를 어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일차적인 방법은 샤워하는 것이다. 산행후에 땀에 절은 몸을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나면 산뜻한 가분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대한 것이다.

속도 씻어 내야 한다. 속이 불편할 때 그렇다. 뜨거운 물에 꿀을 타 먹으면 좋다. 어제는 꿀이 없어서 생강청을 마셨다. 갈증이 나서 머그잔으로 세 차례 마셨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속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몸을 안팍으로 세척했다.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하니 더 세척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오계를 어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정신세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는 경을 암송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경을 암송하면 마음이 세탁되는 것 같다. 경을 암송하는 과정에서 집중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샤워로 몸을 세탁하고, 뜨거운 마실 것으로 몸안을 세탁하고 마지막으로 경을 암송함으로써 마음을 세탁한다. 이렇게 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된다. 이를 삼박자 세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
많은 사람이 그 속에서 목욕하는
그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진실과 원리가 있다면,
청정해지니, 그가 거룩한 님이다.” (Ud.9)


우다나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외도들은 목욕하면 마음도 깨끗 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외도들은 추운 겨울날 강가에서 자맥질했다. 물을 통해서 청정 해진다고 믿은 것이다.

목욕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목욕하면 몸은 깨끗 해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다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많은 사람들이 물속에서 목욕하는 것처럼 물속의 잠수 등을 통해서 악에서 오는 오염을 씻어 낼 수 있다면, 어머니를 죽인 자 등의 극악한 자들도, 물고기나 거북이 황소나 물소들도 마찬가지로 청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 그러 한가? 목욕은 악의 근원의 반대(paipakkha)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둠의 반대가 빛이고 무지의 반대가 앎인 것과 같은 식으로 목욕이 악의 반대는 아니다. 그러므로 결론은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UdA.76)


물에 의해 청정해지지 않는다. 매일 강가에서 목욕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살생, 투도, 거짓말, 음행, 음주로 사는 자가 목욕한다고 청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계를 어긴 자가 목욕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또한 기도와 예배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청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
바라문이여, 진리는 계행을 나루터로 하는 호수이니
오염되지 않아 참사람에 의해 참사람에게 가려지네.
그곳에서 지혜를 성취하고자 목욕하면,
몸을 적시지 않고 저 언덕으로 건너가네.”(S7.21)


부처님은 외면적 목욕이나 제사로 청정해지 않는다고 했다. 내면적 목욕과 내면적 제사로 청정해짐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진리의 호수를 말씀하셨다.

지은 죄를 씻어 낸다고 하여 강가에서 목욕하면 어떻게 될까? 강물만 더러워질 것이다. 불의 제사를 지낸 자들 몇 사람만 목욕해도 강이 시커멓게 될 것이다.

내면의 목욕은 강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진리의 호수에서 몸을 씻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팔정도의 호수이다. 팔정도의 호수에서 목욕하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목욕해도 더러워지지 않는다.

팔정도의 호수는 계행을 바탕으로 한다. 청정한 삶은 계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계행은 고행과도 같다는 것이다. 외도들은 고행으로 청정에 이르고자 하지만 부처님 제자들은 계행이 고행이었다. 그래서 "고행과 청정한 삶은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S1.58)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계행에 바탕을 둔 고행을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고행하는 것에 대하여 목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라고 했다. 내면적 목욕을 말한다. 어떤 것이 있을까?

네 가지 고행의 목욕이 있다. 그것은 1)감관의 수호, 2)두타행, 3)정진, 4)극단적 고행을 말한다. 이 중에서 극단적 고행은 목욕으로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극단적 고행은 번뇌를 제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행의 목욕은 극단적 고행을 제외한 감관의 수호, 두타행, 정진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계행의 목욕은 물을 적시지 않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강물을 오염시키지도 않는다. 그래서 진리의 호수에서 계행을 나루터라고 한 것이다.

계행의 나루터에서 진리의 호수로 가면 진리의 목욕을 할 수 있다. 진리의 목욕을 하면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했다. 진리의 목욕으로 청정한 삶을 살아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한다.

내면의 목욕은 팔정도의 실천으로 실현된다. 팔정도를 실천하면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살 수 있다. 팔정도의 실천이야말로 내면의 목욕이고 내면의 제사라고 말할 수 있다.

몸이 찌뿌둥하면 샤워를 한다. 몸이 청정해지는 것 같다. 속이 불편하면 뜨거운 커피나 차, 꿀차를 마신다.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마음이 심란하면 경을 암송한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몸을 안팍으로 정화하고 마음도 정화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요즘 나에게 있어서 암송하는 것만큼 강렬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샤워를 해도 한계가 있다. 몸은 깨끗해졌을지 모르지만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는 나만의 방식이 동원된다. 새로운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내면의 씻음, 내면의 목욕, 내면의 제사가 될 것이다. 나는 매일 내면의 목욕을 하고 매일 내면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22-04-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