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시각이 나를 속일지라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7. 11:28

시각이 나를 속일지라도

 

 

행운목이 천정을 쳤다. 한번 커팅 했는데 그 자리에서 또 자라나 천정을 친 것이다. 행운목과 함께 또 다른 열대식물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각이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라고.

 

사물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식물도 역시 그 자리에 있다. 사물과 식물이 다른 점은 생명의 유무이다. 식물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자라지만 눈치 채지 못한다. 어느 날 바라보면 상당히 자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는 동물은 그 자리에 있지 않다.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움직이고는 있지만 사라져 소멸되어 버리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언젠가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왜 세상은 그대로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시각적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청각은 그대로 있지 않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시간 지나면 사라진다. 하물며 말하는 것은 어떨까? 말하는 그 순간 사라진다. 손뼉소리도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다만 여운만 남아 있다.

 

청각은 시각과 달리 그대로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시각도 그대로 있지 않고 청각도 그대로 있지 않은 것이 있을까? 번개와 천둥이다. 번개는 시각적인 것이고 천둥은 청각적인 것이다. 이는 빛과 소리에 대한 것이다. 생겼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생겨난 것은 사라질 때 금방 사라진다. 이를 순간적으로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 번개와 천둥을 보면 알 수 있다.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이

차츰 사라져 가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처럼 올바로 해탈한 님

감각적 쾌락의 속박의 거센 흐름을 건넌 님,

동요를 여의고 지복에 도달한 님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Ud.93)

 

 

대장장이가 쇠망치로 치면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튄다. 돌과 돌을 부딪쳐도 소리와함께 불꽃이 튈 것이다. 시각과 청각이 모두 작용한다. 냄새까지 난다면 후각도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 지나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발생하는 것은 조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도 있지만 우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도 있다. 이를 부처님은 우연한 피습(Opakkamikāni)’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납니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S36.21)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우연의 피습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우연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살다 보면 우연발생적 사고가 있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접촉에 의해서 연기가 회전되는 것을 말한다.

 

사고는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부주의한 것도 있고 불가항력적인 것도 있다. 어느 것이든 접촉에 따른 것이다. 하필 그 때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벌어졌다. 잘 수습하는 것만 남았다.

 

살다 보면 사고 아닌 것이 없다. 일상이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다. 심지어 눈으로 보는 것도 사건이고 귀로 듣는 것도 사건이다. 좋지 않은 결과가 발생되었을 때 사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도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는 것도 많다. 이럴 경우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이다. 어떻게 잘 수습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기존의 태도로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모든 일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라고 보아야 한다. 일어나는 데는 원인과 이유와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지는데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번개가 있어서 천둥 치듯이 사라진다. 쇠망치를 쳤을 때 불꽃과 소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라지듯이, 오온에서 일어난 모든 현상은 조건 없이 그냥 사라진다. 찰나멸(刹那滅)이다.

 

어느 초기불교 전도사와 같은 스님은 찰나에 사무쳐라!”라고 했다. 이를 좀더 구체화한다면 찰라멸에 사무쳐야 한다. 생겨난 것보다 사라지는 것에 더 주목하라는 것이다.

 

발생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사라질 뿐이다. 그것도 찰나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다. 책장에 책도 그대로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천정을 친 행운목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이를 바라보는 마음도 그 대로 있는 것 같다. 시각이 나를 속이는 것이다.

 

시각과 달리 청각은 나를 속이지 않는다.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후각도 그렇고 미각도 그렇다. 유독 시각만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여서 나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하는 영원주의가 생겼을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오온은 요동친다. 몸에서는 나도 모르게 신진대사가 일어나고 있다. 음식을 공급해 주면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 또한 음식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킨다. 마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새로운 물질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열차례 또는 열두차례 진행된다고 한다.

 

지금 이순간 느낌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느낌은 사라지고 없음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느낌이 마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몸속에서 연쇄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을 만들어 내듯이, 느낌은 갈애로, 갈애는 집착으로 바뀐다. 연기가 회전하는 것이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그 끝은 어디일까? 이는 십이연기에서 노사에 대한 부분을 보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로 끝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대상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설령 움직이는 대상이라고 하여도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그대로 있을 것처럼 보인다. 조금씩 변화한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바라보는 마음 역시 언제나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시각이 나를 속이는 것이다.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주의를 돌리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손뼉치는 소리나 종소리는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흔적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다나 게송에서도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이 차츰 사라져 가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Ud.93)라고 했다.

 

청각에서 생멸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시각에서는 보기 힘들다. 시각과 청각에서 동시에 생멸을 볼 수 있는 것은 번개와 천둥, 그리고 쇠망치로 일어나는 빛과 소리이다. 이들 특징은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에는 이유와 원인과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라지는 데는 이유와 원인과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찰나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 마음 속에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생겨나는 것들은 이유없이, 원인없이, 조건없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즉시 사라진다. 그럼에도 여운이 남아 있다. 이미 사라지고 없음에도 그 느낌을 꽉 쥐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것처럼 꽉 쥐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몸,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그 결과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그러나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연기가 회전되지 않아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는다.

 

시각은 끊임없이 나를 속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마음 역시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각이 나를 속일지라도 찰나멸에 사무쳐야 한다.

 

 

2022-02-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