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내가 흥분과 격정에 휩싸였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 22. 12:25

내가 흥분과 격정에 휩싸였을 때

 

 

흥분을 가라 앉혀야 한다. 격정을 가라 앉혀야 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암송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암송했다. 오늘은 소리내서 해보기로 했다. 속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소리내서 하면 훨씬 더 집중이 더 잘된다. 이를 이근원통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십여분에 걸쳐서 분석경을 암송했다. 행선을 하면서 한 것이다. 암송할 때는 가만 앉아서 하는 것보다 걸으면서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사무실 명상공간 카페트 위에서 한 것이다.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행선이다. 경행이 아니다. 행선이라고 하는 것은 걸으면서 명상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몸풀기 동작이 아니다. 그래서 워킹메디테이션이라고 한다. 또는 걷는 수행이나 보수행이라고 한다.

 

행선을 하기 전에 암송을 하면 효과적이다. 암송을 하면 집중이 되는데 그 집중된 힘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리에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천천히 6단계 행선을 할 때 다리가 잘 지탱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행선을 하면 온통 마음은 발의 움직임에 가 있다. 뒷꿈치를 떼서 발을 올리고 밀어서 내리고 딛고 누르는 과정 전체를 아는 것이다. 특히 발을 밀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면밀히 관찰하라고 했다.

 

행선은 맨발로 하는 것이 좋다. 방바닥에서 행선하면 발을 뗄 때 소리가 난다. 이 소리도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가장 이상적인 행선대는 목질이 단단한 마루일 것이다.

 

행선을 하면 잡생각이 나지 않는다. 온통 마음이 발에 가 있기 때문에 잡생각이 치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면밀하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면밀하다는 말은 우리말로 촘촘하다라는 말과 같다. 행위를 촘촘하게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잡생각이 치고 들어올 수 없다. 만일 널널하다면 어떻게 될까? 마치 그물망의 코가 넓은 것과 같다. 잡념이 치고 들어와서 망념에 지배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행선을 하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 앉아야 한다. 자리에 앉아서 가부좌를 트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평좌이다. 왼다리를 바깥에 둔다. 보통 오른 다리를 바깥에 두나 통증 때문에 바꾼 것이다.

 

앉아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고작 십여분 앉아 있는다. 앉아서 호흡을 관찰해야 한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중이 쉽지 않다. 행선에서 집중된 힘을 좌선으로 활용해야 하나 잘 되지 않는다. 아마 촘촘하게 관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호흡을 놓쳤을 때 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생각도 있다. 담마에 대한 것이다. 문득문득 가르침에 대한 것이 떠 올랐을 때 이것도 사띠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법념처를 말한다.

 

사띠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최근 일묵스님의 해석이 가장 와 닿는다. 사띠는 통찰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을 해서 통찰 했을 때 그 기억을 잊지않음을 말한다.

 

기억에는 좋은 기억도 있고 좋지 않은 기억도 있다. 이를 삼마사띠와 밋차사띠로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띠는 삼마사띠, 즉 바른 기억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바른 기억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고 하나는 가르침을 실천하여 체득한 통찰지혜에 대한 기억이다.

 

일묵스님이 말한 바른 기억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오력에서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 S48.10)

 

 

부처님은 사띠에 대하여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담마에 대한 것이다. 오래 전에 행한 것이라면 몸으로 체득한 지혜를 말한다. 통찰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행한 말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담마를 말한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다. 경전에 있는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에 해당된다. 그러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체득했다면 이는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사띠는 지식과 지혜에 모두 해당된다.

 

경을 암송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행선하며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평좌하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왜 그런가? 이는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삼마사띠의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춤을 말한다. 이 말은 빠알리어 “paramena satinepakkena”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satinepakka’‘sati(memory)’‘nepakka(discrimination)’의 결합어이다. 그런데 최상의 기억과 분별이라고 했다.

 

삼마사띠는 최상의 기억과 분별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최상이라는 말은 빠라마(parama)를 뜻한다. 그래서 최상의 기억과 분별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통찰지혜를 말한다.

 

좋았던 기억이 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행복했던 순간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반면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의도적으로 잊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자리잡고 있다. 조건이 맞으면 발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에 대한 기억은 어떠할까?

 

수행은 좋아서 하는 것이다. 고행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수행한다. 한번 맛본 것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통찰지혜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를 담마의 맛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있지만 담마의 맛만 못할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Dhp.354)라고 했다. 이와 같은 담마의 맛에 대하여 부처님 제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좋은 용품이 내게 필요가 없다.

안락하여 가르침의 맛에 만족한다.

위없는 최상의 맛을 보았으니,

()과는 알고 지내지 않으리.”(Thag.103)

 

 

테라가타에서 부처님의 제자 반두라 장로가 읊은 것이다. 장로는 가르침의 맛에 만족한다고 했다. 가르침의 맛(dhammarasa)이란 무엇일까? 이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서른일곱가지 원리, 37조도품을 말한다. 또는 아홉가지 출세간법(구출세간법)을 말한다. 구출세간법은 사향사과와 열반을 뜻한다. 이것을 담마의 맛이라고 했다.

 

장로는 위없는 최상의 맛(rasaggamuttama)을 보았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아닌 열반일 것이다. 그래서“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다.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형성이 소멸되었을 때 최상의 맛을 봄을 말한다.

 

장로는 담마의 맛을 왜 최상이라고 했을까? 이는 음식과 관련이 있다. 음식의 맛들은 사람들을 윤회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다. 느낌의 식사도 있고, 의도의 식사도 있고, 의식의 식사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식사는 중생을 윤회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네 가지 식사는 중생을 윤회하게 만든다. 결국 괴로움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 왜그런가? 윤회는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재생할 때마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담마의 맛을 알면 못 잊어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담마의 맛을 기억하는 것이 바른 사띠일 것이다.

 

어제는 흥분했다. 권승들에게 한방 먹였기 때문이다. 승려대회가 열린 것을 말한다. 이에 역할을 했다. 권승들에게 의문의 일패를 안겨주는데 일조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글로서 표현했다.

 

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렸으나 침묵만 흘렀다. 페이스북에 올린 것과 대조적이다. 그들은 왜 침묵하는 것일까? 인정하기 싫은 것일까? 혹시 재가불교활동가들에 대한 지나친 미화 때문일까?

 

이번 승려대회에서 승리한 것은 재가불교활동가들의 역할이 컸다. 영하의 추운날씨 속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피켓팅을 했기 때문이다. 승려대회가 열리는 당일날에는 몸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피켓트를 들고 조계사 일주문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자 할 때 제지를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동원된 사람들의 피켓트 속에 마치 군계일학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가루라님이 든 승려대회반대 피켓을 말한다.

 

불교활동가들에 대하여 독립군같다고 했다. 그리고 성스런 전사들이라고 추켜세웠다. 혹시 이런 표현이 그들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아닐까? 불교지식인들은 내내 침묵했다. 이것은 나에게 격정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흥분하는 것도 격정하는 하는 것도 나에게는 허물이 된다. 가라 앉혀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애명상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자비송에 있는 것처럼 아미가 호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내가 격정에서 벗어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란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암송하는 것과 행선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는 것다.

 

흥분할 때 격정에 쌓였을 때 가라앉혀야 한다. 경을 암송하면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집중된 마음으로 행선을 하면 세상에는 오로지 정신과 물질만 있는 것처럼 된다. 이 기세를 몰아서 자리에 앉아 본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면 흥분과 격정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담마를 기억하는 한 흥분과 격정은 발붙이지 못한다. 경을 암송하고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2022-01-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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