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눈 먼 자처럼 귀 먹은 자처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 28. 10:23

눈 먼 자처럼 귀 먹은 자처럼


말말말, 글글글, 말과 글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방송과 에스엔에스로 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모두 번뇌를 야기하는 것들이다.

늘 혼자 있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혼자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유튜브나 에스엔에스를 친구로 삼는다. 선우도 있고 악우도 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선우이다. 번뇌를 야기하는 사람은 악우이다. 친구도 가려야 한다. 세상에 경전 만한 친구가 어디 있을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일어날 때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해법이 있다. 악법을 악법으로 제거할 수 없다. 악법은 선법으로 물리쳐야 한다.

"
벗들이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서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S12.24)

부처님이 이교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이교도들이 업보를 믿는 부처님제자들에게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에 대한 답인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서 단호하게 접촉 때문이라고 했다. 시각으로 청각으로 접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라디오와 TV는 물론 인터넷, 유튜브, 에스엔에스에서 쏟아지는 형상과 음성, 그리고 말과 글에 의해서 번뇌가 일어난다. 모두 접촉에 따른 것이다.

시각접촉을 하면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난다. 청각접촉을 해도 그렇다. 모두 번뇌를 야기하는 것들이다. 번뇌는 괴로운 것이다. 접촉으로 인해 괴로움이 발생한다. 부처님은 이런 사실을 말했다.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의 접촉의 가르침을 이교도들에게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같이 말한다면, 내가 설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나를 잘못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설명하는 것이고, 그대들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S12.24)라고 했다.

부처는 진실만을 말하는 자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진어자"라고 했다. 부처님 제자들 역시 진실만을 말하는 자들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이교도와 토론할 때 괴로움이 생겨나는 이유에 대해서 접촉에 연유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이교도들이 숙명론이나 신의론, 우연론에 의해서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배운대로 실천에 옮겼다. 괴로움이 접촉에 의해서 발생함을 이교도들에게 알려 주었다. 부처님은 왜 괴로움이 접촉때문에 발생한다고 했을까? 이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에게도 괴로움은 접촉을 통해서 생겨난다."(S12.24)

여기서 '업보를 믿는 자'는 부처님과 제자들을 말한다. 이교도들은 업과 업의 과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작론자(akiriya)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작론이라고 한다.

경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교도를 일컫는 말이다. 수행자는 육사외도를 말하고 성직자는 바라문을 뜻한다. 두 부류 모두 업과 업의 과보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숙명론, 신의론, 우연론에 지배되었다. 그 결과 괴로움에 대하여 숙명론 적인 것으로 보았고, 신의 뜻이라고 보았고, 우연히 발생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자아에 기반한 것이다.

자아에 기반하면 괴로움에 대하여 네 가지 태도를 보인다. 괴로움에 대하여 내가 만든 것이라고 하고,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하고, 자신이 만든 것이기도 하고 남이 만든 것이기도 하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사구분별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구분별을 모두 부정했다. 자아에 기반한 사구분별은 망상에 기인 함을 말한다. 이는 디가니까야 1번경 브라흐마잘라경에서 부처님이 외도의 62견에 대해서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예순 두 가지 근거를 통해서 여러가지 망설을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도, 그들 모두는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을 통해서 잇따라 접촉하면서 그것들을 감지한다."(D1)라고 설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모든 괴로움은 접촉을 통해서 생겨난다. 외도의 견해도 접촉에 따른 것이다. 마노(정신)를 대상으로 의식이 일어났을 때 호불호와 쾌불쾌에 따라 정신이 오염되었을 때 망상이 된다. 그래서 62가지 삿된 견해(사견)가 발생되는 것이다.

사견이 발생하는 것은 자아에 기인한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괴로움의 종착지라고 볼 수 있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즉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도 내 것이 된다.

연기법적으로 사유하면 자아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조건발생이기 때문이다. 괴로움도 그렇다. 괴로움도 조건발생이다.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한 것이다.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내탓"이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 "남탓"이라고 떠넘길 필요도 없다.

괴로움은 일어날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된 것이다. 시각과 청각이 결정적이다.

보이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고 들리는 것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매혹적인 대상이라면 끌릴 것이다. 혐오적 대상이라면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나홀로 산다고 해도 매스컴을 접하거나 유튜브, 에스엔에스를 한다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접촉이 일어났을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괴로움이 된다.

부처님은 심지어 즐거운 느낌까지 괴로움이라고 했다. 오래 가지 않아서 불만족하기 때문이다. 접촉했을 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데, 이 느낌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그 종착지는 어디인가? 십이연기와 고성제 말미에 볼 수 있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즉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이다.

매일 근심과 분노, 절망으로 살아간다. 대체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것들인가? 따져 보니 접촉에서 왔다. 보았기 때문이고 들었기 때문이다. 본 것과 들은 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면 차단해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라디오도 듣지 않고 TV도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도 인터넷 나름이다. 번뇌를 야기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유튜브와 에스엔에스가 최대의 적이다. 물론 좋은 것도 있다. 그러나 근심이나 분노를 야기하는 것은 곤란하다. 막연한 기대나 희망을 말하는 것도 곤란하다.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야 한다.

모든 괴로움은 접촉에서 발생된다. 이렇게 말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놀라운 것이다. 이제까지 "내탓"만 하거나 "남탓"만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내탓도 아니고 남탓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외도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사구분별하는 것이다. 연기법적 사유를 해야 한다.

괴로움은 접촉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난 것이다. 접촉이 없었다면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반드시 시각이나 청각 등 오감에 대한 것은 아니다.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생각도 접촉대상이 된다.

생각을 어찌해야 할까? 불쾌한 생각에 지배받았을 때 근심이 되고 분노가 된다. 눈 감고 귀 막고 산다고 해도 생각만큼은 어찌할 수 없다. 마음의 문으로 치고 들어오는 생각을 어찌해야 할까?

좌선을 했다. 그제 한시간 앉아 있었다. 좌선하기 전에 예비수행으로 경을 암송하고 행선하는 시간을 가졌다. 집중된 힘을 좌선에 활용하고자 위함이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뒤로 벌렁 누워 와선 했다. 비몽사몽간이 되자 몸이 나른해졌다. 좋은 기회이다.

몸이 이완되었을 때 집중도는 높아 진다. 와선에서 좌선으로 변환했다. 편안 했다. 몸과 마음이 이완된 것이 큰 이유라고 본다. 이런 상태가 되자 견딜 만했다. 어떤 생각이 치고 들어와도 곧바로 사라졌다. 사띠의 힘일 것이다.

사띠의 힘이 강력하면 망념이 자리 붙이지 못한다. 치고 들어왔다가 금방사라진다. 사띠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망상의 집을 짓게 될 것이다. 그결과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이 생겨날 것이다.

일상에서도 사띠할 수 없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면 일상사띠가 된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접촉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주문처럼 외는 것이다.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근심, 걱정, 슬픔은 내것이 아니다. 접촉에 따라 일어난 것이다. 내탓도 아니고 남탓도 아니다. 만일 행위자와 향수자가 동일하다면 "내탓"이 될 것이다. 행위자와 향수자를 다르게 본다면 "남탓"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내탓도 남탓도 아니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를 사구로 부정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행위자도 없고 향수자도 없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나 향수자는 없다는 말과 같다. 다만 법이 조건에 따라 발생할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것처럼 근심하고 걱정한다. 낫에 잘린 갈대처럼 시들어 갈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 아난다는 이렇게 말했다.

"
벗이여, 접촉은 여섯 가지 감역을 바탕으로 하고, 여섯 가지 감역을 동기로 하고, 여섯 가지 감역을 발생으로 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원인으로 한다. 벗이여, 여섯 가지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S12.24)

괴로움이 접촉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섯 감역,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의 접촉을 조건으로 해서 괴로움이 발생되는 것이다. 내탓이나 남탓이 아니다.

조건발생하는 것은 조건이 소멸되면 사라진다. 접촉으로 발생된 괴로움은 5지연기로 진행된다. 육입, 접촉, 존재, , 노사를 말한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육입단계는 어쩔 수 없다. 접촉이 일어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나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느낌단계에서는 막을 수 있다. 느낌이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 느낌이 산냐()와 결합되어 망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경에서는 5지연기로 괴로움이 소멸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십이연기에서 느낌단계가 길목이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괴로움과 윤회의 탈출구가 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요즘과 같은 때에는 눈 먼 자처럼 귀 먹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

"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Thag.501)


2022-01-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