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내가 성악설(性惡說)을 믿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10. 07:37

내가 성악설(性惡說)을 믿는 것은


가만 있기가 힘들다. 마음은 늘 대상을 지향하기 때문에 어디에든지 가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했다.

마음은 경망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마음이 불선한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은 제어의 대상이다. 어떤 깨끗한 마음이 있어서 더러워진 마음을 닦는 다기 보다는 제어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이다.


"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 (Dhp.35)


마음은 대상을 지향한다. 대상은 형상이 될 수도 있고 소리가 될 수도 있다. 가만 있으면 정신(mano)에 지향된다. 떠오르는 생각이나 흘러가는 생각에 마음이 지향되는 것이다. 그 결과 상상의 나래를 편다. 이를 공상, 망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잘못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Dhp.42)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올바로 지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경전읽기와 글쓰기와 게송외우기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잠시 한가한 시간이 생겼다. 스마트폰을 습관적으로 본다. 뉴스도 보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으니 에스엔에스가 대상이 된다. 그 중에서 페이스북이다.

페이스북에는 갖가지 인생이 있다. 잘난 자도 있고 똑똑한 자도 있고 많이 배운자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나의 놀이로서 즐기는 것 같다. 시덥잖은 글에 관심 보이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무언가 하나라도 남는 것을 올려야 한다. 한번 보고 지나칠 것이라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긴 글을 쓰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게송을 외우면 최상이다. 네 구절로 된 빠알리게송을 외우면 잡념이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망상도 사라진다.

게송외우기를 하다 보면 집중이 된다. 생소한 빠알리 단어는 수십번 되뇌이어야 외워진다. 그러나 한타임에 외워지지 않는다. 하루에도 여러번 반복해야 한다. 우리말도 아니고 단어도 생소한 원문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이는 국토를 걸어서 종단한다. 또 어떤 이는 오토바이로 대륙을 횡단한다. 나는 게송외우기로 마음의 여행을 떠난다. 하나의 빠알리 경을 선정하여 첫 게송부터 마지막 게송까지 외우는 대장정을 하는 것이다.

현재 빠다나경(정진의 경, Sn.3.2) 25게송 중에서 24번 게송을 외우고 있다. 어제 외운 것을 기억하려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경우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들여다 본다. 수십번 반복하다 보면 외워지게 되어 있다. 이를 이전에 외운 게송에 붙여서 전체적으로 암송해 본다. 마침내 모두 다 기억해 냈을 때 목적지에 이른 것 같다.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기고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Dhp.354)


게송 외우기에 맛을 들였다. 세상에 여러 맛이 있지만 게송 외우기처럼 짜릿한 맛이 있을까? 그래서일까 부처님 제자들은 "좋은 용품이 내게 필요가 없다. 안락하여 가르침의 맛에 만족한다. 위없는 최상의 맛을 보았으니, ()과는 알고 지내지 않으리.”(Thag.103)라고 했다.

사람들은 편하고 안락한 것을 찾는다. 감각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술이 당기면 술을 마시면 된다. 거치른 행복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깨고 나면 숙취로 인하여 고통이 수반된다. 짧은 행복 긴 괴로움이다.

감각적 즐거움은 거친 것이다. 좀더 잔잔한 즐거움이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게송외우기일 것이다. 그런데 외우는 과정에서 힘이 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감각을 즐기는 것과 정반대이다.

슬을 마실 때 힘이 들지 않는다. 아무생각없이 들이키면 된다.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온몸에 펴져서 감각을 마비시킨다. 취한 상태가 되었을 때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게송을 외울 때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노력과 열정도 필요로 된다. 그런데 게송을 외우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는 사실이다. 가르침이 훌륭한 줄 알아서 기억하고 새기고자 하는 것 자체가 수행인 것이다. 가르침이라는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이 된다.

술은 마시기 쉽다. 게송 외우기는 어렵다. 쉽게 얻은 것은 괴로움이 따른다. 어렵게 얻은 것은 괴로움이 없다. 게송 외우기 같은 것이다. 게송을 외우면 즐거움만 있을 뿐이지 괴로움은 없다. 이것이 담마의 맛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내버려 두면 끊임없이 악하고 불건전 대상을 찾는다. 그래서 위빠사나 스승은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1)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마음을 길들이고 다스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여서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가며,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 마음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있는가? 상상만으로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막을 수 있는가? 아무도 자신의 나라로 들어오는 마음을 막을 수 없다. 마음에는 장벽이 없다.

2)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한 순간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슬퍼진다. 이 순간에 행복 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화를 낸다. 이순간에는 공손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그렇지 않다.

3)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마음은 자기가 선택한 마음의 대상에 스스로의 의지로 다가간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불, , 승 삼보와 정신, 물질이라는 특정한 마음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은 쉽지 않다. 위빠사나를 처음 시작한 수행자는 정신적대상과 물질적 대상에 집중을 하려고해도 마음이 여기 저기로 돌아다닌다. 그 마음은 시장으로, 사무실로, 학교로 어디든 돌아다닌다.

4)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

마음은 여간해서는 선한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은 선하지 않은 생각과 선하지 않은 대상에 빠져 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수행자 개인의 성품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마음의 성품이 선하지 않은 행위를 좋아한다.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을 즐긴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마음은 대부분 선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하고 있다.

이상 우 쿤달라 비왐사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마음의 속성은 경전을 근거로 한다. 법구경 세 번째 품인 찟따박가(마음의 품)를 근거로 했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있다. 전에는 성선설을 믿었다. 마음은 본래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더러워진 마음을 닦으면 깨끗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접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즘에는 성악설(性惡說)을 믿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욕계중생이기 때문이다. 욕계중생은 욕망의 세계에서 욕망으로 산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되었기 때문에 오취온적 존재이다. 그래서 육도윤회한다. 이는 욕망에 따른 것이다. 그런 욕망은 다름 아닌 탐욕이고 이는 불선법에 해당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본래 불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항상 불선한 대상에 가 있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욕망으로 인한 갈애이다. 갈애가 더욱 강화되면 집착이 된다. 집착이 되면 업이 되어 윤회하게 된다. 연기가 회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도윤회하게 된다.

연기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십이연기의 순환고리에서 하나만 끊어도 연기는 회전하지 않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주목하는 고리가 있다. 그것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는 단계를 말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스승은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느낌이라고 알아차리고, 괴로운 느낌은 괴로운 느낌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느낌이 갈애로 넘어가지 않아서 연기가 회전하지 않게 된다. 알아차림 하는 것을 '사띠(sati)한다'라고도 말한다.

사띠는 틈만 나면 해야 한다. 매순간 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띠를 놓쳤을 때 어떻게 될까?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을 것이다.


"
일찍이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이 마음은 즐거움을 쫓아 다녔다.
사나운 코끼리를 조련사가 갈고리로 제어하듯,
오늘 나는 그것을 철절히 제어하리라.” (Thag.1136)


부처님 제자가 읊은 게송이다. 이는 마음의 속성을 악하고 불건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다스려야 하는 것이고, 마음은 제어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늘 사띠를 강조했다. 열반에 들 때 최후의 말씀은 "압빠마데나 삼빠데타"(D16)이다. 이는 "불방일정진"을 말한다. 방일하지 말라는 것은 늘 사띠하라는 말과 같다.


"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5)


이 게송은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한 것이다. 무아의 아라한은 삶과 죽음을 초월해 있다. 그래서 삶도 바라지 않고 죽음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한가지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띠이다. 그래서 호흡이 멈추는 최후의 순간까지 사띠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띠는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적 의미로 쓰이면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교학적으로는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다. 게송외우기도 해당될 것이다.

사띠는 선법이다. 사띠를 하면할수록 공덕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면 새길수록 공덕이 된다. 언제 어디서나 최후까지 사띠해야 한다.


2022-04-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