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수행에 앞서 왜 예비수행을 해야 하는가?
어제는 하루종일 일에 몰두했다. 급하지 않은 고객은 없는 것 같다. 오늘 일감을 주고서 내일 내놓으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도 급해진다. 그 결과 밤에 나가서 하기도 했다.
나이 들어서 일을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남들은 은퇴하여 남은 여생을 즐기고 있을 때 아직도 현업에 메여 있는 모습이다. 그런 한편 다행스럽기도 하다. 정년이 지난 나이임에도 일감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 아닐까? 그것은 아마도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일이 있으면 긴장된다. 실수를 하지 않고 잘 해야 된다는 중압감이다. 그러다 보니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하나라도 잘못하면 그대로 손실로 이어진다. 이렇게 노심초사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온 것 같다.
잠을 잘 자야 한다. 잠이 보약이라고 한다. 잠을 잘 자야 면역도 강화된다고 한다. 그러나 잠을 잘못 이룬다. 오래 된 것이다. 그렇다고 수면제에 의지할 수 없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 찌뿌둥할 때 약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약보다 좋은 즉효약이 있다.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어제 과로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루었다. 컨디션이 엉망이다. 이럴 때는 잠을 청한다고 하여 해결되지 않는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걸어야 한다. 작은 방에서 경행하는 것이다.
경행이나 좌선을 할 때 곧바로 들어가면 잘 집중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예비수행을 해야 한다. 바로 그것은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행선이나 좌선에 앞서 왜 예비수행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경을 암송하는 것 자체가 집중이다. 이전에 외운 것에 대해서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집중인 것이다.
예비수행은 사야도도 강조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보면 본수행에 앞서서 예비수행을 하라고 했다. 찬먜 사야도의 법문집 '위빳사나 수행 28일’(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 따르면 예비수행 네 가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부처님 덕성에 대한 숙고, 자애의 계발, 몸의 혐오에 대한 숙고, 죽음에 대한 숙고를 말한다.
부처님 덕성에 대한 숙고는 불수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본수행에 앞서서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성을 떠 올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이는 “부처님,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통해 모든 정신적 오염원과 장애를 타파하시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성취하셨고, 그럼으로써 일체중생의 존경과 흠모를 받을 가치가 있으신 분”이라고 숙고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기쁨을 느껴 열심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자애의 계발은 자애관 수행에 대한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특정인, 또는 특별한 집단을 향해 자애를 계발하는 것’과 또 하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향해 자애를 계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라고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라 한다.
몸의 혐오에 대한 숙고는 몸의 혐오성에 대한 숙고를 말한다. 한자어로는 부정관이라 한다. 마음 속으로 “몸은 창자, 피, 가래… 등과 같은 불결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숙고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애착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몸에 대한 애착은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애착이 적을수록 마음이 고결해지고 위빳사나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숙고는 사수념(死隨念)을 말한다. 본수행에 앞서 왜 죽음을 떠 올려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내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지만 지금 당장, 또는 내일이나 모레 등 어느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숙고 해야 함을 말한다. 사람은 업대로 산다. 과거에 지은 업 때문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한시가 급한 것이다. 게으름 피울 여유가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숙고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 보다 더 노력을 기울이게 해 준다는 것이다.
네 가지 예비수행은 사실상 사마타 수행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불수념, 자애관, 부정관, 사수념에 대한 것으로 40가지 사마타 주제에 속하는 것들이다. 위빠사나 수행에 앞서서 사마타 수행을 예비로 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집중력 강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게송외우기를 하면서 예비수행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경을 외우기로 마음먹었을 때 매일 새로운 게송을 외워야 한다. 그런데 새 게송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전에 외운 게송들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을 다 외웠다면 암송하면 된다. 그런데 경을 암송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집중이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 새벽 평소 하는 것처럼 이전에 외운 게송들을 암송했다. 빠다나경 25게송 중에 18게송을 떠올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집중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되었다. 이전에는 찌뿌둥하여 기분도 꿀꿀했으나 암송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상태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집중된 힘으로 행선에 임하면 행선이 더 잘되는 것 같다. 이런 상태로 좌선에 임한다면 역시 집중이 잘 될 것이다.
예비수행이라 하여 뜻도 모르고 주문을 외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 같다. 나의 경우에는 새로운 경을 암송할 때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암송하면서 뜻을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경을 암송할 때는 천천히 한다. 뜻도 모른 채 빠른 속도로 암송하는 다라니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본수행에 앞서 예비수행은 필요한 것이다. 우 자나카(찬먜) 사야도는 네 가지 예비수행을 강조했지만 나에게는 경을 외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매일 게송을 외우는 것 자체가 수행이고 매일 경을 암송하는 것 자체가 수행이다. 경을 암송하는 순간 몸과 마음이 전혀 다른 상태가 되어 버린다. 오늘 새벽에도 체험했다.
2022-03-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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