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천년 돈점논쟁에 종지부를, 부처님의 점오점수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13. 10:19

천년 돈점논쟁에 종지부를, 부처님의 점오점수 가르침

 

 

오늘은 금요모임이 있는 날이다. 금요니까야공부모임을 말한다. 지난번 모임에서 합송했던 것을 오늘에야 후기를 작성한다. 나에게 후기를 쓰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지난 4월 29일 두 번째 사월 모임에서 합송한 경이 있다, 교재에서는 진리의 바다에서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깨달음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빠하라다의 경(Pahārādasutta)’(A8.19)에 해당된다.

 

포살의 날에

 

빠하라다경은 유명한 것 같다. 앙굿따라니까야 뿐만 아니라 율장에도 실려 있고 우다나에도 있다. 율장에서는 소품 제9의무계율송출의 다발에 실려 있다. 그런데 빠하라다경에서 보이지 않는 내용이 있다. 이 경을 설하게 된 일종의 인연담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포살일에 설법하기 위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는데도 부처님은 앉아 있었다. 부처님은 침묵한 채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왜 침묵했을까?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대중이 완전히 청정하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청정하지 못한 자가 포살일에 앉아 있는 것에 대하여 지적했다. 그러자 목갈라나가 청정하지 못한 자를 발견했다. 율장에서는 이 자에 대하여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하고 순수하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행위를 하고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 체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탐욕스럽고 성품이 부정한 사람”(Vin.II.236)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포살의 날에 청정하지 못한 자가 앉아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구나 부처님이 침묵하면서 앉아 있었다. 목갈라나는 청정하지 못한 자를 발견했다. 발견하고서는 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가지 않았다. 세 번 요청해도 나가지 않자 어떻게 했을까? 율장 소품에 따르면 그러자 존자 목갈라나는 그 사람을 두 팔로 붙잡아 문밖으로 쫓아 내고는 빗장을 잠그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갔다.”(Vin.II.237)라고 되어 있다.

 

목갈라나의 행위는 어찌 보면 과격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경’(A8.20)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해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오늘부터 그대들이 포살을 행하고 의무계율을 외우라. 나는 오늘부터 더 이상 포살을 행하지 않고, 의무계율을 설하지 않겠다. 수행승들이여, 여래가 부정한 모임에서 포살을 할 수 없고, 의무계율을 설할 수 없다.”(A8.20)

 

 

부처님은 포살모임이 부정한 모임이라고 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그 대신 수행승들에게 바다의 일곱 가지 특징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설명했다. 이것이 빠하라다경을 설한 배경이 된다. 여기서 빠하라다는 아수라 제왕의 이름이다.

 

부처님이 포살법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바다의 비유에 대한 경은 빠하라다의 경뿐만 아니라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경에서도 발견되고, 율장 소품 9장에서도 발견되고, 우다나 포살의 경(Ud.51)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포살의 날에 청정하지 못한 자가 있어서 부정한 모임에서는 포살을 할 수가 없고 또한 의무계율을 설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우다나에 실려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지금부터 포살에 참여하거나 계율의 항목을 외우지 않겠다. 수행승들이여, 지금부터 그대들이 포살에 참여하거나 계행의 항목을 외우도록 해라. 수행승들이여, 여래가 청정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포살에 참여하거나 계행의 항목을 외우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경우도 아니다.”(Ud.51)

 

 

포살은 우뽀사타(posatha)를 음역한 것이다. 이 말은 본래 계를 설하는 것의 뜻이다. 포살은 보름마다 했다. 포살일에는 포살의식을 행한다. 수행승들은 자신들의 의무계율을 외우고, 일반신도들은 설법을 듣거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 승원을 방문한다.

 

부처님은 그날 이후 포살법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대신 수행승들이 모여서 포살 행사를 치루었다. 이는 지금부터 그대들이 포살에 참여하거나 계행의 항목을 외우도록 해라.”(Ud.5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우다나 주석을 보면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포살법회가 열리면 수행승들은 150가지 의무적 계율을 외우고 부처님은 설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어떤 설법일까? 주석에 따르면 세 가지가 있다. 모두 법구경에 있는 게송이다. 이를 차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참고 인내하는 것이 최상의 고행이며 열반은 궁극이다. 깨달은 님들은 말한다. 출가자는 남을 해치지 않고 수행자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Dhp.184)

 

2)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3)

 

3) “비방을 삼가고 해치지 않고 계행의 덕목을 지키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홀로 떨어져 앉거나 눕고 보다 높은 마음에 전념하는 것, 이것이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5)

 

이 세 가지 교훈적 계율의 항목은 부처님이 독송하고 제자들은 독송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도 7년이 지나면 독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20년간 이 교훈적 계율을 독송했지만 경에서처럼 위험을 감지하고, 그 이후에는 독송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름마다 포살을 해야

 

수행승들이 포살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다. 비구로 산다면 포살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에 잘 알 것이다. 그러나 포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미얀마 담마마마까 선원에서 본 것이다. 그날 포살일에 포살당에서 비구들의 포살이 열렸는데 잠시 공개했었다.

 

 

포살일에 이백가지가 넘는 비구계를 독송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 보름마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포살을 하면 청정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스님들은 포살을 보름마다 할까?

 

한국스님들이 포살법회를 하는 것은 드문 것 같다. 그러나 홀로 살더라도 포살일에 포살법회를 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포살법회가 성립되려면 최소한 네 명이 모여야 할 것으로 본다. 이는 율장대품 의복의 다발에서 “세존께서는 ‘참모임은 최소한 네 명으로 구성된다.’라고 시설하셨다.”(Vin.I.298)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승가구성 최소단위는 네 명이다. 그러나 완전한 승가라 볼 수 없다. 율장대품(Vin.I.319)에서는 네 명, 다섯 명, 열 명, 스무 명의 승가를 소개하고 있다. 완전한 승가의 구성요건은 스무 명 이상의 비구가 함께 살아야 한다.

 

 

자자(pavāraa)의 경우 다섯 명 이상의 상가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네 명일 경우 서로 상호간에 자자를 행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하였다. 네 명이서 두 명씩 조를 짜서 자자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자라 하는 것은 ‘매년 안거가 끝나는 날 수행승들이 서로 안거 동안의 보인 것이나 들린 것이나 의심된 것으로서의 죄에 대해서 참모임 전체가 모인 가운데 충고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 포살도 자자에 준하는 인원으로 본다.

 

바다의 공덕 여덟 가지

 

바다의 공덕 여덟 가지가 있다. 이를 부처님은 가르침과 비교하여 포살일에 설명했다. 빠하라다경에서는 바다를 좋아하는 아수라의 제왕 빠하라다에게 설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주 놀랍고도 경이로운 바다의 특징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가르침과 유사한 특징이 있다고 했다. 여덟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다가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는다.”(바다)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가르침)

 

2) “바다가 안정되어 있어 해안을 침범하지 않는다.”(바다)

“내가 제자들을 위해 시설한 학습계율을 나의 제자들은 생계를 위해 침범하지 않는다.(가르침)

 

3) “바다는 죽은 사체와 함께 지내지 않기 때문에, 커다란 바다에 죽은 사체가 생기면 그것을 신속하게 해안으로 옮겨서 육지에 올려 놓는다.”(바다)

“어떤 사람이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하고 순수하지 못하고 의심스런 행동을 하고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 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탐욕으로 가득 차고 쓰레기로 오염되었는데,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참모임은 그와 함께 살지 않으며, 즉시 모여서 그를 쫓아내며, 그가 수행승의 참모임에 앉아 있더라도, 그는 참모임과 멀어져 있고 참모임도 그와 멀어져 있다.(가르침)

 

4) “어떠한 강이든 겐지스, 야무나, 아찌라바띠, 싸라부, 마히 강과 같은 커다란 강이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각각의 이름을 버리고 커다란 바다라 불린다.”(바다)

“어떠한 네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든 즉, 왕족, 바라문, 평민, 노예이든,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예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이라고 불린다.(가르침)

 

5) “바다에 세상의 모든 하천이 흘러 들고 하늘의 비가 쏟아져도 그 때문에 커다란 바다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바다)

“많은 수행승들이 잔여가 없는 열반의 세계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지만, 열반의 세계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가르침)

 

6) “바다는 오직 한 맛인 짠 맛을 지니고 있다.”(바다)

“이 가르침과 계율은 유일한 맛인 해탈의 맛을 지니고 있다.(가르침)

 

7) “바다에는 많은 보물 다양한 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보물로서 진주, 보석, 수정, 묘안석, 소라, 석영, 산호, , , 루비, 에메랄드가 있다.” (바다)

“이 가르침과 계율에도 많은 보물 다양한 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보물로서 네 가지 새김의 토대, 네 가지 올바른 노력, 네 가지 신통의 기초, 다섯 가지 능력, 다섯 가지 힘, 일곱 가지 깨달음고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다.(가르침)

 

8) “바다에는 커다란 존재들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커다란 존재로 거대어, 바다괴어, 바다괴물, 아수라, , 건달바가 살고 있고 그 키가 일백 요자나의 존재, 이백 요자나의 존재, 삼백 요자나의 존재, 사백 요자나의 존재, 오백 요자나의 존재가 살고 있다.”(바다)

“이 가르침과 계율에도 커다란 존재들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커다란 존재로 흐름에 든 님, 흐름에 든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흐름에 듦의 길로 가는 님, 한번 돌아 오는 님, 돌아 오지 않는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돌아오지 않음의 길을 가는 님, 거룩한 님,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거룩한 길을 가는 님이 살고 있다.(가르침)

 

 

이것이 바다와 가르침과 공통된 점이다. 지난번 금요니까야모임에서는 네 번째까지 설명되었다.

 

돈점논쟁에 종지부를

 

전재성 선생은 바다의 첫번째 특징과 관련하여 점오설이 옳다고 말했다. 이는 바다의 첫번째 특징과 관련이 있다. 바다의 해안선에는 절벽이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은 바다와 첫번째 특징과 관련하여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A8.19)라고 선언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대하여 단호히 부정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국불교에서 천년 동안 이어진 논쟁이 있다. 그것은 돈점논쟁이다. 그런데 빠하라다경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보면 돈점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 같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스님들이 니까야를 읽어 보았다면 부처님의 점오점수에 대하여 비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점오점수가 맞다.

 

전재성 선생은 큰바다는 진리를 상징한다고 했다. 또한 바다는 열반의 바다와 같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바다는 궁극적인 앎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결국 바다로 향해 가는 것이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다의 특징 두번째는 바다는 해안선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생계를 위해서 학습계율을 어기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전재성 선생은 가난할 때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가난할 때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잘 살게 되었을 때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서 계율을 어겼다면 나중에 잘 살 수가 없다. 어려울 때 계율을 잘 지키면 나중에 큰 일이 닥쳤을 때 돌파하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바다의 특징 세번째는 죽은 사체를 밀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청정하지 못한자와 관련이 있다. 청정하지 못한 자가 포살일에 앉아 있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계행이 청정하지 못한 자는 마치 시체와 같다.

 

계행이 엉망인 자는 살아도 살아 있지 않고 죽은 자와 같다. 그런 자가 포살일에 있다는 것은 바다 가운데 시체가 떠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바다는 시체를 해안선으로 밀어 낸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포살의 날에 수행승들이여, 여래가 부정한 모임에서 포살을 할 수 없고, 의무계율을 설할 수 없다.”(A8.20)라고 말했다. 더구나 목갈라나는 부정한 자에 대하여 두 팔로 붙잡아 문밖으로 쫓아 내고는 빗장을 잠그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갔다.”(Vin.II.237)라고 했다. 이런 말은 타당하다. 왜 그런가? 시체와는 함께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다의 네번째 특징은 오로지 바다라는 한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강물이 바다로 합류되면 더 이상 강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바다로 불리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누구나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오면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바라문, 왕족, 평민, 노예로 구성된 사성계급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이라고 불린다.(A8.19)라고 했다.

 

한국에서 출가한 스님들을 보면 종종 석()씨 성을 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자신의 법명 앞에 부처님의 성씨를 뜻하는 석자를 붙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스님들이 법명 앞에 석자를 붙이는 것은 바로 예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이라고 불린다.(A8.19)라는 구절에서 왔다고 설명했다.

 

오늘은 금요니까야모임 가는 날

 

오늘 금요니까야모임이 있는 날이다. 지난번에 빠하라다경을 네 번째 것까지 하다 말았다. 오늘은 다섯 번째부터 하게 될 것이다. 법수가 갈수록 높아지다 보니 경의 길이도 길어지고 설명도 많아지는 것 같다.

 

항상 가르침과 함께 사는 도반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행복이고 축복이다. 가르침 자체를 접하는 것도 행복이고 축복이다. 가르침을 설명하는 훌륭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도 행복이고 축복이다. 오늘 금요니까야모임 가는 날이다.

 

 

2022-05-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