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조건이 모여서 하나의 결과를
요즘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많다. 글쓰기도 의무적으로 하고 경전읽기도 의무적으로 하고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는 것도 의무적으로 한다. 하루 종일 담마와 함께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의나 강연을 들으면 글로 남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보기가 되기 때문에 더욱더 확실히 알게 된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도 예외는 아니다.
책을 통해서 아는 것과 직접 들어서 아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책에서는 절제된 표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본마음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직접 들어 보면 본마음을 알 수 있다. 말하는 태도와 눈빛, 어감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먼 거리를 찾아 가서 들을 것이다.
5월 첫번째 니까야모임이 5월 13일 금요일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이날 오랜만에 안진현 선생이 참석했다. 낯익은 얼굴을 보면 마치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누구든지 시간이 되면 참석해서 들으면 될 것 같다.
이번 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하나는 ‘재가수행자로서 수행에서 받아들인 놀랍고 경이로운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위대한 사람의 사유란 어떠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는 제목에 대한 것이다. 전자는 ‘베쌀리의 욱가에 대한 경’(A8.21)이고, 후자는 ‘아누룻다의 경’(A8.30)이다.
욱가 장자의 경이롭고 놀라운 일 여덟 가지
욱가는 베쌀리의 장자였다. 그에게는 여덟 가지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 있었다. 여덟 가지는 어떤 것일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부처님에 대한 청정한 믿음
2)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행과 청정한 삶의 수용
3) 네 명의 아내를 보낸 것
4) 재산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준 것
5) 수행승에게 무례하게 하지 않은 것
6) 가르침을 설할 때 공경하게 경청하는 것
7) 하늘사람이 부처님 가르침을 찬탄할 때 놀라지 않은 것
8)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푼 것
이와 같은 여덟 가지를 보면 욱가 장자는 불환자이다. 이는 여덟 번째 항에서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푼 것이 결정적이다. 불환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감각적 욕망이 없어서 네 명의 아내들을 보내고 재산도 나누어 주게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면 먼저 믿음을 내야 한다. 그것도 청정한 믿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찾아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기꺼이 설한다. 뿐니야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출 때, 오로지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A9.82)라고 했다. 부처님은 먼저 믿음을 낼 것을 말했다.
부처님이 믿음을 강조했다. 왜 강조했을까?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세상에 설법하기로 결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때 부처님은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S6.1)라고 말했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예전의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는 말이다.
길거리 전도사가 있다. 그들은 아무에게나 다가가 전도를 한다. 그들은 큰소리로 외치기도 한다. 이런 전도방식에 대하여 피래미 몇 마리 잡자고 널판지로 물을 때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부처님은 전도를 선언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붙잡고 담마를 설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면 길거리 전도사나 다름없을 것이다.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는 자에게 법을 설한다면 피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먼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pamuccatu saddhaṃ)” (S6.1)라고 말씀 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을 수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이나 사상체계를 내려 놓아야 한다. 이는 산사의 주련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와 같은 것이다. 산문에 들어오려거든 먼저 알음알이를 내려 놓아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곧바로 열반에 들고자 했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차라리 설하지 말아야지.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이해하기 힘드네.”(S6.1)라며 게송으로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견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 힘들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육사외도가 그랬다. 그런 육사외도에게 진리를 설하면 어떻게 될까?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소귀에 경읽기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사상체계를 내려 놓으라고 했다. 그래야 새로운 사상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합리적인 믿음 삿다(saddha)
부처님의 가르침은 들으면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S11.3)라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처음부터 어려운 가르침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처음에는 보시에 대한 가르침, 계행에 대한 가르침 등 쉬운 가르침부터 설했다.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성제를 설했다. 이런 가르침을 듣고 믿음을 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욱가의 경우 믿음을 내는 것이 다름 사람과 달랐다. 부처님을 보자마자 청정한 믿음이 생겨났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 부처님의 겉모습에서 풍기는 위의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현시대에서는 경전이나 스승을 통해서 믿음을 낼 수밖에 없다.
부처님은 어느 경우에서든지 믿음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믿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이는 합리적인 믿음을 말한다. 설법을 했을 때 믿음을 냈다면 합리적인 믿음이 된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사고와 팔고의 고성제를 설했을 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며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부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것이고 더구나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보면 딱 들어 맞는 가르침이다. 진리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믿음에 대하여 삿다(saddha)라고 한다. 합리적인 믿음 또는 이성적인 믿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없을 때는 스승에 의지해야
부처님이 없을 때는 스승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스승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최상의 지혜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자에게 스승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는 가까이 간다. 가까이 가서 스승을 공경한다. 스승을 공경할 때에 스승에게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일 때에 그에게서 가르침을 듣는다. 가르침을 들을 때에 그것을 기억한다. 기억할 때에 가르침의 의미를 규명한다. 의미를 규명할 때에 가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한다. 가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할 때에 의욕이 생겨난다. 의욕이 생겨날 때에 의지를 굳힌다. 의지를 굳힐 때에 그것을 깊이 새긴다. 깊이 새길 때에 정진한다. 정진할 때에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성취하고 지혜로써 꿰뚫어 본다.”(M70)라고 말씀했다.
부처님 말씀은 당대의 희망의 메시지
욱가장자는 특이하게도 부처님을 보자마자 믿음이 생겨났다. 이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이 보시의 가르침부터 시작하여 계행에 대한 가르침, 감각적 쾌락의 위험과 유혹, 오염, 그리고 여읨에 대하여 차제설법을 했다.
부처님은 욱가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자 사성제를 설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욱가에게 때묻지 않은 깨끗한 옷이 곧바로 물감을 받아들이듯이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되고 만다.”(A8.21)라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했다.
욱가 장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이는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되고 만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대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견도(見道)의 단계로 본다. 이 말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당대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지 말하는 영원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고대인도에서는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브라만들이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 주류는 브라만들이었다. 그들은 네 가지 계급을 만들어 고착화하고자 했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하여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되고 만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주류 계급에 대한 도전이다. 또 한편으로는 하층계급의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왜 그런가? 사성계급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승가공동체에서 실현된 평등사상
부처님은 사성계급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우선 승가공동체에서 실현했다. 승가공동체에 들어가면 누구나 계급없이 평등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왕으로서 출가한 밧디야 존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밧디야는 싸끼야족 출신이다. 싸끼야족의 왕족들이 집단으로 출가했는데 이발사도 출가하고자 했다. 이에 밧디야는 “세존이시여, 저희 싸끼야 족들은 교만합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출가시켜주십시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 싸끼야족들의 싸끼야족 교만이 제거 될 것입니다.” (Vin.II.183)라고 말했다. 그결과 왕의 이발사 우빨리가 먼저 출가했다. 나중에 출가한 밧디야 왕은 우빨리를 선임자로 모셨다. 이것이 승가공동체에서 완전한 평등을 이룬 증거가 될 것이다.
연기법송(緣起法頌)은 생멸구조
희망의 메시지는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복음(福音)과도 같다. 불교의 복음 중의 하나는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되고 만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A8.21)라는 말이었다. 이 말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연기법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앗사지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알려준 연기법송(緣起法頌)과 같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사리뿟따 존자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오기 전에 앗사지 존자의 경행하는 모습을 보고서 감명받았다. 사리뿟따 존자는 호기실을 가지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이에 앗사지 존자는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가 설합니다.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Vin.I.40)라며 짤막하게 알려 주었다. 이것을 연기법송이라고 한다.
연기법송은 기본적으로 생멸에 대한 것이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멸의 원리는 사성계급에도 적용할 수 있고 업사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특히 업과 관련해서는 숙명론을 타파할 수 있는 메시시였다. 어떤 업도 조건 발생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에 노예계급은 절망적 삶을 살았다. 한번 노예계급으로 태어나면 평생 노예로 살다가 죽어야 했다. 그런데 부처님이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되고 만다.”라고 했다. 절망에서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 즉 복음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복음은 기독교에만 있지 않고 불교에도 있다. 그런 복음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연기법이다. 그런데 연기법은 조건발생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나의 조건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조건이 발생하여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조건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은 결국 똑 같은 하나를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서 창조주 하나에서 생겨나는 것은 하나의 원리만 있게 되어서 운명론적이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알면 부처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28)라고 했다. 여기서 연기를 본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조건 발생하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건적으로 생겨난 사실을 보는 자에 대하여 ‘연기를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조건법이 된다. 왜 그런가? 연기를 뜻하는 말 자체가 조건발생이기 때문이다.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 빠띳짜사뭅빠다 (paṭiccasamuppāda)라는 말 자체가 ‘조건하여(paṭicca)’ ‘발생한다(samuppāda)’라는 복합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연기법의 조건은 한가지가 아니다. 조건이 한가지라면 똑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유일신교의 창조주 개념이 그렇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어느 것 하나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어느 것이든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이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S12.21)라는 연기송에 따른다.
연기법에 따르면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하여 상호의존적이고, 동시에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하여 조건발생적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창조주를 창조주로 곧바로 알고 창조주가 창조주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창조주라고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창조주를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음을 말한다.
무수한 조건이 모여서 하나의 결과를
연기법을 상세히 알려면 상윳따니까야 니다나상윳따(S12)를 보아야 한다. 여기에다 아비담마나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보면 도움이 된다. 또 한가지는 전재성 선생이 지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말하는 것을 들으면 대강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번 5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도 그랬다.
전재성 선생은 조건이 하나 밖에 없는 연기법은 연기법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의 조건에서 발생되는 것은 유일신교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연기법은 무수한 조건이 모여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
만일 하나의 조건에서 발생되는 연기라면 운명론적이 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업 때문에 현재의 괴로움을 받고 있는 연기라면 숙명론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연기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연기는 무수한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건을 바꾸면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생겨난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려면 다른 조건을 투입하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운명은 바꿀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소금덩어리의 경’(A3.99)이 있다. 죄악을 소금덩이로 보고 소금덩이와 같은 죄악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몸을 닦고 계행을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 협소하지 않고 큰 도량을 가지고 있어 무량한 삶을 산다.”(A3.9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죄업을 희석시킬 조건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운명은 얼마든지 바꾸어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입력조건을 바꾸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공덕이 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계, 정, 혜 삼학을 닦아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은 똑 같은 죄악을 지으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A3.99)라고 물었다.
강물 같은 공덕을 지으면 소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을 때 짠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입력 조건을 바꾸면 운명과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희망의 메시지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복음이다.
2022-05-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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