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에 대한 가장 정확한 번역어는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이 말은 에스엔에스에서 본 것이다. 어떤 이가 페이스북에 올려 놓은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여러가지 얼굴을 띄어 놓았다. 어느 것이 진짜 내 얼굴인지 모르겠다는 뜻일 것이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하나의 고정된 나가 있지 않음을 말한다. 나의 마음 속에서는 수많은 나가 있음을 말한다. 어쩌면 이를 다중인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다. 웃다가도 심각한 표정이 되기도 한다. 순간순간 감정에 따라 표정도 변하고 마음도 변한다. 대상에 따라 표정을 달리하는 것 같다. 아기가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는 것과 같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이다.
마음은 경망한 것
오늘 잠을 잘 잤다. 아침에 일어 났을 때 마치 정신이 리세트 된 것 같았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 앉은 듯이 마음이 정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 대상을 접하면 깨진다. 떠 오른 생각으로도 부서진다. 잔잔한 호수에 바람이 이는 것과 같다.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늘 사띠(sati)하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사띠할 것인가? 나에게 있어서 사띠의 의미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하는 것도 해당되고 경전을 읽는 것도 해당된다.
담마와 함께 있을 때는 마음이 다른 대상에 가지 있지 않는다. 마음은 내 버려 두면 어느 대상에든 있게 된다. 그래서일까 법구경 ‘마음의 품’에서는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했다.
마음은 제어하기 어려운 것(dunniggaha)이라고 했다. 또 마음은 경망한 것(lahu)이라고 했다. 마음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어서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고, 마음은 가벼운 것이어서 어디에든 내려 앉기 때문에 경망한 것이라고 했다. 나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미쳐 날뛰는 마음을 제어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가르침 밖에 없는 것 같다. 늘 경전읽기를 하고 게송을 외우고, 외운 경을 암송하고,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쓰는 등 항상 담마와 함께 했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다. 이런 것도 사띠에 해당될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5월 13일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이 확인해 주었다.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마음의 집합다발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5월 27일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이 역시 확인해 주었다.
최상의 기억이란?
앙굿따라니까야에 ‘아누룻다의 경’에 사띠와 관련된 가르침이 있다. 부처님은 사띠와 관련하여 “이 가르침은 새김을 확립한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새김을 잃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A8.30)라고 했다. 여기서 새김, 즉 사띠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매우 친절하다. 의문 제기로 끝나지 않는다. 고성제에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려서 오늘날까지 담마가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친절하게도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 하여 집성제를 설했다. 그리고 괴로움을 해소하는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사띠도 마찬가지로 본다.
부처님은 사띠에 대하여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A8.30)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친절하게 개념에 대한 정의를 해 준 것이다.
사띠는 기억과 분별력이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최상의 기억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분명하게 “삼법인이나 사성제 등과 같은 기억을 갖추어서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함을 말한다.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을 확인 시켜 주는 말 같았다.
사띠에 대한 가장 정확한 번역어는
사띠에 대한 여러가지 번역어가 있다. 요즘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고 있는 말은 ‘마음챙김’이다. 그러나 비판도 많다. 마음이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사띠의 본래 뜻과 맞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마음은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띠에 대한 가장 정확한 번역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일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일반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기억하는 것이다. 바로 이전에 행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치매환자의 예를 들었다.
치매환자는 사띠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가까운 기억일수록 그렇다. 바로 전에 행한 것도 기억할 수 없다면 사실상 축생과 다름 없을 것이다. 언어적 사유가 없을 때 사띠가 없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다. 이에 대하여 각 니까야 해제에서 새김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라고 했다.
전재성 선생은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어는 기억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혜가 있는 기억을 말한다. 이는 ‘분명한 앎’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전재성 선생이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한 것은 과거의 기억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기억도 해당된다. 오래 전에 행한 것도 기억이 되지만 바로 이전에 행위한 것에 대한 기억도 해당된다. 그런데 사띠는 반드시 지혜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사띠도 사띠 나름 일 것이다. 과거 후회한 것도 떠 올리는 것도 기억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띠는 일반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의 의미가 아니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 사띠의 진정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빠알리 원문을 분석해 보면
사띠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원문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빠알리 원문을 보면 사띠에 대하여 “기억하고 상기하며”라고 했다. 이 말은 “anussarati anuvitakketi”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논란이 있을 때는 원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사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은 사띠에 대하여 “기억하고 상기하며(anussarati anuvitakketi)”(A8.30)라고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은 사띠에 대한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빠알리원문을 분석해 보면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아눗사라띠(anussarati)라고 했을 때, 이 말은 ‘계속 기억한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아누(anu)는 ‘After under, again, in consequence of’의 뜻이 있는데 한자어로는 수(随)가 된다. 그래서 아눗사라띠(anussarati)는 ‘remembers, recollect’의 뜻이 된다. 계속 기억하는 것이다.
아눗사라띠는 초기경전에서 아눗사띠(anussati)의 의미로 사용된다. 부처님을 계속 생각했을 때 붓다눗사띠(buddhānussati)라 하는데, 이를 한자어로는 불수념(佛随念)이라고 한다. 부처님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님,…”(S11.3)라 하여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을 늘 생각하는 것이다.
담마에 대하여 늘 생각한다면 담마눗사띠(dhammānussati: 法随念)가 된다. 부처님의 담마에 대하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S11.3)로 시작되는 담마의 덕성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는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이 된다.
사띠에 대하여 수많은 해석이 있다. 또한 사띠에 수많은 번역어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띠에 대한 정의를 보면 아누비딱께띠(anuvitakketi)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상기하고” 또는 “사유하고”라고 번역했다.
아누비딱께띠는 어원적으로 분석했을 때 계속 상기하고 계속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언어적 작용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분별(nepakka)’이다. 그런데 분별은 언어적 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띠에 대한 정의를 보면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A8.30)라는 말이 전제조건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진리의 말씀은 항상 기억하고 사유해야
사띠에 대한 정의는 명백히 니까야에 실려 있다. 아누룻다의 경에서도 부처님은 “수행승이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A8.30)라고 했다..
사띠의 전제조건은 “최상의 기억과 분별(paramena satinepakkena)”이다. 왜 최상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을 기억(sati)하고 분별(nepakka)하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항상 기억하고 사유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외워야 할 것이다. 외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틈만 나면 암송해야 할 것이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사띠의 전제조건으로 분별을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분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분별을 뜻하는 빠알리어 네빡까(nepakk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영어로는 ‘prudence, discrimination, carefulness’의 뜻이다. 또 ‘usually as sati’로 설명해 놓았다. 네빡까는 일반적으로 늘 사띠와 함께 쓰인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새기어 신중하게 주의 깊게 사유하라.”라는 말과 같다.
네빡까는 사전적으로 신중, 분별, 주의 깊음의 뜻이 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S48.9)을 보면 오력중에서 새김의 능력에 관한 설명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정형구와 똑같다. 다만 다른 니까야에서 볼 수 없는 주석이 각주에 설명되어 있다 각주에서 네빡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분별을 갖춤은 총혜인데 지혜를 언급하는 것이다. 왜 새김을 말하면서 지혜를 언급하는가? 새김의 강력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는 강력한 새김이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혜와 결합되면 강력한 힘을 갖추지만 분리되면 그렇지 못하다. 지혜와 결합된 새김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Srp.III.234)
참으로 놀라운 설명이다. 주석가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후학들을 위해서 설명해 놓은 것이다. 놀랍게도 신중, 분별, 주의 깊음을 뜻하는 네빡까에 대하여 지혜와 관련해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늘 듣는 소리가 늘 사띠하라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쓰고, 게송을 외우고, 외운 경을 암송하고, 또 경전읽기를 하다 보면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사띠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은 사띠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최상의 진리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언제 들어도 새롭고 새로운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대로 실천한다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따를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 당시부터 진리의 말씀은 암송되어 왔다.
진리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암송한다면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띠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A8.30)라고 했다. 사띠의 조건이 기억과 분별이 되는데 이는 진리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사유하라는 것이다.
사띠를 마음챙김이라 하는데
사띠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사띠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어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각묵스님이 지은 ‘초기불전의 이해’(초기불전연구원)를 보면 2세기 중국의 안세고의 ‘불설안반수의경’을 예로 들었다.
안반(安般)이라는 말은 아나빠나(āṇāpana)를 번역한 말이다. 수의(守意)라는 말은 사띠(sati)를 번역한 말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이처럼 이미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던 최초기에 마음챙김은 보호로 이해 되어 왔다. 이런 것을 참조해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겼다.”(초기불교이해, 283-284쪽)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번역했다. 이 말에 대하여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화두챙김의 의미와 같다고 했다. 더 나아가 “한국에서 sati(Sk.smrti,念)를 마음챙김으로 제일먼저 정착시킨 분은 고요한 소리의 고문이신 활성스님이시다. 활성스님께서 이렇게 옮기자 저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후학들이 이를 채용해서 쓰고 있다.”(초기불교의 이해, 284쪽 184번 각주)라고 설명해 놓았다.
정확한 번역어의 사용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수행관련 용어가 그렇다. 사띠에 대하여 단지 마음챙김이라고 했을 때 사띠의 본래 의미와 멀어진다. 더구나 화두챙김의 의미로 설명했을 때 더욱 더 멀어진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에 “마음챙김은 부정확한 번역입니다.”라고 말했다.
일묵스님과 일창스님은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사띠를 마음챙김이라 하여 화두챙김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기억을 뜻하는 사띠를 잘 표현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일까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보면 사띠에 대하여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해내고 생각해 낸다.”(S48.9)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보면 사띠의 정의에 대하여 기억의 의미가 있다고 번역해 놓았다. 이와 같은 사띠의 기능에 대하여 각주에서 “여기서 마음챙김의 기능은 알아차림을 강조하는 마음챙김의 측면보다는 기억의 측면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상윳따니까야 5권 409번 각주)라고 해설해 놓았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사띠가 국적불명의 번역어인 마음챙김이라기 보다는 기억임에 틀림 없다.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말하는 것이 대세인 시대가 된 것 같다. 위빠사나를 응용한 MBSR을 소개할 때도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광범위하게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교학적으로도 수행적으로도 사띠를 표현하기에는 적확한 말은 아니다.
최근 제따와나선원의 일묵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기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튜브 법문에서 본 것이다. 일묵스님은 왜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버리고 기억으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사띠가 본래 기억의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띠는 선법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는 수행중의 체험한 것도 해당된다.
일묵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기억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이렇게 바꾼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에서 한계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고 말한다. 유튜브 법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김 역시 기억과 관련이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한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의무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사띠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기억에 있다. 이전행위를 기억하는 것도 기억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띠는 이런 일상적인 기억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지혜와 결합된 기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지혜의 말씀이고 진리의 말씀이 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을 사띠로 본다. 내가 의무적으로 경전읽기를 하고, 의무적으로 게송을 외우고, 의무적으로 외운 게송을 암송하고, 의무적으로 경전과 주석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내가 생각하는 사띠는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띠는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늘 새기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경을 암송한다. 요즘에는 숫따니빠따 빠다나경(정진의 경, Sn.3.2)를 암송하고 있다. 25게송이나 되는 긴 길이의 경이다.
집에서 일터로 갈 때 20여분 걸린다. 오늘 아침 일요일임에도 눈을 뜨자 마자 일어나자 마자 아파트를 나섰다. 비산사거리 이마트를 지나고 안양천을 건넌다. 거의 5천세대나 되는 거대한 메가트리아 아파트 단지를 가로 질러 굴다리를 지나 오피스텔에 이르면 20여분 걸린다. 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빠다나경을 암송한다. 암송하다 보면 스스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것 같다.
집에서는 머리맡에 맛지마니까를 두고 있다. 틈만 나면 열어 본다. 맛지마니까야 152경 중에서 현재 90번 경까지 읽었다. 진도를 많이 나가지 않는다. 읽고 새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두 달 지나면 다 읽을 것 같다.
마음은 가만 있으면 늘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은 본래 악한 것이 된다. 정말 그런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취온적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음은 늘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게 된다. 이런 마음은 제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Dhp.35)라고 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늘 사띠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사띠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어떻게 기억하는가? 쓰고, 읽고, 외우고, 암송하면서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늘 기억하고 사유해야 한다.
2022-06-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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