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다(蘊)는 무더기일까 다발일까?
나에게 아침은 시간은 황금시간이다. 집중을 요하는 일은 아침에 처리한다. 글쓰기도 그렇다. 아침 일찍 맑은 정신으로 하얀 여백을 대했을 때 존재감을 느낀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들은 것을 글로 써야 한다. 모임 후기를 쓰는 것이다. 오늘은 존재의 다발에 대해서 써 보기로 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본을 보면 오온에 대하여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로 번역했다.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이에 대하여 5월 27일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으로부터 들었다.
부처님은 오온(五蘊)을 말했다. 그러나 브라만교에서는 영혼을 말했다. 두 가지 이론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아뜨만과 같은 영혼을 부정했다. 그 대신 우리 몸과 마음은 다섯 가지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했다.
다발은 칸다(khandha)를 번역한 것이다. 칸다는 한자어로 온(蘊)이라고 한다. 이는 무더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색, 수, 상, 행, 식에 대하여 오온이라고 말한다. 이를 다섯 가지 무더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재성 선생은 이와 같은 번역에 대하여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칸다는 쌓음을 뜻하는 무더기가 아님을 말한다.
칸다가 왜 다발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힘줄과 노끈으로 설명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칸다는 어깨 근육의 다발과도 같은 것이고, 또한 수많은 가닥으로 꼬여 있는 노끈과도 같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다발은 단지 쌓음을 뜻하는 무더기와는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전재성 선생은 노끈이론으로 칸다를 설명했다. 그런데 노끈이론으로 영혼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은 하나의 긴 끈과 같은 것이지만 그런 끈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노끈처럼 수많은 끈들의 다발을 이루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개별적 자아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긴 노끈이 있다. 또는 긴 밧줄이 있다. 공통적으로 꼬여 있다. 그런데 노끈이론에 따르면 끈 하나가 끝까지 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점에서 시작 되어서 어느 시점에서 끝난다. 이렇게 수많은 끈이 꼬이고 꼬여서 긴 노끈이 된다. 오온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힘들면 죽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진짜 죽는 사람들은 드물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노끈이론으로 설명한다. 우리 몸과 마음은 수많은 끈이 꼬여서 된 것과 같기 때문에 어느 한마음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 살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죽지 못한다고 말한다.
노끈이론에 따르면 순수한 하나의 마음은 있을 수 없다. 영혼이나 아뜨만과 같은 순수한 하나의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있다면 수많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생멸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마음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생명체는 무수한 다발로 이루어진 불연속적 존재입니다. 마치 질이 노끈처럼 꼬여져서 진행됩니다.”라고 말했다.
노끈이론에 대하여 좀더 알아보았다. 한국빠일성전협회에서 발간된 니까야 번역서를 보면 해제에 용어설명이 있다. 칸다에 대한 것도 있다. 해제에서는 칸다에 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을 인용하여 설명해 놓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노끈의 강도는 처음에 끈으로 달리는 단 하나의 가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가닥도 노끈의 전부를 달리지 않으며 때때로 겹치고 엇갈리는 섬유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칸다의 다발 및 존재의 다발, 각 니까야 해제)
전재성 선생의 번역어 ‘다발’은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해제에서 “초기불교에서 윤회는 바로 존재의 다발의 지속적 연결이고 그것은 바로 이 노끈의 연결과 유사하다.”라고 했다.
윤회는 존재의 다발의 연속이라고 했다. 하나의 끈으로 연속적으로 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가닥의 끈으로 지속되는 자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발론은 무아를 설명하기에 매우 적합한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칸다를 무더기로 번역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이 지은 '초기불교이해'를 보면 칸다에 대하여 “다섯 가지들의 적집이나 무더기나 낟가리나 쌓임 등을 뜻하고 있다.”(초기불교이해, 111쪽)라고 설명했다. 칸다를 무더기로 번역한 이유가 된다. 더구나 영어로 'aggregate'로 정착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런 점들을 참조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술어를 ‘무더기’로 통일하여 옮기고 있다.”(112쪽)라고 했다.
칸다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PCED194에서 검색해 보니 칸다에 대하여 ‘bulk, massiveness’라고 했다. 이것은 천연그대로의 거친 표현이다. 칸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사전에서 이어지는 설명이 있다. 이는 “its back S.I,95; vāraṇassa J.III,392; hatthi-khandha-vara-gata on the back of the state elephant J.I,325”라는 내용이다. 칸다에 대하여 경적적 근거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S.I,95’는 상윳따니까야 ‘사람의 경’(S3.21)을 말한다.
상윳따니까야 '사람의 경'을 찾아 보았다. 칸다와 관련되어 있는 구절은 ‘코끼리의 어깨’라는 말이다. 이 말은 빠알리어로 ‘hatthikkhandhā’의 번역이다. 여기서 핫티(hatthi)는 코끼리를 말하고, 칸다(khandhā)는 어깨로 번역된다. 칸다에 대하여 코끼리의 어깨라고 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니까야 해제에서 칸다에 대하여 “어깨 근육처럼 다발로 뭉쳐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전재성 선생은 칸다에 대하여 무더기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단순히 더미라는 말은 긴밀한 연기적 의존관계를 반영하기에는 통일성이 없는 개별적 부품처럼 인식될 수 있다. 역자는 그래서 다발이라는 말을 쓴다.”(각 니까야, 해제)라고 했다.
칸다는 무더기일까 다발일까? 분명한 사실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나 초기불전연구원에서나 공통적으로 칸다의 어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 ‘사람의 경’(S3.21)과 ‘수찔로마의 경’(S10.3)을 말한다.
경에서 칸다에 대한 표현이 있다. 사람의 경에서는 “코끼리의 등에 오르고(hatthikkhandhaṃ āroheyya)”(S3.21)라고 했다. 수찔로마의 경에서는 “뱅갈 보리수의 줄기에 난 싹들처럼(nigrodhassevi khandhaja)”(S10.3)라고 했다. 칸다에 대하여 코끼리의 어깨와 나무의 줄기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칸다는 어깨의 근육 같은 것이다. 또한 칸다는 나무의 줄기 같은 것이다. 공통적으로 다발로 뭉쳐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살아 있다는 것이다. 칸다는 생명이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칸다는 단순하게 무더기나 쌓임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칸다를 ‘무더기’로 번역했다. 이 대하여 적집이나 무더기나 낟가리나 쌓임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경전적 근거를 든다면 칸다는 단순한 적집이나 낟가리나 쌓임의 의미가 아니다. 칸다는 다발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명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칸다는 단순한 무더기나 적집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근육처럼 수많은 가닥의 힘줄이 다발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고, 또한 수많은 끈으로 꼬여져 있는 노끈의 다발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칸다에 대한 번역어는 무더기라는 말보다 존재의 다발이라는 말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칸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한 가닥의 정신적 섬유로서의 자아(atta, sk.atman)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주이적(住異的)으로 무상하지만 겹치고 꼬이면서 상호의존하며 수반되는 섬유들로서의 오온에 의해 확증되는 지속성은 있다.”(칸다의 다발 및 존재의 다발, 각권 니까야 해제)
어느 힘줄도 어느 끈도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것은 없다. 수많은 힘줄, 수 많은 끈이 가닥을 이루어 끊임 없이 가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끈이 끝까지 간다면 이는 자아론이 된다. 그러나 수많은 끈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발이라면 자아론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다발론은 무아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흔히 내 마음 나도 모른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나의 마음에는 수많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수많은 자아가 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대체 어느 것이 내 마음일까? 그래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죽기로 마음 먹으면 금방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은 복잡한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 느낌의 다발, 지각의 다발, 형성의 다발, 의식의 다발이라고 한다. 어깨 근육처럼 뭉쳐져 있고, 노끈처럼 감아져 있다. 어느 느낌이 나의 느낌인지 알 수 없고, 어느 지각이 나의 지각인지 알 수 없다. 당연히 어느 마음이 내 마음인지 알 수 없다. 내 마음 나도 모르는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모르기 때문에 무아이다. 내 마음이 여러 마음이기 때문에 무아이다. 마치 근육의 다발처럼, 나무의 줄기처럼, 노끈처럼 수많은 마음이 다발을 이루고 있다. 그것도 생멸하는 마음의 다발이다. 어느 것이 나의 마음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무아이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 하는 실은 없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의 마음은 없다. 마음은 마치 불과도 같다.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면서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존재의 다발은 탐, 진, 치를 연료로 하여 계속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칸다는 무더기인가 다발인가?
2022-06-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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