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신은 있을까?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사람에게는 신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들이 듣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시력이 약하다면 남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의 청력이 약하다면 남이 듣는 것을 듣지 못할 것이다. 후각도 그럴 것이다.
후각이 약하다. 남들은 냄새에 민감하여 금방 알게 되지만 강하게 자극할 때만 알게 된다. 남들이 냄새 맡을 때 나는 냄새 맡지 못할 수가 있다. 이럴 때 냄새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하여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신도 그런 것 아닐까?
무언가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일반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신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신에 대해서 무수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니까야에서 언급된 무수한 신에 대한 이야기는 허황되게 보일지 모른다. 자신의 눈으로만 확인된 것만 믿는 사람이라면 니까야를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경만 취할 것이다. 염처경 같은 수행지침에 대한 경을 말한다.
니까야에는 수많은 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고 제일원인이 되는 창조주로서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도윤회하는 신을 말한다.
신의 존재를 알고자 한다면
7월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두 번째로 합송한 것은 신에 대한 경이었다. 이는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 ‘빛의 형태에 대한 지각과 천신들과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천상의 앎과 봄에 대한 경’(A8.64)을 말한다. 이를 ‘가야시사의 경(Gayāsīsasutta)’이라고도 한다.
경에서는 모두 여덟 단계의 신에 대한 앎의 설명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1)하늘눈을 통한 앎, 2)초월적 능력을 통한 앎, 3)마음을 읽음을 통한 앎, 4)업의 발현을 통한 앎, 5)미래에 대한 앎, 6)현재의 앎, 7)과거에 대한 앎, 8)전생에 대한 앎이라고 했다.
경에 따르면 신은 있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단계적으로 신의 존재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빛에 대한 지각이 있어야 한다. 왜 그럴까? 신을 뜻하는 데바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the Radiant Ones’의 뜻이다. 빛을 내는 존재라는 뜻이다.
빛을 내는 존재로서 신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등장한다.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에서는 색계 천신에 대하여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래산다.”(D27)라고 묘사되어 있다.
빛으로 되어 있는 존재는 깃털 보다 가볍기 때문에 날아 다닐 것이다. 또한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디에든지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신들의 세계를 보고자 한다면 신통을 닦아야 할 것이다. 색계 사선정을 닦아야 신통이 생겨난다고 한다.
신을 보려면 먼저 빛을 지각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하늘눈(dibbacakkhu: 天眼)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천안이 생겨나야 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단계이다.
천안이 생겨나면 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신의 형태를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만약 내가 광명을 지각하고 형태를 본다면, 나에게 앎과 봄이 더욱 정화될 것이다.”(A8.64)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알기만 해서는 안된다.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알고 보는 것을 냐나닷사나(ñāṇadassana)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지견(知見)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교학적으로만 안다면 이는 냐나(앎)에 해당된 것이고, 수행으로 확인한다면 닷사나(봄)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항상 앎과 봄이 함께 해야 함을 말한다.
신의 존재를 알고자 한다면, 신의 존재를 보고자 한다면, 앎과 봄이 함께 해야 한다. 먼저 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수행을 함으로써 보는 것이다. 신통의 힘으로 알고 보게 되었을 때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경에 따르면 신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이 천신들은 이러한 업으로 여기서 죽어서 저기에 태어났다고 알았다.”(A8.64)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다섯번째 단계인 ‘신의 미래에 대한 앎’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을 깨우쳐 준 부처님
신들도 수명이 있다. 그런데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산다는 것이다. 삼십삼천의 경우 인간의 백년은 반나절에 지나지 않는다. 색계천신이라면 겁단위로 산다. 어느 천신은 너무 오래 살아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영생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은 깨우쳐 주었다. 바까 하느님(brahma)이 대표적이다. 이는 여섯번째 단계인 ‘신의 현재의 앎’에 대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 ‘하느님 바까의 경’이 있다. 경에 따르면 하느님 바까는 망상가형이다. 왜 망상가형인가? 그는 “이것만이 항상하고, 이것만이 영원하고, 이것만이 완전하고, 이것만이 불변의 진리이다.”(S6.4)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영원주의이다.
하느님 바까가 망상가가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주석에 따르면 바까는 선정을 닦았다. 네 번째 선정의 경지에 해당되는 광과천에 태어났는데 수명이 5백겁이었다. 그 다음에 태어난 곳은 수명이 60겁에 해당되는 변정천에 태어났다. 이후 계속 강등되어서 수명이 8겁인 극광천에 태어났고, 현재 수명이 1겁인 대범천에 태어난 것이다.
하느님 바까는 선정을 닦은 공덕으로 색계천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복과 수명이 다했을 때 아래 세상으로 떨어졌는데 계속 강등되다가 마침내 수명이 1겁 밖에 되지 않는 대범천에 태어난 것이다.
하느님 바까는 윤회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잊어 버렸다. 고작 1겁을 사는 것임에도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나쁜 견해가 생겨났다. 어떤 견해인가? 이는 “왜냐하면 이것은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까닭이다.”(S6.4)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것보다 높은 다른 벗어남은 없다.”(S6.4)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하는 존재임을 망각하고 영원주의를 취한 것이다.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하느님 바까가 전생에 수행자였음을 알려 주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견고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S6.4)
하느님 바까는 무명에 빠졌다. 이는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모르고 상, 락, 아에 빠진 것을 말한다. 이런 하느님에게 부처님은 “그대가 다른 벗어남이 있는데도 다른 보다 높은 벗어남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S6.4)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영원주의 비판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하느님 바까와 대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은 정신능력을 계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덟번째 단계는 ‘신의 전생에 대한 앎’이 되었다. 이는 “이 천신들과 내가 예전에 함께 살았는지 예전에 함께 살지 않았는지를 알았다.”(A8.64)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만약 신(神)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면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과 하느님 바까와의 대화가 소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선정을 닦아 정신능력을 계발하여 신들과 소통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초기경전에서는 무수하게 하늘사람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는 데바따 상윳따(S1)와 데바뿟따 상윳따(S2)가 별도로 지정 되어있다. 이를 하늘사람의 모음과 하늘 아들의 모음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악마와도 대화했다. 이는 마라 상윳따(S4)에서 확인 된다. 하느님과도 소통했다. 이는 브라흐마 상윳따(S6)에서 확인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처님은 왕과도 소통했다. 이는 꼬살라 상윳따(S3)에서 확인 된다. 부처님은 신뿐만 아니라 악마, 왕 등 모든 존재들과 소통했다. 왜 이런 소통이 중요할까?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선언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번 굴린 나의 하늘에 대한 앎과 봄이 아직 정화되지 않았더라면,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곧바로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번 굴린 나의 하늘에 대한 앎과 봄이 완전히 정화되었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곧바로 깨달았다고 선언했다.”(A8.64)
이 문장은 초전법륜경(S56.11)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에 사성제를 세 가지 형태로 열두번 굴려서 진리임을 확신 했을 때 선언했다. 누구에게 선언했는가? 이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진리를 천명했을 때 여러 검증과정을 거쳤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사성제에 대하여 삼전십이행상으로 설명했고, 가야시사경에서는 신들에 대하여 여덟 번 굴린 것으로 설명했다. 왜 이런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이는 “하늘에 대한 앎과 봄이 아직 정화되지 않았더라면”(A8.64)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만약 하늘사람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의 선포에 있어서 신들이 빠져 있을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악마에 대하여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악마에 대한 항목도 빠져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신들도 알고 악마도 알았다. 그래서 자신 있게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라며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곧바로 깨달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초기경전을 접하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니까야를 읽으면 읽을수록 확신을 갖게 된다. 니까야는 틀림없는 부처님 원음이라는 사실이다. 이번에 합송한 경도 그렇다. 부처님이 신들에 대하여 앎과 봄에 대하여 여덟 가지 단계로 설명했는데 이는 부처님이 신들의 세계를 꿰뚫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신들에게도 진리를 선언한 것이다.
신은 정말 있을까?
신은 있을까? 마치 귀신은 있는지 물어보는 것 같다. 이런 질문에 “귀신이 있다고 믿는다면 있는 것이고, 귀신이 없다고 믿는다면 없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치 뱀장어처럼 빠져 나가는 회의론이 될 것이다. 그라나 부처님은 신은 있다고 했다.
부처님이 신이 있다고 했을 때 창조주로서 신은 제외 된다. 제일원인이 되는 신은 연기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대신 윤회하는 존재로서의 신은 있다고 했다. 앞서 언급된 망상가형 하느님 바까도 해당된다.
신은 정말 있을까?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그런데 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신에 대하여 반신반의했던 것 같다.
바라문 청년 쌍가라바는 “존자 고따마여, 신들은 있습니까?”(M100)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드와자여, 나에게 홀연히 신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집니다.”(M100)라고 답했다. 화생하는 존재로서 신이 있음을 말한다.
바라문 청년 쌍가라바는 화생의 존재로서 신을 믿을 수 없었다. 이에 “알려집니다.”(M100)라는 말을 문제 삼았다. 말꼬리를 잡은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그것은 공허하고 거짓된 것입니까?”(M100)라며 의문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실제적인 지혜 없이 말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잘못 말했다고 비난한 것이 된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보충설명 했다.
“바라드와자여, 누군가 ‘신들은 있는가?’라고 질문을 받고 ‘신들이 있다.’라고 대답하거나 ‘나에게 홀연히 신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라고 대답하더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신들이 있다.’라는 결정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M100)
신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에게 신이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신이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면 또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알려집니다.”라고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하면
신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은 신이 있다고 말하면 증거를 대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에게 신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침묵해야 한다. 말하면 오해를 사기 때문이다.
바라문 청년은 신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신에 대해서 말해준 것은 자비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드와자여, ‘신들은 있다.’라는 것은 세상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M100)라며 우회적으로 말했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신이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양이 차지 않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그 사람의 무지를 탓해야 한다.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한계인 것이다.
신은 정말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 신을 보지 못해서 알 수 없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신들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또한 부처님의 별칭 중의 하나에 대하여 ‘신과 인간의 스승(satthādeva-manussānaṃ, 天人師)’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신은 인간과 친숙한 존재이다.
니까야에서는 무수한 신들이 등장한다. 모두 윤회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말한다. 흔히 하느님(brahma)이라고 말하는 색계천신도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수많은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부처님이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이자 수호경인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는“신들과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이렇게 오신 님, 부처님께 예경하오니”(Stn.236)라고 되어 있다.
왜 천수념(天隨念) 해야 하는가?
신은 있을까? 똑 같은 질문을 계속 던져 본다. 그렇다고 신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부처님은 신의 존재를 의문하는 사람에게 ‘신은 있다고 알려진다’라며 우회적으로 말했다. 무지한 자에게 베푸는 최대한의 자비라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불교는 신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종교라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수많은 신이 등장한다. 여래십호에서 천인사도 있다. 예불문에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도 경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부처님은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를 말한다. 또한 불교에서는 삼계를 말한다. 공통적으로 천상이 있다. 이와 같은 천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불교는 종교로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만 철학적으로는 존재할 것이다.
불교가 불교이게끔 하는 것은 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니까야에서는 수많은 천신들 이야기와 수많은 천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천수념(天隨念)일 것이다.
“마하나마여, 또한 고귀한 제자는 신들에 관하여 이와 같이 ‘네 위대한 왕이 있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서른 셋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축복받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만족을 아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창조하고 기뻐하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남이 만든 것을 지배하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하느님의 권속인 하느님 세계의 신들 등이 있다. 그 신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갖추고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나에게도 역시 믿음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나는 그와 같은 믿음이 있다. 그 신들은 이와 같은 계행을 갖추고… 그 신들은 이와 같은 배움을 갖추고… 그 신들은 이와 같은 보시를 갖추고… 그 신들은 이와 같은 지혜를 갖추고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나에게도 역시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나는 그와 같은 지혜가 있다.’라고 새김을 확립합니다.”(A6,10)
천수념에 대한 가르침이다. 믿음, 계행, 보시, 지혜를 갖추면 신들의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신들의 세계는 욕계의 6욕천 뿐만 아니라 범천도 있다. 모두 합하면 28천이 된다.
천수념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먼저 신들의 덕성을 새기고 나중에 자신에게 있는 믿음 등을 새기라고 했다. 이렇게 천수념했을 때 “그때에 탐욕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성냄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그때에 신들에 관하여 마음이 올바로 정초됩니다.”(A6,10)라고 했다.
천수념하는 것은 탐, 진, 치를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신들의 덕성, 즉 믿음, 계행, 보시, 지혜를 새기는 것이다. 나도 천신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마타수행에 해당된다. 그러나 청정도론에 따르면 근본삼매에는 들지 못하고 근접삼매에 들 것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여러종류의 덕성을 새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호천사로서의 천신
천수념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신들에 대한 새김에 매진하는 수행승은 신들이 사랑스러워하고 마음에 들어하고”(Vism.7.118)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천수념하면 신들이 도와준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출가수행자를 도와 주는 천신이 종종 등장한다. 마치 지켜 보는 듯 하다. 수행승이 혹여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나타나서 충고를 해 주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향기도둑의 경’(S9.14)이 대표적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천신이 감응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그런데 그때 재가의 여자 신도인 벨루깐다끼야 난다마따가 날이 밝자 일어나 피안으로 가는 길을 암송하고 있었다. 그때 대왕 벳싸바나가 무언가 할 일이 있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 대왕 벳싸바나는 재가의 여신도 난다마따가 피안으로 가는 길을 암송하는 것을 들었다. 들으면서 암송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서 있었다.”(A7.53)라는 구절로도 알 수 있다.
요즘 경을 암송하고 있다. 부처님이 악마와 싸워 승리한 것을 모티브로 한 빠다나경(정진의 경, Sn3.2)을 말한다. 매일 틈나는 대로 암송한다. 그런데 한번 암송하고 나면 상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중도 잘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하면 천신도 감응한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천상에 태어난 천신이 과거 전생에 경을 암송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암송한 것과 동일한 경을 누군가 암송하고 있을 때 감응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천신은 수행자에게 일종의 수호천사와 같은 것이다.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가르침이 보호해 준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천신이 보호해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감응을 하지 못해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천신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부처님도 천신과 감응하기 위해서 마음을 계발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여덟 단계로 설명해 놓았다. 이와 같은 여덟 단계를 거치게 되자 부처님은 자신 있게 선언했다. 천신들에게도 진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선포할 때“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라는 정형구가 나오게 되었다.
2022-07-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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